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이제 좀 잠잠한 모양이군.”
“……어쩌실 생각이에요?”
“뭘.”
“……리온이요.”
나는 에드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가 가진 힘을 알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이용할 가능성이 다분하지 않은가.
“한 가지 알려 드릴 게 있어요.”
“네가 어딜 다녀왔는지를 말할 거라면 이미 알고 있다.”
“……어떻게 아세요?”
분명 엘은 문 앞에 잠이 든 걸 보고 나왔는데.
“내가 그 근처에서 널 봤으니까.”
“아.”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죄송해요.”
“네가 얌전히 집에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으니 널 두고 나온 내 죄겠지.”
다행히 아버지는 혼내지 않으셨다. 아마도 눈앞에 있는 리온으로 인해 생각할 것이 많은 덕분일 터.
“리온이 제니스의 반려예요.”
“……의외군.”
“그리고 아마…… 델테르 전하에게도 똑같은 문양이 생길지도 몰라요.”
“한 쌍이 아니라 두 명의 반려가 존재하게 된다는 건가?”
“네. 아마 지금쯤이면 발현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 넌 어릴 때부터 이상했었지. 나가지도 않았는데 밖의 실리에 대해 잘 알았고, 처신도 곧 잘했지.”
그건 네놈한테 살아남기 위해서였고!
지금이야 잠잠해져 한결 내 목이 날아갈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런데 이놈 다른 이들은 못 알아보지 않았던가?”
“맞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너는 구분을 하는 것 같던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제니스만 알아봐야 했지만, 그는 나를 똑바로 구분했다.
오히려 제니스는 반려의 각인이 아니었다면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걸 알고서 리온을 집으로 데려온 거였어요. 아버지가 워낙…….”
“내가 뭐?”
“목이 날아갈 일을 많이 하는 바람에, 저도 살기 위해 대책은 있어야 했거든요.”
“그 방안이 이 녀석이었나?”
에드가는 헛웃음을 삼켰다.
“나중에 각성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어요. 아버지가 멈추지 않았다면 저도 같이 죽게 되었을 테니까요.”
“허.”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요. 제니스를 이용해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셨잖아요.”
“……다 알고 있었군.”
나는 잠이 든 리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까지 가실 생각인가요? 제니스는…… 제 사촌이잖아요.”
“그래 봤자 같은 황실 편일 테지.”
“과연 그럴까요.”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녀를 가끔 지켜봤을 때 황실에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리온에게 집착하는 것도 벗어나기 위함일 테고.
델테르가 그녀에게 얼마나…….
“아버지 때론 보이는 게 다가 아닐 때가 있어요.”
“그래서.”
에드가는 팔짱을 끼곤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놈을 이대로 두고 보겠다는 건가? 황녀와 손을 잡고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네 입으로 반려라고 했을 텐데.”
“말했잖아요. 델테르 역시 반려의 각인이 똑같이 나타날 거라구요.”
그렇게 되면 각인에는 혼동이 생길 것이다.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둘 중에 누군가가 확실히 각인을 하게 된다면 다른 한쪽은 자연스레 벗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사실 이건 소설에 나온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변수란 것은 늘 있기 마련이니까.
“또 생각이 있는 모양이구나.”
“저는 늘 언제나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한 걸요.”
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네 반려인 센 공작의 처리가 우선이겠군.”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순 없어요. 그가 먼저 저를 찾아내야 해요.”
“그건 안 돼.”
“위험한 거 알아요. 하지만 명분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우린 백작 가문이었고, 그는 공작이었다.
계급을 뛰어넘어 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난다고 해도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마.”
에드가는 한 발 물러났다.
사실 나는 지금도 두려웠다.
이야기가 많이 틀어졌기 때문에 이제 어떠한 것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전개였다.
“아버지 정말로…… 어머니가 황실의 손에 죽었나요?”
에드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게는 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 그리고 마음속에 품어 왔던 복수심이 들끓는 듯했다.
“……그래. 그러니 네가 아무리 멈추라고 해도 나는 끝까지 갈 테지.”
“그게 아버지와 저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고 해도요?”
“이미 지금 황실은 썩어서 도려내야 한다. 그걸 모르진 않겠지.”
“그러니까 그걸 왜 아버지가 해야 해요.”
나는 에드가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냥, 내버려 둬요. 어차피 부패한 황실은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엘르.”
“제발요.”
에드가의 팔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애원했다.
“엄마도 없는데, 아빠까지 없으면 나는 혼자잖아. 홀로 남고 싶지 않아요.”
그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울었다. 그래야만 그러겠다고 대답할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에드가의 품에서 눈물을 쏟아 냈다.
“……그래, 그러마.”
그제야 내 머리 위로 다정하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숨을 쉬었다.
“엄마하고 하는 짓은 똑같아선, 이길 수가 없군.”
“……정말이죠?”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눈물을 닦아 냈다.
“……두 사람의 감격적인 포옹은 잘 봤지만,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리온의 작은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헤드에 기대어 뜨거운 숨을 뱉어 내는 그가 옅게 웃었다.
“마름모. 센 공작의 문양도 너와 똑같아.”
“……그걸 어떻게.”
“궁금해서 좀 찾아갔거든.”
“웬일로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군.”
에드가는 리온을 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여전히 마나가 날뛰고 있어 가까이 가기엔 위험했다.
에드가는 손을 뻗어 침대 주변에 가볍게 선을 그었다.
“넌 여기 넘어올 생각 말거라.”
“……너무해요.”
“엘르, 이번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리온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선 밖에서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보았다.
“언제부터 둘이 그렇게 죽이 잘 맞았대?”
“오늘부터라고 해 두지.”
에드가의 말에 나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아빠!”
“자,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 볼까나.”
에드가의 말에 리온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어쩐지 두 사람의 눈에 광기가 번뜩이는 것 같다.
* * *
“저를 찾고 있으니까 미끼가 되면 되지 않을까요?”
“어림없어.”
“엘르, 안 될 말이야.”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두 사람 진짜 어색한 거 알죠?”
나는 한 마음 한 뜻이 된 리온과 에드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뭐야, 진짜.
“붉은 문양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죽어서 반려를 잃어 문양이 사라졌습니다.”
“한때 떠들썩했던 문양 사냥꾼 때문이겠지.”
네, 아버지. 그게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랍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리온은 찔리지도 않는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맞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용의자가 추려져서 센 공작의 집에 방문을 하고 확실해졌죠.”
“그 행동력은 마음에 드네.”
“제니스 황녀는 마력을 내보내는 자입니다. 신성력이 있어 성녀로서도 자격이 충분하고…… 제힘을 억누르는 것도.”
리온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손쉽게 가능할 겁니다.”
“……반려로서 각인이 완전히 된다면 폭주도 멈출 테고.”
“네. 다행히 지금은 컨트롤이 가능하긴 하지만.”
“아까는 아니던데.”
“……최근 들어 불안정해져서 그런 겁니다.”
리온은 눈썹을 들썩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거 델테르에게 똑같은 문양이 생겨서 그래.”
리온은 의식을 정말로 잃었었는지 나와 에드가가 했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 이상했던가.”
“리온, 제니스 황녀님을 만났을 때 다른 특이점은 없었어?”
“전혀 없었어.”
그는 주먹을 쥐었다 피며 미간을 좁혔다.
아마도 억지로 마음이 끌리는 감정을 떠올리는 거겠지.
그거 나도 해 봐서 아는데 꽤나 기분이 더러웠다.
“나 선 안으로 들어갈래.”
“안 돼, 위험해.”
나는 에드가가 그어 놓은 선 쪽으로 다가갔다.
“네 녀석이 제멋대로인 건 알지만 이번만큼은 안 되니 넘어올 생각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또다시 내게 경고했다.
그렇다고 말을 들을 내가 아님을 알겠지만.
“리온, 그때 생각나?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리온의 눈이 붉은빛으로 뒤바뀌었다.
“그때도 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었지. 하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내게 다가갈 거야.
먼저 손을 내민 건 나였고, 너는 그걸 잡기만 하면 돼.
“난 여전히 네가 무섭지 않거든.”
한 발짝, 그리고 두 발짝.
선 쪽에 가까워진 나는 활짝 웃으며 선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마나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나는 리온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온몸에 아려오는 통증에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넌 할 수 있어.”
제니스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거야.
폭주를 하게 되더라도, 너는 날 알아볼 테니까.
그리고 리온은 정말로 제 마나를 잠재웠다.
내게 상처 하나 입히지 않겠다는 집념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