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그런데 언제까지 나 여기서 박혀 있어야 하지?”
이제 반려도 알아차렸고, 리온도 내가 있는 곳을 알게 된 마당에 갇혀 있을 필요가 있나……?
분명 아버지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조만간 답이 올 것이다.
그녀에 따라 계획이 바뀌긴 하겠지만, 불안했다.
“제니스는 리온을 놓지 않을 거야.”
그건 그녀의 선택지에 없을 것이다.
델테르는 계속해서 그녀의 목을 조여 올 것이고, 황제는 그런 제니스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조차 못해서 가늠이 안 돼.’
나는 침대에 이리저리 뒹굴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노력했다.
한참을 뒹굴던 나는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외출 준비를 마쳤다.
“안 되겠어. 산책이라도 나가야지.”
“……또 어딜 나가시려고.”
“아, 깜짝이야!”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엘로 인해 심장이 쿵 하고 곤두박질쳤다.
“……제발 기척 좀 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저 짤립니다.”
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림자인데 기척을 내고 다니면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에드가가 가만히 두진 않겠지.
“나 답답해서 산책 좀 하려고.”
“그럼 정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밖에! 사람을 보고 싶어.”
나는 팔짱을 끼곤 엘을 올려다봤다.
“단 거 좀 먹어야겠어.”
“달달한 거라면 언제든 사다 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 이럴 거예요?”
“……저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진짜 너무해.”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그럼 광산이라도 보러 가요.”
“갑자기 광산은 왜…….”
“내 지분이 있는 곳이니까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그냥 카페로 가시죠.”
엘은 반쯤 포기한 채로 초롱초롱한 눈을 한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하루 종일 갇혀 있는 게 안쓰러운 모양이다.
“진짜죠?”
“저는 빈말은 안 합니다.”
나는 엘을 향해 활짝 웃으며 문 쪽으로 한달음에 나갔다.
엘은 그런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가 보실까요?”
“좋아요.”
“어차피 조만간 엘르 님을 발견했다고 황실에 알릴 겁니다.”
“그래요?”
와,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겠네.
그런데 왜 또 나한테는 말 안 해 주고 자기네들끼리만 다 알고 있는 건데!
“아, 나중에 에드가 님이 말씀하실 테니 모른 척해 주십시오.”
엘은 내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 * *
제니스는 답답한 마음에 시내로 나왔다.
에드가가 제게 제안을 해 준 건 솔직히 혹하긴 했다.
황실에서 벗어나게만 해 준다면 방법은 상관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엘르와 사촌이라니…….
믿어야 할지 확신은 없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제게 이야기를 해 준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아, 답답해.”
그저 제게 힘이 생기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힘은 더더욱 저를 옭아맸다.
성녀가 되어야만 한다. 자격은 충분했으니 임명만 되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다.
계승권까지 제게 황제가 쥐여 줄 것이라 생각도 못했었다. 그게 저를 잡아 둘 패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성녀로 지명하지 않은 것은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제가 성녀가 된다면 독자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황녀님 오늘은 따로 움직이진 못하십니다.”
“괜찮아요, 예상했으니까.”
외출을 허락해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아버지에게 일러바치지 않은 것도 그가 제게 한 짓이 있기 때문이겠지.
“전하께선 다른 곳에 가신 모양이군요.”
“네, 바쁜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제니스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예약을 해 둔 카페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익숙한 신형이 보였다.
“어? 저번에도 본 것 같은데…….”
제 시선을 사로잡는 한 여자. 제니스는 절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힘이 느껴졌다.
“……우리 카페 말고 다른 곳도 좀 가 봐야겠어요.”
“어딜 말입니까?”
“필요한 정보가 생각났거든요.”
제니스는 길드 골목에서 나오는 한 여자를 보자 그녀가 나온 곳으로 가 보고 싶었다.
“길드에 가 보려는 겁니까?”
“네, 나온 김에 필요한 볼일도 봐야겠어요. 전하께 보고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내가 뭘 의뢰했는지는 모를 테니까.
기사는 하는 수없이 제니스의 뒤를 따랐다.
‘무엇보다 저 여자 엘르 영애 같아.’
그녀의 직감이 또다시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아닐 것이라 여겼지만, 이번엔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만약 엘르가 맞다면 직접 만나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몸을 숨기고 있는지 말이다.
결국 제니스는 망토를 쓴 여자가 나온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가씨, 너무 신난 것 같습니다.”
“엘 님도 저만 하루 종일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루하진 않습니다.”
엘은 정말로 지루한 적이 없었다. 워낙 엘르가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움직이면 에너지도 많이 소비되겠군.’
그래서 자꾸 당을 찾는 건가.
그는 저보다 작은 엘르를 한참이나 보았다. 그녀의 손목에 어김없이 차 있는 액세서리를 보자 마음이 아려 왔다.
‘하필 붉은색이라니.’
내색은 하지 않아도 불안하겠지?
“이거 봐요! 엘 님, 왕창 사 갈까요?”
괜한 걱정인 것 같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은 엘르를 보았다. 뭐, 그런 점이 있기 때문에 에드가가 달라졌을 테지만.
“다 사셔도 됩니다. 백작님 돈 마음껏 쓰셔도 별말 안 하실 겁니다.”
“응? 무슨 소리예요. 내 돈 쓸 건데.”
엘르는 엘의 말에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는 자신의 돈을 보란 듯이 썼다.
“아! 엘 님, 온 김에 거기도 가요.”
“어딜 말입니까.”
“무기상이요!”
“……무기상은 왜?”
엘은 엘르의 말에 조금씩 불안해져 왔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뭘 하려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일단 따라와요.”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언제 또 나갈지 모르니까, 나온 김에 어떻게든 돌아다녀야지.
엘르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걸 다…… 말입니까?”
엘은 최근에 들어온 검과 함께 각종 필요한 무기를 건네는 엘르를 보며 얼어붙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고마워서 그래요. 저 때문에 괜히 고생하고 계시잖아요.”
예부터 물질 공략에 마음 약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그랬다.
엘이 계속 곁에 있을 거라면 마음을 따 놓는 게 낫지.
“이거 전부 다 계산해 주세요.”
엘은 아무렇지 않게 거금을 내놓는 엘르를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충성심이 솟아났다.
물론, 에드가 역시 저희들에게 못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따스한 말과 함께 따라오는 물질적인 행복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그럼 종종 나랑 나가 주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에드가의 그림자였으니 엘르 역시 제 주인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음, 이제 또 어디 가지. 쿠키 사러 갈까요?”
“이만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좀만 더 돌아다녀요, 네?”
엘르는 엘의 팔을 잡아끌며 눈을 반짝였다.
그 순간 무기상에 누군가가 훅 하고 나타났다.
“왁!”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그림자에 엘르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엘 님,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게…….”
그림자 론은 엘르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을 했다.
“저, 황녀님이 길드에 왔습니다.”
“……알겠다.”
엘르는 론을 보더니 이내 손짓했다.
“저, 그림자 님?”
“……네?”
“돌아가야 하는 건 알겠으니 일단 골라 봐요.”
어쩐지 그녀의 기분은 아까보다 더 좋아 보였다.
엘은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았다. 뭔가 원하는 바를 달성한 모양인데.
“아니 저는…….”
론의 시선이 계산되어 있는 무기들로 향했다.
‘……엘 님 어느새.’
론은 엘 역시 엘르의 재촉에 무기를 샀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아하니 사지 않으면 가지 않을 기세인데.
그렇다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감사합니다.”
론의 말에 엘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 테니까, 제 이름으로 달아 놓으세요. 이럴 때 돈이라도 써야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거든요.”
그녀는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역시 돈 많은 게 최고다.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게 느껴져 엔도르핀이 핑핑 돌았다.
론을 결국 한가득 물건을 구매했다. 사실 엘르의 강매에 가깝긴 했지만…….
뭐, 행복해 보이니 다행이랄까.
“자, 그럼 이만 갈까요?”
“길드상에 제니스 황녀가 와 있다고 합니다.”
“흐응.”
엘르는 놀라지 않았다. 왠지 시내에 나오면 그녀를 마주치지 않을까 했기 때문에.
‘미끼를 물었네.’
그냥 막무가내로 나온 것 같겠지만, 실은 다른 생각이 있었다.
제니스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에드가가 만났다고 해도 좋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그래요.”
엘르는 싱긋 웃었다. 이제야 서로 만날 일이 생기는 거구나.
빨리 길드상으로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