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20)

제73화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제니스는 마음이 급해졌다.

“델테르에게 문양이 생긴 후 그를 볼 때마다 심장이 이상해.”

일이 이렇게 돌아갈 것이라곤 예상 못했는데.

“빨리 알아내야 해.”

엘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녀의 신상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제니스는 방으로 돌아와 망토를 걸치곤, 곧바로 밖을 나섰다.

“아버지에게 말해도 소용없을 거야…… 그래 봤자 나는 이용될 뿐이니까.”

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야 했다.

“황녀님?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아, 잠시 시내에 다녀오려 해요.”

“저희가 같이 동행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니스는 꼬리가 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기사들은 제가 돈만 주면 쉬쉬할 것이다.

마차에 올라탄 제니스는 창밖을 보았다. 오랜만에 밖을 나가서 그런지 참으로 바람이 시원했다.

그녀는 제 손목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리온.”

반려가 또 나타났어요.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요?

분명 반려는 저였지만, 리온은 그걸 거부하고 엘르를 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델테르는 거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런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제니스는 저를 쳐다보았던 델테르의 시선을 지워 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상에 고통스러움만 커졌다.

* * *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옆을 보았다.

“……갔구나.”

사라진 리온의 흔적에 나는 몸을 웅크렸다.

손목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문양이 있었고, 리온과 나는 겉돌았다.

똑똑똑.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센 공작이 자백제를 가져갔으니 사용할 것이 뻔했다.

‘어디에 사용할지 알아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그가 있을 곳으로 가야만 한다.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열리지 않았다.

“아…… 리온이 또.”

어쩐지 엘이 잠잠하다 했다.

아직 에드가는 내가 있는 곳을 리온이 모른다고 알고 있었다.

나를 보러 온 걸 에드가에게 보고가 되면 곤란하니 그를 재운 모양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엘은 잠이 들어 있었다. 이걸 에드가가 보면 난리가 날 텐데.

“엘 님, 죄송해요. 깨워 드리고 싶지만 그러면 제가 나가질 못하니까요.”

이해하죠?

아마 이해하리라 믿는다. 우선은 그의 동향부터 파악해야 했다.

내게는 변장할 수 있는 망토가 있었으니 들키진 않을 터.

“좋아. 가 보자고!”

이대로 방에서만 있기엔 답이 없었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게는 마력을 방어할 힘도 능력도 없었으니 살길을 모색해야지.

리온에게만 의지하는 것은 그만둬야 해.

반려의 각인은 더더욱 심해질 것이다. 언제까지 리온의 반항이 통할지 알 수 없다.

내 욕심을 위해 그를 흔들어 놨으니 나도 내 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길드에서 번 돈은 꽤나 있었으니 이걸로 센 공작에 대한 정보를 캐는 것도 쉬울 터.

일단은 그가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 나는 지금 미끼가 되려 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는 나를 쉽게 해하진 못할 테니까. 반려란 그런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괜찮을 거야. 잘할 수 있어.’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곤 시내로 향했다.

* * *

제니스는 길드 상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어?”

익숙한 분위기의 여자가 시선을 끌었다.

시내에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개인적인 일이라.”

그녀는 기사에게 금화를 쥐여 주며 웃었다.

“잠시, 혼자 있어도 될까요? 근처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하지만…….”

“그대들이 곤란해질 일은 없게 할게요. 약속해요.”

“정말이십니까?”

제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잠시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아서 이야기 좀 나누고 오려는 것뿐이에요.”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문제를 일으킨 적 없는 황녀였기에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가 봤자 어디까지 가겠는가.

그녀의 얼굴은 이미 제국 내에 다 퍼져 있으니 도망가더라도 금방 잡히고 말 것이다.

제니스는 천천히 망토를 쓴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분명 제 예감이 맞다면, 그녀는 엘르 나타시아가 맞다.

혹여나 하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정말 맞다면?’

제가 찾아내는 바람에 엘르의 거처가 특정된다면 그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되는 셈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자 발걸음이 멈췄다.

“그래, 아닐 거야. 맞다고 해도 네가 뭘 어쩔 수 있는데?”

그녀를 죽여 없애기라도 할 건가.

아니, 제니스는 그럴 배짱이 없었다.

무엇보다 제게 내려진 신성한 힘을 사용하기엔…….

“차라리 마탑으로 가자.”

그녀에 대해서 알아낸다고 해도 리온만 잘 구슬리면 그만이었다.

제니스는 기사들을 보다 이내 다른 마차를 잡았다.

“마탑으로 부탁해요.”

“……마탑이요?”

“네,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마부는 곧이어 빠르게 마탑으로 향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해도 그를 만나야 한다.

* * *

“응?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나는 힐끔 주변을 보다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빨리 움직여야겠어.”

정보를 캐다 보니 센 공작이 있는 곳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구나.’

이렇게 손쉽게 얻을 수 있다니.

나는 새삼 허무해졌다. 하긴, 나조차도 살기 위해서 돈을 바득바득 모았으니까.

아버지에게 사업을 제안하고 수수료를 꽤 받아먹은 덕에 돈은 두둑했다.

카페에 있다는 제보를 듣고 와 보니 정말로 센 공작이 있었다.

다른 영애와 하하호호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앞에 있는 찻잔은 조금 비어 있었지만, 센 공작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듯 가득 차 보였다.

‘저기에 자백제를 탔구나.’

그런데 뭘 위해서?

이미 반려가 저인 걸 알았다면, 다른 이에게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로 뒤에 앉아 차를 시키곤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 다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반려는 찾았습니까?”

“아니요…… 아직.”

“그렇군요, 문양의 색은…….”

“푸른색이에요.”

와 저렇게 술술 불 줄이야. 나는 새삼 자백제의 효능에 감탄했다.

값이 비싼 건 다 이유가 있구나.

심지어 어떻게 푸른 문양을 가진 이를 찾아낸 걸까.

센 공작의 정보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자백제란 게 꽤 위험하네.’

나는 품속에 있는 약병을 꼭 쥐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 순간, 뒤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태연하게 차를 마시는데 내 옆으로 음영이 드리웠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차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저랑요?”

“네, 어쩐지 마음이 이끌려서요.”

꿀꺽.

나는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제 이름은 보테미로 얀 센이라고 합니다.”

그의 거짓된 소개에 나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로체라고 해요.”

에라 모르겠다.

되는대로 이름을 지어야지.

“엘로체라…….”

“죄송하지만 성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수상하게 보이겠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차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나는 싱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여기 새 차와 함께 다과 좀 부탁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가 잠시 한눈팔았을 때 품속에 있던 약병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부턴 눈치 싸움의 시작이다.

나는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센 공작은 내게서 어떠한 것도 알아가지 못할 것이다.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사교계에는 잘 나오지 않으시나 봅니다.”

“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요.”

“그렇군요. 갑갑하진 않으십니까?”

“익숙해서 괜찮아요. 아!”

나는 손을 번쩍 들어 휙휙 흔들었다. 그러자 센 공작의 고개가 자연스레 뒤로 향했다.

‘지금이야!’

순식간에 찻잔을 휙 하고 바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착각했나 봐요. 아는 분인 것 같았는데…….”

“그렇습니까?”

센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차가 좀 흐른 모양입니다.”

아…… 제길.

그는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찻잔을 바꿨다.

“제 찻잔은 흐르지 않았으니 이걸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그가 눈치챈 게 틀림없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원래의 내 찻잔을 받아들였다.

“차향이 좋습니다.”

센 공작은 싱긋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차를 마시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네요, 차가 꽤 마음에 들어요.”

“엘로체, 당신의 성은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바로 찔러볼 줄은 몰랐는데.

해독제를 먹었기 때문에 소용은 없었지만, 이대로 들키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지 못한다.

“엘로체 몰디아라고 해요. 가문이 오래전에 멸문해서 아는 이들도 없겠지만요.”

나는 겨우 몰락한 가문을 떠올리며 둘러댔다.

긴장감에 호흡이 흔들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렇군요, 혹 그대도 문양 보유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붉은 문양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어머! 맞아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나는 자백제를 먹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술술 말하는 거에는 의심 한 점 없어 보이게.

“어쩐지 그대가 제 반려란 생각이 듭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반려가 있는걸요?”

내 대답에 센 공작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