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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120)

제84화

황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세간에 떠돌던 제니스에 대한 소문도 거슬렸고.

‘게다가 에드가 백작은 갑자기 엘르를 찾았다는 서신을 보내질 않나.’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폐하, 아무래도 황녀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와 함께 만난 후에 엘르가 사라진 터라 황실의 입장이 꽤나 곤란했었다.

그러니 제니스가 엘르가 실종된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

그래서 황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이간질을 하려 했다.

“……어림짐작으로 그런 말은 내뱉지 않는 게 좋소.”

그는 황후의 말을 외면하며 혀를 찼다.

이때다 싶어 황녀의 입지를 좁게 만들려는 심산임을 모르지 않았다.

저렇게 속이 뻔히 보여서야.

“하지만! 가신들 역시 들고 일어날 겁니다. 안 그래도 반쪽짜리 황녀라고 말이 많지 않습니까.”

“반쪽이라고 한들 상관있나? 성녀의 힘을 타고났는데.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황녀를 까 내리려 애쓰다니, 추하군.”

“……후회하실 겁니다.”

황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를 쏘아보았다.

다 늙어 죽어 가는 주제에 여전히 목만 뻣뻣해선.

제니스가 힘을 모으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식견이 아무리 좁다 해도 어쩜 저렇게 멀리 볼 줄 모를까.

저런 놈이 황제가 되었으니 아래 자식 놈들이 그 사달이 나지.

황후는 델테르만 연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진즉 일러바쳤을 것이다.

“추억에 빠져 계속 허우적거리고 계십시오.”

“황후.”

황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당신이 무슨 마음인지는 안다만, 그때와 같은 일을 벌이진 말아야 할 것이오.”

“사랑하는 나의 폐하.”

황후는 몸을 돌려 황제를 품에 안았다. 등을 느릿하게 쓸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아끼는 황녀를 잃고 싶지 않거든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마세요. 저는 그리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황후!”

그가 목소리를 높여 분노했다. 그러나 황후의 표정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참고 있는 것은 다 델테르 때문입니다. 내 아들에게 해가 된다면 저도 참지 않을 테죠.”

황제를 품에서 떼어낸 그녀가 요사스럽게 웃으며 부채를 폈다.

살랑살랑.

눈을 접어 웃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살기가 흘러넘쳤다.

“그럼 저는 이만 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홱 하고 그녀가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서 나온 황후는 분노로 얼굴에 핏대가 서 있었다.

곧이어 기다리고 있던 보좌관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가신들을 몰래 모집하도록 해.”

“……폐하께서 아시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상관없어. 어차피 다른 것에 관심도 없는 분이지 않은가. 단지 의견을 나누기 위함이니 걱정 말게나.”

황후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보좌관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었으며, 방해되는 인물들은 다 죽였다.

제니스의 황녀 어머니 역시 황후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심지어 데펠로아의 동생마저도.

“네, 명 받들겠습니다.”

“자네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니 잘 알 테지. 이 일이 잘 끝나게 된다면 큰 상을 내리겠어.”

보좌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후의 말은 이번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된다면 제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 * *

“엘르 님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와! 정말? 나 드디어 탈출인 거야?”

“대신 곧바로 황실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우우우…….”

나는 엄지를 바닥으로 향하게 하며 야유했다.

“어쩔 수 없으니 들쳐 메고 가기 전에 나와.”

아버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나타났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답답해하더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해방될 줄은 몰랐죠.”

조만간이라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보냈기에 황제가 저를 불러요?”

“별소리 안 했다.”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황제와 무슨 거래를 했으면.

“황실과 연관이 없다고 알림과 동시에 수도에 네 출입을 허락해 달라 했다.”

“정말요?”

“그래, 대신 조건이 있다고 하더군. 직접 보고 말을 할 생각인 것 같구나.”

흐음. 수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다면,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별다른 일은 없을 게다. 보여 주기 식일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일 당장 황실로 가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 눈빛 이상한 황제를 볼 생각을 하니 섬뜩했다.

“함께 가는 거죠?”

내 질문에 에드가는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가 너만 불렀기 때문에 들어가진 못 해.”

“……괜찮은 거 맞죠?”

불쌍한 어린양처럼 에드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너무해!”

나는 하는 수 없이 궁으로 갈 준비를 했다.

표정에서 억지로 끌려가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표정 펴.”

“잘도 펴지겠네요.”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차에 기대어 앉았다.

황제가 내게 뭘 물을까. 어디에서 뭘 했는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심문할지도 모른다.

“대처는 다 해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대처요?”

“그래, 오늘 가는 건 황녀도 연관되어 있으니 보여 주기 식이야.”

“……하아.”

그러면 다행이다.

보여 주기 식이라고 했으니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겠지.

“어차피 황제도 알고 있을 거다. 내가 널 보호하고 있었다는 것쯤은.”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

“그 정도로 위험해질 정도라면 백작가도 힘을 다했지.”

정말 가문 부심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래도 뭐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 * *

곧이어 도착한 황실에서 나는 가기 싫은 눈동자로 에드가를 보았다.

그는 손을 휙휙 저으며 어서 가 보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정말 인정머리 없어.’

딸이 혼자 맹수한테 가는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아서야.

나는 터덜터덜 가기 싫은 걸음을 애써 옮겼다.

안내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가니, 시종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나를 힐끔 보았다.

사라졌다던 인간이 황실에 왔으니 놀랄 법도 하지.

“후아.”

나는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했다.

“어서 오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또다시 마주한 저 날카로운 시선.

나는 애써 표정을 침착하게 유지했다.

“그래,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황실에서도 엘르 양을 찾기 위해 힘들었었지.”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래, 그걸로 된 게지. 그대를 부른 건 부탁이 있어서다.”

“……부탁이요?”

저 영감탱이 뭔 말을 하려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는 능글맞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잠시 내 반응을 살펴보는 듯하더니 이내 본론을 꺼냈다.

“간단한 부탁이네.”

전혀 안 간단한 것 같은데.

“이번에 사냥 대회를 열 생각인데, 제니스 황녀와 함께 참석해 줬으면 한다.”

“……사냥 대회요?”

“연회를 열어 두 가문과의 화합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만. 그걸 보고 믿을 사람은 없을 테지.”

맞는 말이었다. 나라도 안 믿을 것 같으니까.

게다가 실종 후 찾았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사냥 대회에 제니스와 함께 참석하여 알릴 생각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황실에서 나를 찾아낸 것으로 할 건가 보네.’

뭐든 상관은 없었다.

“그래, 우리도 뭔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 줘야 하니 말이다. 네게 일어나는 일이 우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긴,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큰 행사가 적격이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센 공작의 존재였다.

그도 참석할 것이 뻔한데 수락해도 괜찮은 걸까?

“알다시피 제니스 황녀는 존재를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 나이도 비슷하니 함께 참여하면 좋지 않겠는가.”

“……아버지께 여쭤 보겠습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어 넌지시 발을 뺐다. 전혀 간단한 부탁이 아니잖아!

“아마 참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벨루아 가문이 꽤 곤란해질 테니까.”

게다가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고.

황제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온 거부터가 이상하긴 했다.

그가 부탁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센 공작이 이걸 기회를 삼아 내 목을 따 버릴 것 같은데…….’

황제는 가만히 나를 살피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정말 별생각은 없으니 그리 긴장할 건 없단다. 그저 형식적인 행사일 뿐이니.”

“알겠습니다. 사냥 대회에 황녀님과 참석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거면 되네. 간단한 일이지 않나.”

말이 간단하지. 갑자기 그녀의 친구로 참석을 한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했다.

변방으로 쫓아낼 땐 언제고 왜 친한 척이야.

아직 센 공작은 내가 실종된 줄 안단 말이야! 왜 숨어 있는 사람 불러내고 그래.

게이트가 있어 어렵지 않게 올 순 있었지만, 이럴 거면 수도에 사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이 정도면 그냥 서신으로 보내도 되었을 텐데.

“아, 엘르 나타시아 영애. 제니스에게 헛바람은 넣지 말게나.”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순간적으로 쫄아 버렸다.

혹시 제니스가 황제에게 나와 은밀하게 만난 걸 말했다면?

그럼 이미 내 목은 몸과 작별했을 터.

황제는 그저 불안함에 내게 말을 얹은 것으로 보였다.

“사냥 대회에서 염려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이후 만나 뵙지 못한지라.”

그래, 그녀를 초대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시절은 있었다.

지금은 이미 늦었지만…….

제니스가 내 손을 놓은 것 같으니 나도 매달릴 필요는 없겠지.

그저 내가 하는 일은 살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원치 않는 길을 택할 필요는 없으니까.

숨 막히는 공간을 빠져나오자 힘이 풀렸다.

“흐어…… 빨리 나가야지.”

여기 있다가 제니스나 델테르라도 마주치면 아주 곤란해.

무슨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녀 역시 내게 적의를 보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조금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입구가 보이자 조금 더 보폭을 줄였고, 환한 햇살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궁을 보았을 때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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