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델테르는 마주한 제니스를 빤히 보았다.
최근 들어 그녀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나 보군.”
“전하께선 요즘 한가하신 것 같네요. 폐하께서 아시면 남매간에 사이가 좋다고 좋아하시겠지만.”
“내일 마탑에 가.”
“……마탑은 왜 가시는 건가요?”
그곳엔 리온이 있었다. 델테르가 마탑에 갈 일은 딱히 없을 텐데.
“그를 괴롭히지 마세요.”
“내가 그놈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아닌가요?”
“맞아.”
델테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니스를 빤히 보았다.
“너와 내가 다르게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이미 벌어진 일인 걸요. 다르게 만났다고 해도 똑같았을 거예요.”
제니스는 리온와 맺어진 인연이었다. 델테르와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와 잘될 일은 없었을 터.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것 참. 문양이 뭔지, 사람을 참 우습게 만들어.
그는 팔을 걷으며 제니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제니스, 내 누이. 사람의 일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야.”
“…….”
천천히 드러나는 델테르의 손목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 희미하지만, 띠는 색은 확실히 보였다.
금색.
그걸 본 제니스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갔다.
“……이렇게 되면 나도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 건가?”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색은 같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알잖아요. 문양의 모양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그녀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발에 땀이 찼고,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왔다.
‘괜찮아. 문양은 한 쌍만 존재해.’
그러니 그에게 같은 금색이 나타난다고 한들 상관없을 거야.
제니스는 작은 희망을 꽉 쥔 채 델테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문양에 드러난 모양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금색의 달 모양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제야 나도 이해가 되더군. 내가 왜 그토록 네게 끌렸는지 말이야.”
어쩌면 내재되어 있는 문양의 힘에 의해 그랬을지도 모른다.
델테르의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가 번졌다.
“이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 안 돼. 그건!”
제니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한 쌍의 문양이 아닌 반려가 두 명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만 해도 난리가 날 것이 뻔했다.
문양이란 반려에게 신뢰였고,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제니스에겐 두 명의 반려가 생긴 셈이다.
“그러니 이제부턴 영리하게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델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니스의 턱을 부드럽게 잡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이걸 어쩌나. 도망갈 수도 없게 생겼는데.”
그는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제니스를 옭아맬 것이 생겼으므로. 오히려 이 상황에 초조한 것은 그녀였다.
제니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온몸이 떨려왔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안 돼. 빨리 움직여야 해.’
델테르가 모든 걸 무너뜨리기 전에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했다.
* * *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닙니까?”
“신경 꺼.”
“까칠하시긴.”
리온은 제게 관심을 보이는 마법사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센 공작이 엘르의 반려임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인데.
그가 먼저 움직이지 않은 한, 동기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미리 경고는 했지만 저 홀로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센 공작이 저를 다시 마주할 땐 그 공포가 되살아나겠지만……그것만으로는 불안했다.
“마탑주가 되었으면서 남에게 알리지 않아도 됩니까?”
“꼭 알려야 할 이유도 없어.”
리온은 자꾸만 제게 말을 거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탑주님, 제 이름은 아십니까?”
그제야 리온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솔직히 입는 옷이 똑같아 구별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특유의 제스처만 본다면 그는 카벤이 맞았다.
“카벤 아이작.”
“……오, 제 이름은 아시는 군요.”
카벤은 어깨를 으쓱하곤 자리로 돌아갔다.
마탑주가 마탑에 관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다고 일이 돌아가지 않은 것도 아니라 따지기도 뭐했다.
황실에서도 그가 마탑주가 된 것을 모르는 눈치인데…….
“벨루아 가문에서는 알고 있습니까?”
“알려야 할 의무 없어.”
리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걸까.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 시답잖은 말 하지 말고.”
그제야 카벤은 황실에서 온 서신을 내밀었다.
“마탑에 들리겠다는 황실 서신입니다.”
“거절.”
“……황실에서 보냈다니까요?”
“거절.”
“……마탑주님 제가 하는 말 듣고 계시긴 합니까.”
“황실에서 온다고 하는데 수락해야 할 의무가 있나?”
“그건 아니지만…… 껄끄러워질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하. 카벤, 우리가 황실의 눈치를 봐야 할 위치는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카벤은 그제야 입을 꾹 닫았다. 그래도 델테르 황태자라면 마음대로 들이닥칠 게 뻔했다.
과거의 마탑주는 황실과 우호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사실 밖에는 쉬쉬하고 있지만, 리온이 마탑주가 된 것에는 큰 비밀이 있었다.
마탑주가 되기 위해선 일련의 단계가 존재한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 힘도 커야 했지만, 인정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리온은 그 모든 과정을 밟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전 마탑주를 단 한 번의 힘으로 찍어 눌렀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은 어떠한 반발도 하지 못했다.
힘의 격차가 공포를 느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어제 마탑주가 황제를 만나고 온 후 뭔가를 지시했는데 그걸 들은 리온이 폭주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마탑을 평정하는 것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에 광기가 서린 리온은 마탑을 엎어 버렸다.
‘진짜 미친놈 같았지.’
그 결과 마탑주가 바뀌었다. 말이 되는 일인가 싶지만, 그가 그날 내뿜었던 마나를 본 이들이라면 납득할 만했다.
리온이 마탑주가 된 것은 불과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어제 그 난리가 났었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상위 마법사들은 리온이 내정되어 있었고, 마탑주의 몸이 급격히 나빠져 교체가 이뤄졌다고 공표했다.
원래라면 황실과 다른 이들에게도 마탑주가 바뀌었음을 전달해야 했지만, 리온은 그조차도 막았다.
괴물 같은 놈.
벨루아 가문에선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거두고 호위 기사로 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벤은 고개를 저으며 제 일에 집중했다.
* * *
“벌써 자백제를 구했어요?”
도대체 우리 길드는 왜 이렇게 유능한 거야.
나는 센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면서도 헛웃음이 났다.
저 많은 걸 어떻게 구했는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이었다.
“헤센 경, 센 공작이 오면 알아서 처리 좀 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그 역시 나와 센 공작이 문양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는요?”
“처리할 게 있다고 어딜 좀 가셨습니다.”
“이 아침부터?”
“네, 이 아침부터 당장 가야 한다고 가셨습니다.”
“……별일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쁠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아, 그리고 이거 꼭 드시랍니다.”
“이게 뭔데요?”
“해독제입니다.”
“……해독제요?”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센 공작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렇네요.”
나는 헤센 경이 내민 작은 병을 냉큼 받아들였다.
가슴 속에 품어 뒀다가 위험할 때 써야지. 그가 내게도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
“자, 그럼 일을 끝내 볼까요?”
“오늘은 다른 의뢰는 없으니 이것만 처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는 헤센 경을 빤히 보았다. 그는 부담스러운 내 시선을 외면하며 서류를 뒤적였다.
그렇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그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왜, 왜요! 아가씨 왜 그렇게 보십니까!”
“헤센 경. 나 너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안 됩니다.”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내가 뭐 어디 나간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
“우리 정원에 나들이 가요.”
이럴 때 좀 나가서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지.
소풍처럼 도시락 싸서 정원에 햇빛이라도 받아야 숨통이 좀 트일 것 같았다.
“또 그러다가 마주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에이, 또 설마 마주치겠어? 아직 서신도 안 보냈는데.”
자백제를 구했다는 말도 안 했는데 센 공작을 마주할 리 없지.
무슨 정보원도 아니고 의뢰할 게 넘쳐날 리도 없지 않은가.
“괜찮아요. 가요, 가!”
정원에 소풍하러 가는 건데 거참.
“음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물어요. 헤센 경이 싸 와야죠. 나는 실종된 상태라서요.”
나는 활짝 웃으며 망토를 뒤집어썼다.
헤센 경의 표정이 상상되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혼자 신이 난 채 뒷문으로 나가서 정문으로 가려는데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서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와서 꽂힌다…….
뭘까, 이 기분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팔짱을 끼고 빤히 나를 보고 있는 에드가가 있었다.
“헉.”
“내 따님께선 뭐가 그리 신나셨을까.”
“아, 아버지 오셨습니까.”
나는 공손히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 x됐다.
“아가씨! 제가 어떻게 도시락을 쌉니까!”
뒤이어 헤센 경이 손에 뭔가를 들고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아니야, 헤센 경. 그거 도로 집어넣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헤센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감시하라고 했더니 아주 신이 나셨군.”
“……헉!”
그제야 헤센 경도 에드가를 발견했다.
그의 동공 지진을 발견한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 그게…… 그냥 정원에 잠시 소풍이라도 가려고 그랬어요.”
“아가씨는 잘못 없습니다. 제가 막지 못한 탓입니다.”
헤센이 에드가의 눈치를 살피며 내게로 다가왔다.
“누가 뭐라 했나? 앞장서.”
“……어딜요?”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앞장서라는 건가.
나는 헤센 경의 옷깃을 잡으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소풍 간다며, 앞장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