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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120)

제82화

“정말 들어가실 겁니까?”

“그럼 누가 가요. 아버지도 없는데.”

나는 망토를 뒤집어쓰며 엘에게 손을 휙휙 저었다.

“괜찮아요, 이런 일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그래도…….”

“아버지한테 가서 일단 알려요.”

나는 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그걸 망치게 둘 순 없었다.

제니스와 내가 둘이서 이야기한 지도 꽤 되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기회가 중요했다.

“어서요.”

“알겠습니다.”

그제야 엘이 모습을 감췄다.

나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제니스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저희 길드를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의뢰할 게 있어서요.”

제니스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망토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알아차린 듯했다.

“저는 대리자입니다. 길드장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가요? 저, 사람을 물렸으면 해요.”

제니스는 내 뒤에 선 론과 함께 기사를 의식하는 듯했다.

하긴, 둘이 있는 게 말하기는 편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론에게 말했다.

“자리를 좀 비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론은 모습만 사라질 뿐 정말로 이 자리를 뜨는 건 아니었다.

그걸 제니스는 모르겠지만.

“물론입니다. 의뢰는 보안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니까요.”

제니스와 함께 온 기사 역시 자리를 비웠다.

“어떤 의뢰를 하러 오신 건가요?”

나는 모르는 척 제니스에게 물었다.

분명 나를 보고 온 것 같은데, 언제 봤는지 모르니 일단은 먼저 나서지 말아야지.

“누구를 좀 찾고 싶어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아시나요?”

“물론이죠. 엘르 나타시아 벨루아. 그녀를 꼭 찾아야 해요.”

“그러시군요.”

나는 무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황실에서도 그녀를 찾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글쎄요…… 제 반려가 그녀를 신경 쓰고 있거든요. 차라리 눈에 보이게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데.”

제니스는 내 표정을 살피려 노력했다.

나는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만나 이야기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망토를 벗었다.

“찾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나를 본 제니스는 놀라지 않았다.

예상을 했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맞았네요.”

“마주치길 바라고 한 행동이니까요. 다행히 와 주셨네요.”

제니스는 내 말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왜죠?”

“둘이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에게 이야기는 들었을 테고…….”

“아직, 선택하지 않았어요.”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서 만나자고 한 건 아니에요. 그저 황녀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것뿐이지.”

나는 제니스의 팔을 보았다.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는 손목을 응시하자, 그녀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엘르 영애는 리온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음.”

나는 섣부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리온과 문양이고 뭐고 다 필요 없이 서로 좋아하고 있어!

라고 이야기한다면 제니스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고 만난 게 아니었으니까.

“황녀님은 황실을 나오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리온의 마음이 중요한가요.”

리온의 마음이 중요하다면, 무슨 제안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전, 둘 다요.”

제니스는 싱긋 웃었다.

마치 내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여유로워 보였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이야기할 순간을 고대했던 것이 아닐까.

제 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군요.”

“저희가 사촌이란 이야기는 들었어요. 꽤 놀라기도 했고…….”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우리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진 않겠네요.”

제니스는 내 말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었다.

“왜죠? 저는 엘르 영애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리온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내 말에 제니스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엘르 영애. 저는 리온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이유는 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델테르를 말하는 건가?

그와 함께 매일을 한다는 것이 고역이긴 할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문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불안감을 더 하겠지.

“리온이 원치 않는다고 해도 변함없으시겠네요.”

“……리온과 만났나요?”

제니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 역시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만났다고 이야기해도 되는 부분인가?

어쩐지 그녀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뇨, 숨어 지내고 있는데 만났을 리 없죠.”

“그래요……? 그런데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제니스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절로 긴장했다.

‘뭔데 그렇게 비장하게 물으려고 하는 거야.’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왜 몸을 숨기고 있는 건가요? 혹시…… 엘르 영애도.”

제니스의 시선이 내 손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아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반려의 각인을 이길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 역시 이겨 내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저도 반려 각인이 생겼어요.”

“……정말요?”

조금은 기뻐 보이는 제니스의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네, 문제가 있다면 달갑지 않은 문양이란 거겠죠.”

“리온이 아니기 때문인가요?”

제니스의 표정을 보니 다른 걸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도 나타난 예외가 있으니 나 또한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을 테니까.

“리온과 같은 문양은 아니에요. 저는 붉은색이니까요.”

“……붉은색.”

제니스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래, 놀랐겠지.

눈앞에 제 스스로 붉은색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주는 건가요?”

“음, 저도 벗어나려고 발버둥 중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제게 뭘 얻고자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저는 기쁜걸요. 저와 비슷한 고난을 겪는 것 같아서. 배배 꼬였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녀는 정말로 거침없이 말을 뱉어 냈다. 나는 가만히 제니스의 말을 경청했다.

‘아무래도 좋게 푸는 건 포기해야겠구나.’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제니스를 응시했다.

“그냥 알려 주고 싶었어요.”

“이만 가 볼게요. 아버지께는 알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그녀는 곧이어 정보상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아…… 괜한 짓을 했네.”

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천장을 보았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는 걸요.”

“그렇죠?”

아무래도 아버지가 말한 계획대로 가야 할 것 같다.

“론 님, 일단 제니스도 살펴봐 주세요. 어쩐지 사고 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알겠습니다.”

론은 빠르게 제니스의 뒤를 쫓았다.

“아, 하루가 기네 길어. 아버지 오면 또 한 소리 듣겠어.”

“또 무슨 짓을 했길래.”

“……리온?”

갑자기 나타난 리온으로 인해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뭐야, 언제? 아니 어떻게?”

아니지, 마탑주인데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거야 쉽겠지.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어떻게 온 걸까.

“……아. 느꼈구나.”

제니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온 게 틀림없다.

그 말은 제니스 역시 리온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어, 어. 안 되는데.”

나 너 안 봤다고 했는데, 이렇게 떡 하니 나타나면 곤란해.

물론 그녀가 내게 따져 묻지는 못하겠지만…….

뭔가 거짓말한 게 양심에 찔렸달까. 심지어 리온은 어디서 힘이라도 쓰고 온 건지 땀에 젖어 있었다.

“너, 어디 아파?”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아닌데 지금 헐떡이는 것 같은데.”

분명 급하게 달려온 게 보이는데 리온은 애써 숨을 억눌렀다.

그런다고 거친 숨이 안 들리겠냐마는…….

노력하는 게 가상하니 모른 척해 줘야겠지.

“제니스 황녀가 여길 왜 다녀간 거야? 그보다, 너…… 후.”

리온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보며 다친 곳을 확인했다.

“이상 없네.”

“뭘 생각한 거야. 그냥 이야기를 좀 했어.”

“무슨 이야기를 해.”

“좀 더 좋은 방향이 없을까 하고. 그리고 미끼도 던졌고.”

“……미끼?”

“그래, 센 공작을 좀 낚아야 할 거 아니야. 그가 움직여야 우리도 명분이 생기잖아.”

내 말에 리온은 미간을 좁혔다.

“엘르,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내 일이기도 해. 리온,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드가고 리온이고 나를 너무 애 취급해서 곤란하다.

“황녀가 네게 힘이라도 썼다면 어쩌려고.”

“그러지 못했을 걸. 가족이니까.”

“……가족?”

아 참, 리온은 모르고 있었지.

나는 그제야 리온에게 제니스와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그래서 먼저 손을 놓고 싶진 않았어…….”

무엇보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지 나는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제니스의 고난을 모른 척하기엔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반려이자, 희망을 뺏은 것도 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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