소설리스트

88화 (88/120)

제88화

가볍게 그의 손이 스쳐 지나가자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해졌다.

“어?”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말도 진정했으니 괜찮을 거야.”

“그래야지. 센 공작의 표정을 봐야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이 곁에 있다고 말만 했을 뿐인데도 든든했다.

가뿐히 나를 들어 말 위에 올린 리온이 싱긋 웃었다.

“여기로 가면 선물 있어.”

“……선물?”

“그래, 그러니까 꼭 사람을 불러서 확인시켜 놓고 가.”

리온은 그 말을 남기곤 내 뒤로 다시금 올라탔다.

“리온?”

“혹시 모르니까 제니스 황녀와 만나는 곳까지는 데려다줄게.”

나를 끌어안는 리온의 손과 딱딱한 가슴팍이 등 뒤로 닿았다.

아, 이런 감정 오랜만에 느껴보는데.

이럴 때 느끼면 변태 아닌가……?

나는 황급히 이성을 되찾고는 헛기침을 했다.

“어, 얼른 가자!”

이럴 땐 말을 돌리는 게 최고야.

리온의 손이 내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달리는 말과 올라탄 나와 리온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호흡이 가빠 왔지만, 애써 침착하게 앞을 보았다.

말이 미친 듯이 달리는데 내 심장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 * *

나는 리온과 함께 제니스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다다랐다.

그녀가 먼저와 있었던 모양인지, 나와 리온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엘르 영애!”

그녀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와 내게로 달려왔다.

주변엔 다른 사람들 역시 함께 있었다.

“황녀님, 저분들은?”

나는 마치 그녀를 지키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위험해 처했던 건 나였는데 왜 제니스가 보호를 받고 있는 거야.

하긴 황녀가 위험하면 큰일이 날 테니까.

“비명 소리가 들렸지 뭐예요. 다들 돌아갔답니다.”

“……저를 구하러 오신 건가요?”

“다행히 리온 님이 달려가는 걸 보고 안도했지만.”

“리온?”

리온은 굳은 표정으로 제니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 단단하게 힘을 준 그는 제니스를 빤히 응시했다.

“사나운 들짐승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제니스는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기사들 뒤로 시체가 보였다.

‘아, 우리가 한 발 늦었네.’

그렇다면 엘과 그림자들은 하는 수 없이 모습을 곧바로 감췄을 터.

아버지의 귀에는 이미 들어갔을 테고,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리온 님께선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생각인가요?”

제니스가 눈을 접어 웃으며 나와 리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리온의 손에 힘이 스륵 풀렸다.

원망 어린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제니스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그 자린 리온 님이 있을 곳이 아니잖아요.”

으득. 이가 갈렸다.

나는 리온을 꽉 끌어안으며 제니스를 노려보았다.

문양의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지켜 내고 싶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괴롭힘을 당하는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제니스 역시 그걸 알아차렸는지 이내 손을 거뒀다.

“일단 돌아가도록 하죠.”

“황녀님께서 먼저 앞장서시면 따라갈게요.”

나는 리온의 품에 안긴 채 제니스를 빤히 보았다.

그녀가 내게 위협을 가했다면 나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놓아주지 않아야겠지.

“리온 님이 힘들어하는 건 보이지 않는 모양이죠?”

제니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리온을 보았다.

식은땀이 역력했다.

“리온 괜찮아? 힘들면…….”

말에서 내려도 괜찮아.

하지만 이 말이 목구멍에서 걸려 뱉어지지 않았다.

‘리온이 힘들어하고 있잖아.’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를 놓아주지 못했다.

“……이런, 걱정된 마음에 왔더니 역시나 계시는 군요.”

“센 공작님.”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막상 날 죽이려 했던 놈을 마주치자 등골이 오싹했다.

나를 죽이려 했던 자와 얼굴을 맞대게 되다니.

그는 뻔뻔하게도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그냥 대놓고 드러내겠다는 거네. 벼랑 끝에 몰렸다는 거잖아.’

자 어떻게 나올 거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센 공작을 응시했다.

내 몸을 빠르게 훑어 내려간 시선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묘한 기류를 풍겨 대고 있는 우리를 보며 내게로 다가왔다.

“리온 님께선 다치신 것 같으니 엘르 영애는 제가 함께 모셔도 됩니다.”

“아니요, 저는 리온과 함께 가겠어요.”

“그건 곤란합니다. 엘르 영애, 이유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센 공작은 제니스를 힐끔 보며 낮게 웃었다.

그는 지금 명백히 협박하고 있었다. 제니스에게 나와 자기의 사이를 밝히겠다는 의도였다.

문양을 가졌음은 알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붉은 문양임을 알고 있으니 센 공작이 반려란 걸 알게 되면…….

“죄송하지만 그건 곤란합니다. 저는 엘르 님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서 말입니다.”

리온은 센 공작을 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공식적으로 그는 예전에 벨루아 가문에서 내 호위 기사였다. 그렇기에 그가 나를 보호하려 하는 것은 정당했다.

“기사의 맹세를 했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잖아!

화들짝 놀란 내가 움찔거렸지만,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곤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기사의 맹세를 했다면, 나를 무슨 상황에서든 지키려 하는 게 이상하진 않을 터.

하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센 공작님 이번에는 양보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나오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는 고삐를 틀어 앞장섰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시죠.”

분명 그는 내가 죽었는지 확인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들 빠져나간 사냥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나를 발견했을 때의 그 눈빛.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제니스는 하는 수 없이 말에 올라탔다. 그녀의 두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다른 이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 * *

쾅!

“배, 백작님 제발 진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센 역시 그림자의 보고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마음이 통하네.”

에드가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무리까지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쥐새끼가 또 있었군.’

아마도 그건 황실 쪽일 테지.

에드가는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그런 일을 벌이고자 사냥 대회에 불러냈단 말인가?

“황실의 개입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델테르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확실하겠지.”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감시했던 그림자들은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고 했다.

어쩌면 제니스와 센 공작의 연합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황제가 아무것도 몰랐을 리는 없었다.

무려 황제가 주최한 행사였다. 그런데 이런 일을 벌이면서 언급도 하진 않았을 리 없었다.

에드가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받은 건 배로 갚아 줘야지.”

에드가는 손을 모은 채 턱을 괴었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헤센은 그런 에드가를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물론, 그는 이번에는 말릴 생각이 없었다.

이번 일로 센 공작의 목을 칠 빌미는 얻은 셈이니까.

* * *

사냥 대회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으로 끝이 났다.

며칠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기에 바로 끝내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나와 제니스 그리고 리온과 센 공작이 나오고 나서야 모든 이들이 모였다.

나는 델테르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하, 그러니까 기습을 당했다?”

“제 몰골만 봐도 답이 나올 텐데요.”

믿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삐딱하게 묻는 거야.

나는 팔짱을 끼곤 델테르를 빤히 응시했다.

내 옆에 있는 리온의 몰골을 봐. 누가 봐도 살아서 오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 같잖아.

내 머리는 엉망이었고, 땀에 젖어서 말이 아니었다.

“……일단 진상을 조사해 보겠다.”

“그걸로 끝내실 생각은 아니겠죠? 아버지에게도 전갈이 갔을 거라 가문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황실에서 주최한 행사인데 좋게 넘어갈 순 없나?”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황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려나.”

나는 제니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황녀님과 떨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델테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역력했지만, 나는 쫄지 않았다.

지금 죽다 살아서 왔는데 간이 얼마나 커져 있겠는가.

“말 그대로예요. 황녀님이 저와 떨어져서 사냥을 하길 권했고, 그런 순간부터 저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으니까요.”

사실 미리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말이 흥분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기도 했고, 그때 리온이 달려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로 실종되었을지도.

아주 영영 사람들이 찾지 못하도록 묻어 버릴 기세였으니까.

“제니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델테르의 눈이 번뜩였다. 제니스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채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몰랐어요. 그저 우승하고 싶어서 따로 움직이자고 했을 뿐이었어요.”

“그렇다는군.”

델테르는 제니스의 말을 믿는 것처럼 행동했다.

저게 신뢰가 가?

그게 간다고?

허, 참. 황실 뒷배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소했다. 이렇게 나오면 답이 없었다.

정식으로 걸고넘어질 수밖에.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황녀님께선 제 쪽으로 오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리온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제니스는 당혹스러운 표정 하나 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동물들이 화살을 맞아 울부짖는 소리라면 모를까.”

“아아. 엘르 님 또한 동물처럼 여겼다는 말씀이신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제니스는 분노했다. 리온은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