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제니스는 홀로 남겨진 채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날 밀어내는 거구나.”
분명 그에게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는데.
리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경계했다.
이곳에서 버틴다고 해도 들어가진 못할 것이다.
마탑은 마법으로 결계를 쳐 초대를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제니스는 지금 고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셈이다.
“돌아가야겠어.”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기사들이 저를 찾다 못해 델테르에게 알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불안함이 몰려왔다.
혹시나 이곳으로 온 것을 델테르가 알게 된다면…….
“안 돼.”
그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는 저와 이어져 있지 않은가.
설마, 델테르도 리온에게 문제가 생긴 걸 알게 되는 거 아닐까?
그건 곤란했다.
멍청하게 섣부르게 행동한 게 제 잘못이었다.
“빨리 가야겠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그 자리에 얼어붙은 제니스는 제 앞에 나타난 델테르를 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역시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지켜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전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델테르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제니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만 보면 겁에 질린 사슴처럼 떨어 대는 모양새라니.
뭘 하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델테르로 인해 그마저도 무산되었다. 제니스는 애써 당황한 표정을 숨기며 델테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냥 궁금했어요. 마탑에 와 본 적이 없어서요.”
“제니스 황녀.”
델테르는 제니스를 쳐다보며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할 거면 입을 닫아. 그 참이 더 나을 테니까.”
“……돌아가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는 제니스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조소했다.
“반려에게 버림당한 기분이 어때? 비참한가? 그것도 아니면…….”
“그쯤 해 둬요.”
제니스는 델테르를 쏘아보았다. 그와 말다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곤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 * *
“저, 전하!”
“왜들 그리 호들갑이지?”
“그게 황녀님께서…… 어?”
제니스를 찾지 못하고 궁으로 돌아온 기사들이 델테르를 발견하자 뛰어왔다.
그러나 곧이어 그의 곁에 서 있는 제니스를 보곤 하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대들의 죄는 따로 묻도록 하지.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라.”
“네, 네!”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때마침 보좌관이 델테르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전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벨루아 가문과 연관된 거 같습니다.”
“알았다.”
델테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망할 노인네가 그새를 못 참고 또 불러내다니.
그는 제 옆에 서 있는 제니스를 보았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
“싫어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뭐 좋은 소리를 듣겠다고. 좋을 대로 해.”
어차피 황제의 관심은 온통 엘르뿐일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같이 간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을 테지.
델테르는 제니스와 함께 알현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문이 열리자마자 폭언을 쏟아 부었다.
표정을 보니 언짢은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도 못 찾았다지? 무능한 놈 같으니.”
황제는 델테르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그깟 여자애 하나 못 찾아서 이리 요란을 떨어야 하다니.
심지어 에드가 백작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터라 신경이 쓰였다.
엘르가 제니스와 있다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를 이용해 무슨 말을 지어낼지 모른다.
하여 황제는 엘르를 빨리 찾아내려 한 것이다.
벨루가 가문이 그걸 이용해 무슨 짓을 할지 감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또 먼저 찾게 된다면 에드가를 손에 쥐락펴락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네 개들은 어쩌고 잠잠하단 말이냐.”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니 곧 찾게 될 겁니다.”
델테르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버지에게 이미 움직여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것은 보고할 수 없었다.
“……제니스도 왔구나. 너에게 문책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제니스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폐하, 저는 정말로 연관이 없습니다. 황실은 엘르 영애와 연관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내 너를 못 믿는 바는 아니다. 그쪽에서 걸고넘어지는 통에 곤란하게 되었을 뿐이지.”
황제는 제니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실 엘르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눈엣가시였던 존재를 없앴으니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제 생각일 뿐 다른 귀족들과 가신들의 의견을 다를 터.
“오랜만에 보니 기분이 좋구나.”
황제는 무엇보다 제니스를 보니 한층 누그러들었다.
제가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을 빼다 박은 제니스는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시선이 닿을 때마다 제니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버지.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나중에 하거라.”
“중요합니다.”
델테르는 제니스를 향해 턱짓했다.
“황녀는 내보내시죠.”
“아뇨, 저도 있을래요.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델테르가 저를 내보내고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웠다.
“뭐, 당사자이니 상관없긴 하지만.”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다급히 고개를 들어 델테르와 시선을 맞춘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안 돼. 안 돼…….’
그는 지금 저와 델테르가 반려 각인이 생겼다고 말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리온의 입지가 곤란해진다. 더불어 제 희망마저 앗아가는 행동이다.
“제가! 먼저 말할게요.”
“……뭐?”
“아버지, 제게 반려의 문양이 생겼어요.”
제니스는 황급히 액세서리를 벗어 손목을 드러냈다.
선명한 금색의 문양과 함께 초승달이 보였다. 그녀의 말에 황제는 뜻 모를 미소를 그려 넣었다.
“각인이라…….”
그것도 귀하다는 금색이 아니던가.
“반려는 찾았느냐?”
“네.”
제니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모습에 델테르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황제의 앞이라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구지?”
“제 반려는…….”
질끈, 두 눈을 감은 제니스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리온 님이세요. 현 마탑주로 계시는.”
“……너!”
델테르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마탑주라니? 그자는 벨루아 가문의 엘르 영애의 기사가 아니었느냐.”
황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벨루아 가문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꽤나 머리가 아프겠군.
그 생각을 하자 자꾸만 입꼬리가 들썩였다.
에드가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썩어 들어가겠네.
제니스가 제게 말한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반려가 생겼다길래 죽여 없애려고 했다.
허나 벨루아 가문의 수족이라면 곁에 둘 필요가 있었다.
델테르는 제니스를 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반려는 한 쌍만 나타나는 게 통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제게도 똑같은 문양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버지는 잘못된 것으로 간주할 터.
제니스는 제 입을 막기 위해 먼저 선수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맞아요. 현재는 가문에서 나온 사람이죠. 어떠세요? 황실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이 드는데.”
그녀는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마탑주가 바뀌었다고 해요.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잖아요.”
“그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에드가가 그런 인재를 숨겨 뒀을 줄은 몰랐지만.”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무엇보다 각인이 되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황실의 편에 서게 될 터.
“그래서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니스는 고개를 들고 황제를 빤히 보았다.
“리온 님을 제 반려로서 확실히 해 두고 싶어요.”
“허나, 그 자는 마탑주라지 않았느냐.”
마법사라면 모를까 마탑주나 되는 놈을 강제로 들어앉힐 수는 없었다.
반발도 심할 테고 그가 가진 힘의 격도 모르지 않은가.
“마탑에 방문할 수 있는 황실 허가증을 내주세요. 그들이 거절할 수 없게요.”
“……그거면 되겠느냐?”
황제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당당한 표정에 뭔가 다른 수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아버지!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델테르는 제니스를 막아섰다. 이런 식으로 리온과 결탁할 생각을 하다니.
“그자는 벨루아 가문의 엘르 영애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문양이 있음에도 다른 자를 마음에 두었다라…….”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델테르가 제게 거짓을 고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문양을 이길 자는 없겠지.”
“문양은 상대가 죽으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델테르의 말에 주변이 싸늘해졌다.
제니스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고, 황제 역시 아까와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내 잘 알다마다.”
질긴 문양을 끊어 내는 방법은 목숨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절대로 황녀를 리온과 단둘이 만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권력을 가지게 된 이상은요.”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이 건은 생각을 좀 해 보겠다.”
“아버지…… 하지만, 저는.”
“제니스. 이 아비가 말하지 않았으냐. 생각을 해 보겠다고.”
“……네.”
황제의 희번덕하게 뜨이는 눈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패는 던졌으니 기다릴 수밖에.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델테르는 제니스의 손을 잡아 알현실 밖으로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