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에드가는 한결 진정된 리온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저렇게 제어를 할 줄 알면서 왜 안 하고 폭주까지 일으킨 건지.
보아하니 제어 장치가 엘르인 것 같긴 하다만.
“리온, 이제 좀 괜찮아?”
엘르는 조심스레 리온의 몸을 살폈다.
안색이 아까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생각해 보면 리온이 폭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제게 숨겨 왔을지도 모르고.
리온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마나의 폭주가 종종 생기는 게 분명해.’
다행히 리온이 저를 못 알아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엘르에겐 커다란 안심이 되었다.
“……빚은 갚은 것 같군.”
에드가는 털썩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다 죽어 가는 리온과 낑낑거리는 제 딸을 보니 새삼 생각이 많아졌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람 성가시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군.”
쯧.
그러나 말투와는 달리 표정은 온화했다.
어쩐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에드가는 이 자리가 불편했다.
저를 저가 아닌 모습으로 만드는 이 상황이 어색했으니까.
에드가는 애써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내며 리온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쩔 생각이지?”
“이미 준비를 마쳐 둔 상태입니다.”
“준비?”
리온은 힐끔 엘르를 살폈다.
동시에 에드가도 엘르를 보았다. 그녀가 이곳에 있으면 확실히 편히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계획의 중심에는 엘르가 있지 않은가.
‘이건 따로 이야기해야겠군.’
리온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했다간 계획을 시도하기도 전에 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 무엇도 아닌 엘르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었기에.
“아닙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거야?”
엘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온의 손을 붙잡았다.
“뭐든 아무것도 하지 마. 아버지도!”
생각을 멈춰! 그 어떠한 것도 건들지 말라고.
델테르는 꽤 큰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가 역시 당했으니 그를 건드리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
“제니스는 건들지 마.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안 그래도 미친놈이 사랑하는 사람까지 잃어봐 감당이 안 될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작대로 흘러가게 되고 만다.
살짝 원작을 틀었다고 느끼는 기쁨도 잠시란 소리다.
원작의 끝에는 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헛짓거리가 된다는 것이고.
“그녀가 날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게 문제야. 제니스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라고.
“아버지 제니스 황녀는 저와 사촌인 건 알고 있나요?”
“황제가 말을 해 줬을 것 같느냐.”
“아니요.”
예, 괜한 소리였군요.
엘르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끙끙 앓았다.
“그럼 이야기를 하고 저희가 빼내 오면 안 되나요?”
“그게 그리 쉬웠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하긴, 그렇네요.”
제니스도 황실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잘만 회유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엘르,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리온은 제 손을 잡은 엘르를 보며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모두가 다 너와 같은 생각일 수는 없어.”
“그건 알아. 그렇지만…….”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똑똑똑.
“마탑주님, 황실에서 전언이 왔습니다.”
“……전언?”
리온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이어 카벤이 들어와 황실의 문양이 찍힌 서신을 건넸다.
그는 천천히 봉투에서 꺼내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하.”
황실에서 모든 걸 알아 버렸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제니스는 제 이기적인 마음을 위해 저를 이용했다.
그리고 리온 역시 제 이기적인 마음을 위해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리온, 뭐라고 적혀 있는데?”
“별 이야기 아니야. 마탑주가 되었으니 황제에게 인사를 하러 오라는 것 같아.”
그는 곧바로 서신을 불태워 버렸다.
“정말 그거뿐인가?”
“예, 엘르. 잠시만 자리를 비켜 줄래?”
리온의 말에 엘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가와 단둘이 놔두고 가는 게 영 불안했다.
“정말 나 나가?”
“따님, 질척거리지 말고 나가거라.”
에드가는 엘르의 몸을 휙 하고 돌려 문밖으로 쫓아냈다.
엉겁결에 쫓겨난 엘르는 황당함에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봤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엘르와 카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 *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델테르는 제니스의 손을 놓으며 소리쳤다.
리온이 황실로 들어온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가졌을 리는 없었다.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전하와 제가 반려인 것보다는 낫겠죠.”
제니스는 붉어진 제 손목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폐하께서는 리온이 누구이든 상관없으실 걸요. 그저 원하는 것은 권력일 테니까.”
더 나아가 제 어미를 닮은 저의 종속이기도 했고.
“오늘도 보셨잖아요? 저를 바라보던 폐하의 눈빛을.”
그게 어딜 봐서 딸을 보는 아비의 눈빛이란 말인가.
역겨워서 토가 쏠릴 지경이었다.
하, 이 말을 하고 있는 델테르 역시 다를 바가 없긴 했다.
이쯤 되면 황실엔 제대로 된 이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끝까지 숨어서 발각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황실로 오게 되면 좀 더 나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제 자신이 바보였다.
“……그래서 내가 지켜 준다잖아.”
델테르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제니스를 바라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왜 매번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짊어지고 가는 건지.
이젠 저도 그녀의 반려였기 때문에 함께 나눠도 되지 않은가.
“난 널 포기 못해.”
“아뇨, 하게 되실 거예요.”
“잊었나 본데. 둘 중 누가 죽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끌리게 될 거야.”
델테르가 제니스에게로 한걸음 다가갔다.
그의 눈에 일렁이는 욕망에 그녀는 또다시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그러면서 왜 밀쳐 내진 못하지? 너 역시 나를 반려로 조금씩 인식하고 있다는 거겠지.”
이제야 신이 제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닐까.
“네 얼굴만 봐도 나는 끓어올라.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네 모든 것을 갖고 싶어 온몸이 안달 나.”
델테르의 손이 가볍게 제니스의 뺨을 훑으며 어루만졌다.
“너도 나와 똑같잖아. 그 빌어먹을 문양 때문에.”
그렇게 문양에 집착했던 최후가 이렇다니. 절로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끝까지 거부할 거예요.”
“그래 할 수 있으면 해.”
지척에 다가온 델테르의 얼굴에도 제니스는 밀어내지 못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이 지척에 다가오자 심장은 머리와는 달리 세차게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제니스는 고개를 돌려 간신히 다가오는 델테르를 피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에 안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온기가 온전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델테르를 밀쳐 내지 못했다.
손목에 그려진 문양의 모양이 더욱 짙어지며 빛이 났다.
델테르는 제니스를 꽉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내 억누르는 감정을 온전히 드러낸 채 제니스를 빤히 응시했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제니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이채가 일렁였다.
마주하는 시선만으로도 온몸에 열꽃이 피었다.
“데, 델테르…….”
멈춰야 해. 안 그러면 이대로 그와 각인이 될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빨려 들어갈 듯이 정해진 운명처럼 탐하고 있는 이 순간이 싫었다.
“그만해요!”
헉, 헉.
제니스는 힘겹게 델테르를 밀어냈다. 온몸에 힘이 쫙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왜, 왜……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그저 행복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곳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을 가진 게 잘못인가?
델테르는 제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제니스를 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토록 경멸할 정도로 저를 싫어한단 말인가?
어째서. 저는 그녀에게 매번 진심을 다했던 것뿐인데.
단 한 번도 제 마음에 의심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배다른 누이란 꼬리표 때문에 드러내지 못했을 뿐.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델테르는 이미 제니스에게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너는 대체 왜 나를 이토록 싫어하지?”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니스에게 해 왔던 그의 집착이 어떤 결과를 빚어냈는지.
강압적이고, 제 마음을 강요했던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걸 몰라서 묻는 당신이 한심하네요.”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며 그를 지나쳐갔다.
“다시는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대가 나를 원하게 된다면?”
“그렇다 해도 진심이 아닐 테니.”
제니스는 입술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 순간, 그녀는 제가 했던 행동이 떠올랐다.
‘아…… 리온 님도 이런 기분이셨겠구나.’
원치 않은 스킨십을 했을 때 역겨운 이 기분.
그걸 그도 제게 느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제 자신이 우스웠다.
“나조차도 똑같은 짓을 해 놓고.”
델테르와 저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제니스는 허탈함 마음이 몰려왔다. 이제 와 그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터.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