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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120)

제86화

“황녀님 옆에서 보좌할 테니 조심해서 달리세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곤란하니까요.”

제니스는 모르겠지만, 나는 목숨 걸고 이곳에 나왔다.

내가 아닌 제니스에게 일이라도 생긴다면…….

사실 그녀와 함께 다니게 되면 센 공작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테니 마음은 편했다.

“그건 걱정 말아요. 짐이 되진 않을 테니.”

제니스는 앞만 보고 대답했다.

사실 제가 오늘 황녀님의 짐이 될 예정이랍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끌어들인 건 황제였으니 내 탓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보았다. 그 순간 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싱긋 웃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도 다행인가. 리온이라도 있어서……?’

단단히 준비하긴 했어도 심적으로 의지가 되는 것은 다르니까.

곧이어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출발했다.

나 역시 제니스와 숲 안으로 여유롭게 말을 몰며 움직였다.

숲 안쪽으로 들어오자 하나둘 시선에서 보이지 않았다.

리온도 어딜 갔는지 금세 사라졌다.

도대체 뭐가 걸렸길래 이토록 열심히들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 일등 하게 되면 폐하께서 뭐든 들어주신다고 했어요.”

“……뭐든요?”

“네, 그러니 다들 열심히 하겠죠.”

제니스는 말을 쓰다듬으며 나를 빤히 보았다.

뭐든 들어준다는 말은 꽤나 끌리지 않은가. 어쩌면 조금 무리한 요구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생각을 하니 나도 욕심이 났다.

“엘르 영애, 나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 일등 하고 싶어요.”

“열심히 해 볼게요.”

진심이었다. 일등이 하고 싶다면 만들어 줘야지.

나도 같이 콩고물 좀 받아먹고.

비록 동물이 무섭긴 해도 노력은 해 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나는 고삐를 꽉 잡으며 의지를 다잡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턴 따로 움직이도록 해요.”

“네?”

예상외의 말에 나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황녀와 있어야 센 공작이 조심스레 움직일 텐데.

나는 퍽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기색을 감추곤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폐하께서 꼭 붙어 있으라고 명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황녀님은 괜찮다고 해도 나중에 발각되면 저는 곤란해지겠죠.”

내 말에 제니스는 말을 몰아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버지껜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조금 있다가 여기서 만나기로 해요. 그럼 되잖아요?”

“……정말 괜찮겠어요?”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제니스도 센 공작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신빙성이 있긴 하네.

“엘르 영애. 내가 가진 힘을 잊은 건 아니겠죠.”

제니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성녀의 힘을 가진 그녀가 위험해질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녀를 보호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제니스는 나를 못 믿어 하는 눈치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나였는데 아무래도 제니스는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나중에 봐요.”

제니스는 미련 없이 말을 몰아 숲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 이내 다른 쪽으로 말을 몰려 했다.

쒸이익-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했다.

“제길.”

빠르기도 하여라. 제니스가 내게서 떨어지자마자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하다니.

손목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고삐를 잡아 빠르게 당겼다.

기척을 보니 아버지의 그림자도 함께 있는 듯했다.

아직은 움직일 타이밍이 아니니 나 혼자 연기를 해야겠지.

“꺄아아악!”

나는 보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말이 흥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애써 달래며 그 공간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아…… 내 리본!”

길이 제대로 나지 않는 쪽으로 돌진하다 보니 넝쿨과 잎에 쓸려 리본이 찢겨 바닥에 떨어졌다.

쒸이익-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윽!”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달려야 해. 무조건 더 멀리 빠르게.

멈추는 순간 화살은 정확히 내게 꽂힐 게 분명했다.

미끼가 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 같다.

* * *

제니스는 뒤를 보았다.

그새 엘르가 사라졌는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길은 알겠지?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야.”

무슨 이유에서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엘르의 뒤를 쫓진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은 어쩌면 제게는 기회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제니스는 고삐를 꽉 쥐었다. 곧장 엘르가 사라진 곳으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르의 손목에 묶여져 있던 푸른 리본이 넝쿨에 걸려 찢겨 있었다.

“……엘르?”

꺄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급박한 소리가 들렸다.

제니스는 곧장 달리려다 이내 고삐를 잡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푸른 리본도 없어. 그렇다면 리온은 그녀를 찾지 못할 거야.”

제니스는 리본을 제 손목에 묶었다.

이렇게 하면 리온이 저를 엘르로 생각해 주지 않을까?

그녀만 알아봤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늘 푸른 리본을 차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냥 여기서 사라졌으면.

엘르만 없다면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저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요인들도 사라질 테지.

제니스는 한참이나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결국 그녀는 제가 가려던 곳을 향해 방향을 틀어 달렸다.

* * *

“……리온 님.”

제니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리온을 마주했다.

그의 시선이 곧장 제 손목으로 향했다. 푸른색 리본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본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리본.”

제니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를 엘르라고 봐 줄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목소리로 대할지 궁금했다.

“어디서 났지?”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리온은 제니스의 손목을 낚아채며 표정을 굳혔다.

화가 났나?

어째서 화를 내는 거야.

엘르가 차고 있던 푸른 리본을 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저를 엘르로 착각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리온은 찢겨진 푸른 리본을 보자 눈앞이 팽팽 돌았다.

엘르가 아닌 사람이 엘르의 것을 손목에 차고 있었다. 그것도 엉망이 된 리본을.

그리고 이 목소리는 분명 제니스의 것이었다.

‘어째서 황녀가.’

그 순간 리온은 빠르게 감지했다.

센 공작의 사냥이 시작되었구나.

리온은 그녀의 손에 있는 리본을 홱 잡아 뜯으며 물었다.

“윽!”

“엘르는 어디에 있지?”

“리, 리온 님?”

어째서 그는 저를 앞에 두고서 엘르를 또다시 찾는 걸까.

그녀는 리온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어째서 당신은!”

“이걸 하고 있으면 내가 그댈 엘르로 착각할 거라 생각했나 보군.”

가소로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이렇게 얕고 얄팍하게 굴 수 있는 건지.

간절함과 비열함은 다르다. 아니, 다르지 않으려나.

그의 두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두 눈을 마주하고 있자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저를 향한 살기를 드러내는 리온이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나는 그의 반려인데.

반려에게는 통상적으로 다른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것이 본능이었고 문양의 힘이었다.

그러나 리온은 달랐다.

문양의 힘에 맞서고 있었다. 운명을, 정해진 길을 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반려는 나예요!”

제니스는 리온의 팔을 붙잡으며 울먹였다. 그러니 날 봐, 나를 구해.

“……말해 주지 않을 것 같군.”

황녀와 이토록 빨리 헤어질 줄은 몰랐다. 센 공작은 곧장 움직였을 것이다.

리온은 제니스의 팔을 뿌리쳤다.

제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에도 그는 그녀를 밀어냈다.

저를 붙잡고 늘어지는 제니스를 뿌리쳤다.

“이럴수록 비참해지는 것은 당신입니다.”

“언제까지 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지 못할 거야.

델테르를 보면서도 저 역시 마음이 가고 있었으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던 문양의 힘은 결국 설계대로 이뤄진다.

리온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냈다.

제니스에게서 멀어질 때마다 심장이 짓이겨져 파고드는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엘르, 곧 갈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일어나자 마음이 조급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 위로 올라탔다.

황망한 눈동자로 저를 보고 있는 제니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엘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것이 제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할지라도.

리온은 단검을 꺼내 말을 듣지 않는 제 몸을 찔러가며 움직였다.

피가 흘렀지만, 이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늦게 달려가 마주하게 될 상황이 더욱 끔찍할 테니까.

* * *

저 끈질긴 녀석들.

이 정도 달렸으면 날쌔구나 하고 포기할 법도 한데 날 죽이려는 목표가 뚜렷한지 포기하질 않았다.

이 가녀린 여자 한 명을 상대로 자객이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나는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살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다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일부러 길이 아닌 곳으로 달려오긴 했다. 그래야 위협당해 사리 분별이 불가능한 상태로 보일 것 같아서.

조금 오버하긴 했지만, 일단 이 정도면 미끼 연기에 충실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워, 워.

나는 말의 속도를 조금씩 낮추며 그림자의 기척을 살폈다.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말을 돌리고 내게 달려오는 자객들을 보았다.

활대를 잡아 곧장 화살을 날렸다.

쉬이익-

“커억!”

한 명 명중.

죽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게 화살을 쏴 하나둘 말에서 떨어뜨렸다.

“꺄아아악. 나 살려!”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다시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더욱 깊은 숲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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