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에드가는 리온의 말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황태자가 네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라.”
“네, 그렇습니다.”
“무슨 부탁을 할 생각이지?”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엘르를 위한 일이란 것은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요즘 들어 리온의 행동은 꽤나 제 마음에 들었다.
거침이 없고, 후회도 없다. 황실에 대적할 만한 힘도 가졌으니 더더욱 꿀릴 것도 없었고.
“이제야 마음에 드는군.”
“……백작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하는 행동은 아닙니다만.”
“아, 그래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엘르를 위해서란 게 중요하지.”
지금 엘르는 굉장히 애매한 위치에 서 있었다.
센 공작의 반려인 것도 모자라 붉은 문양을 가지고 있었고, 제니스의 반려인 리온의 연적 상대였다.
에드가의 생각대로라면 황실에선 그를 제 쪽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을 터.
“엘르의 실종은 조만간 해결될 거다.”
“어쩔 수 없군요. 엘르가 그러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그래, 무엇보다 그래야 센 공작이 미끼를 물 거다.”
자백제를 이용해 엘르의 행방까지 찾고 있지 않은가.
초조한 게 분명했다.
소용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는 지금 가릴 게 없어 보였다.
“엘르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둬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겠나. 가만히 있고 싶진 않았던 모양인데.”
에드가는 말렸지만, 제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 해서 가만히 있으면 다행인데 그녀는 더 앞서 나가 일을 벌일 게 뻔했다.
“하지만, 센 공작의 처리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왜지? 다른 묘안이라도 있나?”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문양 사냥꾼. 그게 바로 접니다.”
“……하.”
“엘르의 문양이 붉다는 걸 알고 반려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뒤졌습니다. 초반에는 저였지만, 이후엔 제가 한 짓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리온은 힐끔 에드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처리하려 했던 자들은 이미 반려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니 상관없었습니다.”
“뭐, 그쪽엔 관심 없어.”
리온은 모르겠지만, 그는 제법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일삼았던 자였다.
그 정도로 눈 하나 깜짝할 위인이 아니란 소리다.
“그럼 센 공작의 처리는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저 역시 백작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황실에서 귀찮게 굴 것 같으니 막아 주십시오.”
“하?”
당돌한 녀석 좀 보게 제게 지금 뒤처리를 맡기는 건가.
“황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델테르와 같은 문양을 가졌다는 패를 까기엔 이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백작님께서 그녀를 설득시키든, 제 손에 죽지 않게 잘 말리든 해 주셔야겠습니다.”
리온은 정말로 제니스를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는 듯했다.
이걸 엘르가 알면 난리가 날 테지만.
“나 역시 동감하는 바다.”
에드가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제니스를 황실에서 빼내 옴과 동시에 그들의 약점을 잡고 무너뜨릴 생각을 해 왔다.
제니스 아벨 보니타. 그녀는 아직 제 어미의 죽음과 벨루아 가문의 연관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니 저렇게 제가 살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뭐든 뛰어들고 있는 거겠지.
에드가는 침대에 누워 있는 리온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곤 헝클어뜨렸다.
“……뭐 하는 겁니까?”
리온이 정색하며 에드가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가족이라며. 내 딸은 이런 걸 좋아하던데.”
“……가족은 무슨.”
리온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제법 재밌는 동맹을 맺은 것 같군. 이건 엘르에겐 비밀로 하지.”
“백작님이야말로 말 잘못 꺼내서 망치지 마십시오.”
역시나 둘은 맞지 않았다.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리는 게 아까보다 더 잘 어울리는 그림이랄까.
리온과 에드가는 픽 하고 웃었다.
‘하, 어릴 때 저놈을 쫓아냈어야 했는데.’
정말로 저도 모르게 정이라도 들어 버린 게 아닐까.
그토록 밀어내고 괴롭혔는데도 힘들어하면 도와주고 싶으니 말이다.
아니지 이건 그냥 저번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 하는 행동일 뿐이야.
에드가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지워 냈다.
자꾸만 제 딸이 계획해 놓은 것대로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원, 체면이 말이 아니군.”
그토록 밀어냈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그것도 이미 다 큰 성인 아들을 말이다.
남들이 알면 기함할 일이겠지만, 에드가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나 더 이상은 못 기다려요! 무슨 이야기 했어요?”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와 리온과 에드가를 번갈아 보는 엘르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진짜 말 안 해 줄 거예요?!”
그녀는 지금 확실히 불안했다.
미친놈과 미친놈의 동맹이라니…… 환장하겠네.
* * *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엘르, 나 아직 아파.”
리온은 칭얼거리며 내게 비비적거렸다.
나는 그를 밀어내며 한껏 노려봤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했냐니까.”
“별 이야기 안 했어.”
“그래? 정말?”
리온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보니 정말로 거짓말은 아닌 듯한데…….
“그런데 아버지는 왜 나보고 여기에 있으라고 한 거지.”
“여기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셨겠지.”
“널 믿고?”
내 생각엔 네가 가장 위험한 놈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리온과 어떤 사이인지 확실히 모르는 게 뻔하다.
늑대에게 제 딸을 맡기다니.
“……나 아파.”
리온은 조금 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파고들었다.
“엘르, 나 재워 줘.”
“어딜!”
순진한 척하면서 품에 파고드는 네 속셈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온을 밀어내지 못했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감긴 눈에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와 있었다.
툭툭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샘솟았지만, 나는 참고 있는 짐승에게 미끼를 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할게. 진짜, 손만 잡고 잘게.”
리온은 눈을 위로 뜨며 느릿하게 깜빡였다.
요망한 게 자꾸 어디서 이런 거 배워 와서는.
“……진짜 못살아.”
“네가 재워 줘야 마음이 편해서 그래.”
“다른 마법사한테 부탁할까?”
마법으로 재우면 한 방일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데 그거 말고 나는 지금 네 손길이 필요한 거야.”
리온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제 머리 위로 올린 그는 천천히 쓰다듬게 만들며 눈을 감았다.
“진짜 딱 재워 주기만 하고 갈 거야.”
“응.”
이럴 때는 말 잘 듣는단 말이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리온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괜찮은 것 같네.”
리온은 내 허리를 감싸며 옅게 웃었다. 내 말에 자꾸 웃음이 나는 모양이다.
“꺅!”
그리고 순식간에 내 허리를 잡아 아래로 끌어당기는 덕분에 그와 마주 보게 되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서로를 보았다.
“너, 너!”
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지만, 리온은 나를 더욱 끌어당겼다.
훅 하고 다가온 리온의 체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 나 잘생긴 사람한테 약하단 말이야.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탄탄한 몸과 함께 약간 젖은 머리칼.
이 얼마나 매혹적인 유혹이란 말인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홱 돌렸다. 정면을 보고 있음에도 리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지 마. 보지 말라고 했어.”
“그건 내 마음인데.”
리온은 조금 더 내게 몸을 밀착했다.
“그냥 보고만 있을게.”
“그게 제일 위험해.”
보고만 있는 것 자체가 나한테 위험하다고.
얘 진짜 겁이 없는 거야 뭐야.
“큭큭. 알았어. 안 할게.”
리온은 내 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긴장하지 말고 자.”
“……진짜 못됐다니까?”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두근두근.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몸이 노곤해졌다.
* * *
“백작님, 왜 혼자 오셨습니까?”
“아, 내 따님 눈 피해서 할 일이 있어서.”
에드가의 말에 헤센 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말할 때마다 불안한데.’
왠지 사고를 칠 것만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제니스 황녀에게 초대장을 보내.”
“……정말이요?”
헤센 경의 물음에도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짓말하겠는가.
리온이 제게 제니스를 맡겼으니 저 역시 움직여야지.
센 공작은 그가 잘 처리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놈의 뒤처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꽤 재밌는 일을 벌였군.”
마음에 들어.
에드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휙휙 저었다.
“빨리 움직여. 황제는 모르게 하는 게 좋을 거다.”
“예? 그게 가능하긴 합니까?”
“왜 불가능해?”
“……아닙니다.”
나 원. 진짜 이 짓을 때려치우던지 해야지.
서러워서 살겠냐고.
헤센은 하는 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제 방으로 향했다.
“……엘 님.”
“예, 안 그래도 듣고 있었습니다.”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엘과 헤센은 서로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밑에서 일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성격 더러운 상사 밑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