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잘 자네.”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잠을 잘 수가 있지.
리온은 제 품에 안겨 코 골며 자는 엘르를 보며 웃었다.
“정말, 나만 매번 안달 나지.”
그는 툭 하고 엘르의 볼을 건드렸다.
말랑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결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건드려도 깨어나지도 않고.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얘는 언제쯤이면 날 겁내 할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게 손을 내밀었던 여자였다. 그날을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를 지옥에서 구원해 준 엘르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다.
엘르를 만나 마나도 제어하게 되었으니 제게 있어서 그녀는 귀인이자 행운이었다.
저주받은 아이란 이름을 달고 살았던 제게 단 한 번의 행복이 주어졌다면, 그건 망설일 필요도 없이 엘르였다.
리온은 엘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
이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벗어난 그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안경을 쓰고 일에 집중한 그는 힐끔 잠이 든 엘르를 응시했다.
“아…… 역시 그냥 집에 보냈어야 했는데.”
그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탄식했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잘 때마다 제 자신이 그녀에게 위험하게 느껴졌다.
“약간 기분도 묘하기도 하고.”
그렇게 신경이 안 쓰이나?
리온은 흘끔 제 몸을 훑었다.
탄탄한 근육에, 매끈한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네. 카벤은 이런 게 먹힌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다시 가서 물어야 할 것 같다.
느슨하게 풀린 검은 셔츠를 입은 채 그가 방을 벗어났다.
“뭐 불편한 거라도…… 제가 불편하군요.”
카벤은 리온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옷매무새나 좀 가다듬고 나오시죠.”
“네가 보기엔 어때.”
“……뭘 말입니까?”
리온은 카벤에게로 성큼 다가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렇게 가까워지면 말이야. 심장이 뛴다고 하지 않았나?”
“……지, 지금 뭘 하시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내려다보면 섹시하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꿀꺽.
카벤은 저보다 큰 리온을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미쳤나 보네.
이 인간 폭주하더니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약간 사람이 핀트가 나간 것처럼 보이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왜 이러십니까!”
카벤이 기함하며 리온을 밀쳐 냈다.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큰 위협이 아니었을까.
저런 얼굴로 유혹할 생각을 하다니. 저는 이성애자였고, 홀려선 안 된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리온을 향해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어어! 더는 다가오지 마십시오!”
“아니, 네가 한 말대로 했는데 전혀 반응이 없어.”
“그, 그럴 리가요. 무슨 반응을 말씀하시는 건지.”
카벤의 시선이 슬그머니 아래로 향했다.
“……죽고 싶나?”
“아니, 아닙니다.”
카벤은 허허허 웃으며 리온과 거리를 벌렸다.
“어쨌든 그 옷 좀 여미십시오.”
“보기 불쾌한가?”
“불쾌하다기보다. 위험합니다. 다분히!”
“다분히?”
리온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네! 어!”
카벤은 당혹스러워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니 왜 한밤중에 왜 또 저러는 거야.
그는 고개를 홱홱 저었다.
“아니, 그때 알려 준 거 말이야.”
“어떤 거 말입니까?”
“이거.”
리온은 카벤의 손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화들짝 놀란 카벤이 제 심장을 움켜쥐며 말을 더듬거렸다.
벽치기를 왜 나한테 하고 지랄이야!
그는 진짜 마탑주만 아니면 한 대 쳐 버리고 싶었다.
“진짜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그는 울분에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짜 이 마탑주가 야밤에 미쳤나.
리온은 미동 없이 그를 제 품에 가둔 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해 봐. 이렇게 하면 정말로 심장이 떨리긴 하냐고.”
“아니 상식적으로 제가 떨리면 이상한 거 아닙니까? 마탑주님 정신이 나갔습니까?”
카벤은 리온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와중에 진짜 심장이 떨리는 것 같은 기분은 뭐야.
“아…… 그건 그렇군.”
“그렇게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하지 마십시오. 기분 나쁘니까.”
카벤은 그의 손 안에 가둬진 채 질색했다.
“……저 둘이 뭐 하고 계시는.”
순간 카벤은 방에서 나온 엘르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저와 리온의 상황은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자세였다.
“저, 이, 이거! 오해입니다!”
“엘르?”
리온이 흐트러진 옷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덜 깨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던 엘르의 눈이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세상에.”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녹음을 머금은 생기 어린 눈동자. 작고 연약한? 카벤을 가두고 선 짐승 같은 리온의 모습까지.
엘르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그럼요. 오해겠죠. 하암! 저는 다시 잠이 와서!”
내가 뭘 잘못 본 거겠지.
엘르는 황급히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에, 엘르 님?! 잠시만요!”
카벤이 황급히 리온을 밀쳐 내며 울부짖었다.
제 인생의 정체성이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 * *
“이게 뭐지?”
제니스는 눈을 떠 몽롱한 상태로 눈을 깜빡였다.
제 옆에 서신이 놓여 있었다.
“벨루아 가문의 인장?”
그제야 그녀는 눈이 번쩍 뜨였다. 시녀가 오기 전에 서신을 숨겨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도 될 이야기였다면 방문을 통해 제게 전달했을 터.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제게 서신을 전달해 주는 것만이 목표였던 모양이다.
“……나한테 왜?”
그때 이미 서로 간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던가.
‘대체 뭘까.’
혹시 제 문양에 대해 뭔가 알아차린 걸지도 모른다. 리온이 모든 걸 다 말했다면…….
그녀는 조심스레 서신을 열어 보았다.
[제니스 황녀님.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따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니 내일 세르본타 카페로 와 주셨으면 합니다.
-에드가 드 벨루아]
갑작스런 초대에 어안이 벙벙했다. 제니스가 한참을 서신을 보고 있자 이내 서신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
화들짝 놀라 서신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단은 준비부터 해야 했다. 카페라면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을 터.
마탑에 갔던 이후 델테르의 감시가 더 심해졌다.
그의 개들도 저를 주시하고 있을 터.
똑똑똑.
“황녀님, 접니다.”
“들어와.”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시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시내에 나갈 테니 준비해 줘.”
“시내요?”
지금 들어온 시녀 역시 델테르의 귀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 역시 따라붙을 것이다.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녀는 시내로 가 카페에 들를 예정이었으니까.
“오늘은 카페에 가서 시간을 좀 보내 보려고.”
“그러시군요. 예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시녀는 싱긋 웃으며 제니스의 치장을 도왔다.
* * *
“엘르, 나야.”
리온의 노크 소리에 엘르는 부스스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벤과 둘의 모습을 본 직후 문을 잠그고 혼자 온갖 상상을 하다 잠이 들어 버렸다.
“벌써 아침이네.”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녀는 슬그머니 문을 열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나 집에 보내려고? 카벤 님은?”
“카벤은 일이 많아서 갔어. 아침 먹게 나와.”
엘르는 저를 돌려보내지 않는 리온의 태도가 의아했다.
“……진짜?”
“응, 그러니까 어서 나와.”
“나 씻지도 않았는데.”
“이리 와.”
리온의 말에 엘르는 문을 열고 다가갔다.
스윽-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말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 뭐야.”
진짜 마법사가 다 됐네. 이런 일은 아무렇지 않게 가능한 모양이다.
엘르는 리온의 옆에 붙은 채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너무 거한 거 아니야?”
엘르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을 보며 입을 떡하고 벌렸다.
“잘 먹여서 보내야 딴소리 안 들어.”
리온은 의자를 빼내어 주며 엘르를 앉혔다.
그녀는 제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가득 채워진 식탁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났다.
“과해.”
“너한텐 뭘 해 줘도 부족해.”
리온은 고기를 잘라 엘르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많이 먹어.”
“너랑 있으면 살찔 것 같아.”
“괜찮아, 세상에 네가 더 많아지는 거지.”
엘르는 닭살이 돋아 팔을 슥슥 쓸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가 뭘 읽는지 누구한테 조언을 듣는지 알아봐야겠어.
스승이 있다면 그놈을 기필코 목을 치리라.
“리온,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글쎄.”
그는 엘르의 눈치를 살피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이게 아닌 모양이네.’
그리고 리온 역시 엘르와 같은 생각을 했다.
카벤 이 녀석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가 알려 주는 것마다 엘르가 질색하는 걸로 봐선 잘못된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그놈 자기한테 먹히는 걸 알려 준 거 아니겠지.
리온은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확실히 이놈 제게 다른 마음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 카벤만 얼굴을 붉히진 않을 테니까.
“리온…… 이거 엄청 맛있어.”
엘르는 리온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리온은 순식간에 걱정이 사라졌다.
‘아 이래서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음식을 입에 넣지 않아도 엘르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양쪽 볼에 가득 음식을 넣고 먹고 있는 걸 본 그는 결국 활짝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