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20)

제85화

아주 슬픈 눈동자로 밖을 보고 있는 제니스를 발견했다.

붉어진 눈과, 뺨에 거즈가 덧대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위치가.

와락 인상이 구겨졌다.

‘델테르 미친놈이 손댄 거 아니야?’

저번에 그에게 충고랍시고 했던 이야기는 이미 까맣게 잊은 게 분명했다.

관심을 두지 말자고 다짐해도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햇살에 얼굴이라도 타면 어쩌려고.”

아버지가 어울리지 않게 양산을 손에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복잡한 눈빛으로 에드가를 보았다.

“……따님이 또 고민이 생긴 모양이군.”

“아주 큰 고민이요.”

“여기서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이 에드가의 손에 이끌려 마차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마차를 출발시킨 후 팔짱을 끼곤 물었다.

“노선 확실하게 타. 복잡한 건 딱 질색이니까.”

“……둘 다 신경 쓰이면요?”

“내 따님은 참 욕심쟁이군.”

에드가는 헛웃음을 삼키며 턱을 느릿하게 쓸었다.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아, 눈부셔!

뒤에서 후광이 나는 것 같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정말요?”

“그래, 방법이 아주 없진 않겠지. 다만 네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선 안에서.”

“으음…… 그건 장담 못하겠어요.”

제니스의 일에 끼어들어서 내게 좋을 일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오지랖을 부리다 죽는 꼴 여럿 보긴 했지만…….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참 살기 어렵다. 좀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더니 꼬이고 또 꼬이다니.

“아, 참. 사냥 대회에 참석하래요.”

“……너보고?”

에드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듯했다.

“제니스 황녀가 홀로 참석하면 힘들 테니 보좌하라는 말 같았어요.”

“네가 보좌를?”

“자꾸 그렇게 무시하면 발끈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아버지 저는 꿈틀만 할까요?”

“……성질머리 하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실까.”

내 말에 에드가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계속 말해.”

“그게 끝인데요?”

“……확실히 이상하군.”

“헛짓거리 할까 봐 확인한 거 아닐까 해요. 찾았다 해 놓고 또 실종이니 뭐니 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참석하겠다 했나?”

에드가는 뭔가 석연치 않은지 표정을 구겼다.

나는 뭐 좋아서 한다고 한 줄 아나.

협박이었는데 거기서 안 하겠으니 목 가져가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제게 선택권이 없던걸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실에서 벨루아 가문에 사냥 대회 참석 여부를 묻지 않았어.”

“……확실히 뭔가 있는 모양이네요.”

으음.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 말은 벨루아 가문에선 오직 저만 참여가 가능하다는 소리겠네요?”

“그래,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소리지.”

“오…….”

제기랄.

그건 생각 못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어요.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야지.”

“그래, 그게 좋겠구나. 센 공작도 참석할 테니.”

에드가는 턱을 느릿하게 쓸었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똑같이 턱을 쓸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무래도 센 공작한테는 좋은 기회가 되겠죠?”

“뭐, 그럴지도 모르지.”

“……희망찬 이야기 좀 해 줘요.”

“걱정 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까.”

네, 아주 희망차고 힘 되는 말이네요.

괜히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차라리 엘한테 숨어서 따라올 방법이 없냐고 묻는 게 빨랐겠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았기에.

* * *

그날 이후 사냥 대회까지 나는 죽어라 화살 쏘는 연습을 해야 했다.

죽지는 않을 거란 말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미친 듯이 훈련을 시켜 대니 죽을 리가 있나!

심지어 에드가는 각종 용품을 사다 날랐다.

“이건, 몸에 지니고 있으면 위협이 가해졌을 때 자동으로 폭발한다.”

“……다 어디서 났어요?”

“어디서 났긴.”

리온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게 익숙한 모양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였다.

“리온!”

“그동안 바빠서 좀 뜸했네.”

그는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는 뚫어져라 보고 있는 에드가는 잊은 채 리온과 꽁냥거렸다.

“떨어지거라.”

에드가가 강제로 나와 리온을 떼어 놓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붙어 있었을 터.

“뭔가 알아냈으니 왔겠지?”

“사냥 대회에 확실히 움직일 것 같습니다. 용병을 꽤 사들였더군요.”

“용병이라, 꽤 깜찍한 짓을 하는군. 명을 재촉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나는 에드가와 리온을 보며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듬직해.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뒷배가 강렬했다.

도리어 센 공작이 걱정되었다.

“엘르, 일단은 모르는 척 미끼가 되어야겠어.”

“미끼?”

나는 리온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냥 대회에 가서 미끼나 되어야 하는 신세라니.

“가기 싫어!”

시간이 뭐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 건지.

나는 소파에 앉아 축 늘어진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재수 없어서 죽으면…….

“엘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어. 게다가.”

리온은 내 창밖의 한 나무를 가리켰다.

“저렇게 활을 잘 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나무에는 정중앙에 화살이 꽂혔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네.”

나도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지.

그래도 이게 사람이 죽을 자리를 알고 가는 게 좀…….

나의 징징거림에도 리온과 에드가는 꿈쩍도 않았다. 어쩐지 억울해져 표정을 뒤바꿨다.

“계획 차질 없는 거죠?”

“그래, 센 공작이 움직여 주기만 한다면.”

센 공작이 나를 공격하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그의 목숨을 위협할 명분이 생긴다. 그걸 위해서 나는 미끼가 될 생각이고.

“진짜 제대로 되지 않기만 해.”

“걱정 말고, 정 위험할 것 같으면 다 쏴 버려라.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오…… 오늘 왠지 아버지가 멋져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대를 매만졌다.

* * *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 건지. 벌써 사냥 대회 날이 되었다.

“헤센 경, 나갔다가 죽거든 꼭 이 문 앞에 묻어 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헤센 경은 질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좀 받아 줄 법도 한데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차가운 남자 같으니.

“참가자 명단도 모르는 거죠?”

“네, 아마도 수도에 사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참석할 겁니다. 기사도 그렇고요.”

“거기에 벨루아 가문은 쏙 빼고?”

“아시면서.”

헤센의 말에 나는 흐느적거리며 몸을 뒤로 내뺐다.

“센 공작이 참석하는 건 확인했으니 긴장 늦추지 마십시오.”

그는 나를 질질 끌어 디리아 앞에 앉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이거 꼭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뭔데요?”

“뭐, 보호 장치라셨는데.”

“으음, 이게?”

나는 하늘거리는 옷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게 어딜 봐서 보호해 주는 옷이야. 시스루도 아니고, 비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말 잘 듣는 아이다. 고로 얌전히 옷을 장착했다.

“아가씨, 오늘은 편히 움직일 수 있는 옷이에요.”

“좋네. 아주 마음에 들어.”

바지에 쫙쫙 늘어나는 재질까지. 도망가기에 매우 적합했다.

이 정도면 위험할 때 잽싸게 피할 정도는 되겠지.

어차피 준비는 충분했다. 연기야 어릴 때부터 살기 위해 밥 먹듯이 해 왔으니 쉬울 테고.

“아버지는?”

“할 일이 있다고 어디 가셨습니다.”

“또?!”

이쯤 되면 나를 방치하는 게 아닐까.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하는 일이 많겠거니 하고 신경을 껐다.

원래 우리 부녀 사이는 이게 어울리긴 하지.

“아가씨 제발 몸조심하세요.”

“응, 걱정 마. 나 잽싸!”

“동물 잡겠다고 나서지도 마시고요!”

“걱정 마. 도망만 치고 올게.”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다른 걸 사냥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디리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역시 내 걱정해 주는 건 디리아밖에 없다.

* * *

황제가 미쳐 버린 게 아닐까. 마차까지 보내 줄 줄은 몰랐는데.

“으으음. 그게 아니라 아무도 못 따라오게 선수 친 건가?”

그 편이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체념했다.

“하아…… 뭐 어떻게든 되겠지.”

미끼가 된다는 것이 유쾌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래야 우리도 센 공작의 목을 쥘 수 있는데.

아버지의 그림자 역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와 함께 움직이고 있을 터.

그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자, 그럼 이제 사냥을 시작해 볼까.

* * *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드레스를 입고 자기가 응원하는 남자들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며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막사도 있고, 모든 게 갖춰져 불편하진 않았다.

사람이 불편해서 그렇지.

나는 힐끔 내 옆에 있는 제니스 황녀를 보았다.

그녀는 덤덤하게 활을 정비하고 있었다.

“제가 함께 참여하게 될 줄 알고 계셨나요?”

“네, 저도 전날 알았지만요.”

제니스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사냥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대화가 끊겼다.

숨이 막히고 답답해서 막사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같은 막사를 쓰게 해!

나는 하는 수 없이 활을 닦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아, 참. 이번에 마탑에서도 참여를 할 거예요. 제가 부탁드렸거든요.”

“……마법사들은 왜?”

“그들도 참여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재밌을 것 같은데, 엘르 영애는 어떻게 생각해요?”

“으음, 마법을 쓴다면 우승자는 정해졌겠네요.”

“그럴 리가요. 마법은 당연히 금지죠.”

제니스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요.”

“……공평.”

마법만 주구장창 해 온 그들이 활은 잘 다룰 수 있을까.

검도 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참여를 안 하면 그만이었겠지만, 한 걸 보면 그들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야죠.”

“엘르 영애는 행운의 부적이라도 있나요?”

“아……, 네.”

최근에 푸른 리본을 매지 않았는데 오늘은 혹시 몰라 맸다.

마음이 편안하달까.

이게 없어도 리온은 나를 알아보니 이제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만.

‘마음의 안정이 되는 기분이니까.’

원래 부적이란 그런 거 아니겠는가. 이 정도면 든든했다.

막사를 나와 출발선에 섰다. 말에 올라타 산속을 향해 달릴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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