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20)

제71화

무슨 마음의 변덕이 있어서 이러는 걸까.

나는 힐끔 에드가를 보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망토 벗고 편하게 먹거라.”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래.”

아무리 그래도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가다가 날 보면 어쩌려고 그러지.

도망자(?) 주제에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그 정도 대책도 없이 소풍에 동참했을 거라 생각하나 보군.”

저렇게까지 말하면 안심해도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슥 망토를 벗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헤센 경은 고개를 저으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식감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디리아가 만든 게 확실했다.

‘디리아는 괜찮으려나.’

울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아니겠지.

괜스레 그녀가 떠올라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이렇게 숨어서 맛있는 것도 먹는데 디리아는…….

“아가씨 쉿, 망토 쓰십시오.”

“아까는 괜찮다면서요!”

“아무도 못 오게 하신 것 같았는데 저 멀리서 누가 옵니다.”

아잇, 이럴 거면 소풍 왜 따라온 거야.

나는 에드가를 휙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죽였다.

“백작님, 그걸로 배가 차겠어요? 이거 더 드시라고 챙겨 왔어요. 어머, 모르는 분도 계시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엉덩이가 들썩거렸지만, 얌전히 있어야 했다.

‘디리아, 잘 지내고 있었구나.’

내 우려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아 잠시 상의할 것이 있어 이야기 중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가 봐.”

“네, 알겠어요. 그런데 누가 찾아온 것 같더라구요.”

“……내가 가 보지.”

에드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디리아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머,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디리아의 발소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디리아는 잘 지내고 있네요.”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래 봐도 꽤 강한 분이시거든요.”

하긴 에드가에게 기도 죽지 않고 종종 제 할 말을 다하는 걸 보면 수긍이 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누가 왔을까요?”

“글쎄요…… 백작님께 손님이 올 사람이 있을지.”

나도 헤센 경의 말에 동의했다. 아버지의 손님이라니.

친구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 * *

에드가는 정보상을 방문한 센 공작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빨리 오셨군요.”

“네, 아무래도 급한 일이다 보니.”

표정을 보니 급한 것 같긴 했다. 손목에는 여전히 액세서리가 착용되어 있었다.

‘저놈이 엘르의 반려란 거지.’

그는 빤히 센 공작의 얼굴을 보았다. 능글맞게 웃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양의 모양만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주 꼼꼼히도 숨겨 뒀군.’

에드가는 센 공작의 손목을 유심히 살폈지만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들어도 너무 잘 만든 탓에 문양이 제대로 가려진 탓이었다.

“자백제는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른 의뢰가 또 있으십니까?”

“아, 있긴 합니다만.”

센 공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저, 용병이 좀 필요합니다.”

“용병이라…….”

그냥 용병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 센 공작은 벨루아 가문에 숨겨 둔 용병들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한번 떠보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는 엘르가 제 반려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여, 벨루아 가문에서도 그걸 눈치챈 건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변방에 있는 백작 가문이라고 해도 그 위상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

“죄송하지만, 그 건은 안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저희 쪽에서도 필요한 시점이라.”

에드가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센 공작은 탄식했다.

“아. 아직 엘르 영애를 찾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걸 먼저 깬 것은 에드가였다.

“다른 길드는 소개해 줄 수 있습니다. 필요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부디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죠.”

센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슥 훑었다.

“그런데 저번에 보았던 대리자분은 보이지 않는군요.”

“말 그대로 대리자이니, 제가 있는 지금 불필요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에드가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길드는 열지 않을 생각입니다. 자식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센 공작은 결국 별 소득 없이 길드를 빠져나갔다.

* * *

리온은 엘르를 보러 가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델테르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니.

분노가 치밀었지만, 표정을 갈무리한 채 그를 보았다.

“마탑에서는 거절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황실의 명을 거절하다니, 그저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온 것뿐인데.”

“날을 잡아 다시 방문하십시오.”

리온은 날 선 눈빛에 델테르는 입술을 짓씹었다.

‘건방진 놈.’

리온은 제니스의 반려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싸고돌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가 먼저였다.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도 저이지 않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마탑주가 바뀌었다더니.”

그게 리온일 줄은 몰랐다. 마법에 능한 건 알았지만, 마탑주를 차지할 정도로 강했던가?

델테르는 으득 이가 갈렸다.

제니스가 그를 원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리온은 저를 향해 적대감을 보이는 델테르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저한테 자문을 구하실 겁니까?”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치켜든 턱에 의해 델테르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황실에서 나왔으니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도록 하지. 일단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이쪽으로 오십시오.”

리온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델테르를 안내했다.

리온은 의자에 걸터앉아 델테르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내 기사들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곳에서 사용된 마나의 양이 상당한 것 같더군.”

“그렇습니까.”

“가서 좀 봐줬으면 하는데.”

“그건 곤란합니다.”

리온은 턱을 괴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지금 황실에서 부탁하는 걸 거절하겠다는 건가?”

“마탑에서 무조건 해 줘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황실에서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도 아닌 듯하고.”

델테르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의 말대로 황제 몰래 온 것이니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다.

제 개들이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제가 가서 봐도 되는 일이긴 합니까?”

“네놈에게 부탁할 생각은 없어. 밑에 마법사들 몇 명만 보내면 될 거다.”

“싫습니다.”

리온은 웃으며 딱 잘라 거절했다. 그가 마법사들이 필요한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그가 바로 델테르의 개들을 무참히 죽인 당사자였으니까.

“하…….”

“마법사들을 보내면 황태자 전하께선 제게 뭘 해 주실 겁니까?”

“뭐?”

황실에 거래를 거는 미친놈은 리온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유로웠다.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느긋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델테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뭘 원하지?”

“나중에 제가 필요할 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이를테면?”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그는 리온의 잿빛 눈동자를 뚫어져라 봤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걸로 봐선 진심인 듯했다.

재미로 던지는 말도 아닌 것 같고.

델테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 다른 곳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

리온은 픽 웃으며 계약서를 허공에 띄웠다.

“구두 계약은 불안하니 계약서 하나 작성하시죠.”

“……철두철미하군.”

델테르는 별생각 없이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갑은 을의 부탁을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

“들어주지 않겠다고 뒤늦게 발 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 나를 뭘로 보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리온의 뻔뻔한 태도에 델테르의 얼굴을 점점 더 굳어갔다.

“을의 부탁으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갑이 해결한다?”

“그럼 부탁한 당사자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을 맡기겠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리온의 말에 델테르는 할 말을 잃었다.

뻔뻔한 걸 넘어서서 보통의 사고방식으로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지금 급한 것은 저였기에 하는 수 없이 서명을 해야 했다.

“아, 제니스에 대한 것이라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관심 없다는 듯 무신경한 어투에 어쩐지 저가 상처를 받았다.

‘저런 놈이 대체 뭐가 좋다고?’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그가 가진 힘일지도 모른다.

황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해 뒀을 게 뻔했다.

결국 델테르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바로 마법사를 보내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가 드려도 됩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마법사 두 명 정도만 함께 데리고 가겠다.”

엘르와 닮은 이를 뒤쫓아 가다 난 사고였기에 리온을 데리고 가는 것은 찝찝했다.

혹시 모르지 않나. 그가 돌변해서 해를 가할지도.

“그렇게 하시죠.”

리온은 미련 없이 계약서를 받아들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 둘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

마중은 못 나가 드리겠군요.

델테르는 대답 없이 뒤돌아 문 쪽으로 향했다.

“아, 그거 아나? 문양이 꼭 한 쌍만 나타나는 건 아니더군.”

씩 웃으며 나가는 델테르가 방을 나섰다.

리온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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