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20)

제68화

이 일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눈앞의 남자가 결국 서로 살기 위해서 죽여야만 하는 반려라니.

나는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왜 이전엔 몰랐지?’

그때는 문양이 발현되기 전이라 그런 건가. 하긴, 원래라면 내게 문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 또한 변수일 터.

갑자기 불현듯 나타나긴 했지. 곰곰이 되짚어 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쩌면 센 공작과 마주한 뒤부터 빠르게 발현된 것은 아닐까?

반려였으니 서로의 문양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보면 그럴듯했다.

“그런데 자백제는 단가가 꽤 높습니다. 구하기도 어렵구요.”

나는 천천히 입을 떼며 센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다소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 영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센 공작은 내 말에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다는 거구나. 도대체 센 가문에 자금이 얼마나 되길래?

자백제를 아주 많이 구해 달라는 것은 적어도 열 개 이상 많게는 몇십 개일지도 모른다.

“쓰는 용도야 저희가 묻지는 않겠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수록 의뢰 가격은 배 이상으로 뛴다. 게다가 자백제는 요즘 들어 잘 사용하지도 않는 약품이었다.

“이번 의뢰는 계약서를 더 쓰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비밀 유지 조항 뭐, 그런 건가.”

그가 살짝 고심하듯 눈을 굴렸다. 그러나 의뢰를 철회하진 않을 것이다.

어쩐지 그가 뭐에 쓰려는 건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쪽도 문양 보유잡니까?”

“대답해야 할 의무가 없으니 하지 않겠습니다.”

헤센 경이 끼어들며 센 공작의 말을 막아섰다. 더 자연스럽게 둘러댈 수도 있었으련만.

나는 나서지 않고 망토에 얼굴을 숨긴 채 미소를 머금었다.

센 공작은 잠시 내 반응을 기다리더니 아무런 응대를 하지 않자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예민한 질문이었나 봅니다.”

센 공작이 웃으며 한 발 물러섰다.

“아가씨께 선물 받았어요. 정보를 의뢰받고 있으니 홍보로는 좋을 테니까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오는 이들마다 액세서리를 보게 될 테니 돈 안 들이는 홍보 방법으론 딱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헤센 경이 눈썹을 들썩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 그럼 계약서 잘 읽어 보시고 서명하세요.”

“좋습니다.”

나는 준비된 계약서를 꺼내 들고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가 사항은 공작저로 보내겠습니다.”

“기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죠? 걱정 마세요. 들어오는 즉시 보내 드릴 테니.”

센 공작은 이내 선금을 내어 놓고는 서명을 하곤 계약서를 품속에 넣었다.

“아,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건 좀 개인적인 거라.”

나는 그의 말에 안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나를 향한 진득한 시선으로 곳곳을 훑고 있었다.

기분 나쁜 시선에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말씀하세요.”

“그대의 이름이 궁금합니다.”

“죄송하지만, 알려 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벨루아 가문에 소속된 사람으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어서요.”

나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곤 인사를 하곤 방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찝찝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 * *

안으로 들어온 나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두 손을 모으고 이마에 얹은 채 꽤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걸 알려? 말아?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헤센 경이 내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뇨, 괜찮지는 않아요. 지금 굉장히 좀 충격적이어서.”

“센 공작이 뭐라도 한 겁니까?”

헤센 경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오해의 요소는 없앴다.

뭘 한 건 없지만, 존재 자체가 내겐 위협이 되긴 하지. 그건 그도 마찬가지일 테고.

“……아버지에게 급히 서신을 좀 넣어요.”

“뭐라고 넣을까요?”

입술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 반려를 찾은 것 같다고 알리세요.”

“……반려요?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아가씨 문양이 생기신 겁니까?”

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말을 뱉어 버렸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헤센 경을 내 손목에 있는 액세서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눈치챈 모양이네.

나는 천천히 액세서리를 벗겨 냈다. 그러자 조금 더 선명해진 붉은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알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알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혹여나 죽이면 곤란하잖아요.”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는…… 아니실 거라 믿어야죠.”

방금 살짝 망설인 것 같은데.

하지만 누군가는 알고 있어야 내 안전을 보장할 테니, 알아야 한다면 가족인 에드가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 범인 역시 센 공작일 확률이 높았으니 찾기도 쉬울 테고.

“혹시, 리온은 언제 오는지 알아요?”

“아……. 저는 잘 모릅니다. 에드가 백작님께서는 알고 계실 테지만.”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에드가가 없을 때 집무실을 뒤져 보면 나오려나.

리온이 오는 날을 알지 못하니 미리 알고 있는 게 편할 것 같았다.

* * *

“에드가 백작. 그대가 이리도 유능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습니까.”

황제는 제 앞에 꿇려진 사람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에드가는 한결 여유로운 얼굴로 황제 앞에 섰다.

그도 예상하진 못했다.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그러나 문양 사냥꾼을 잡아 온 에드가를 황실로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제 딸 제니스와 따로 만남을 했다고 전해 듣지 않았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황제는 가만히 에드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 알현을 요청했을 터.

그날 이후 독대는 처음이었다.

그는 과거의 일이 떠올라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드가는 저를 보며 어떠한 두려움도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제 딸은 제가 알아서 찾겠습니다. 그러니 벨루아 가문에 대한 관심은 거둬 주셨으면 합니다.”

“……딸이 실종되었으니 모두가 함께 찾는 게 도움이 되지 않나?”

“벨루아 가문의 일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찾는다고 하기엔 꽤나 거친 것 같습니다만.”

에드가는 그림자가 가져온 델테르의 개 흔적을 바닥에 던졌다.

“이게 뭔지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예상하건대 황태자 전하의 개들이 제 딸과 비슷해 보이는 여자를 쫓다 이런 변을 당한 게 아닐지.”

“하하하하. 에드가 백작. 망상이 심하군. 황실에선 엘르 나타시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앞으론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황실에선 더는 수색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로 인해 자네 딸의 목숨이 위험해질지라도?”

“그렇습니다.”

에드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알현실을 가득 메웠다.

“가족은 건들지 않는 게 좋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감히, 자네가 날 협박하는 건가?”

“뭐 그렇게 들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한 번 더 제 가족을 위협하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허어.

에드가의 눈빛을 보니 진심이었다. 그는 제 입으로 반역이라도 하겠다고 재잘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아, 델테르 황태자가 제게 한 일은 발설하지 않겠으나, 사냥꾼에 대한 공은 벨루아 가문에서 가져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황제는 흔쾌히 수긍했다. 그깟 문양 사냥꾼이 대수겠는가.

에드가가 마음만 먹고 제게 맞서기 시작하면 곤란했다.

최대한 마찰을 피하는 것이 이로웠다.

왕비가 두 눈을 부릅뜨고 여전히 제 목을 조르고 있었으니까.

“아, 자네가 보기에 어떤가? 제니스 황녀 말일세. 꽤 잘 컸지 않은가.”

황제의 말에 에드가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데펠로아를 닮아서 그런지 꽤 외모가 출중해. 그러고 보니 자네도 꽤 부인이 생각나겠군. 제 어미의 피를 이어받아 은발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턱을 매만졌다.

“셀리느도 꽤 닮았지 않은가. 나는 볼 때마다 데펠로아가 생각이 나거든.”

황제의 말에 에드가의 눈빛에 날이 서렸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참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는데, 참 아쉽네. 벨루아 가문의 능력은 매번 봐도 탐이 나서 말이야.”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는 황제를 빤히 응시하던 에드가가 픽 하고 웃었다.

“제니스 황녀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사랑을 주는 아버지로 충분하네.”

퍽도 뻔뻔한 말에 에드가는 연신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사촌이라 그 누가 예상이나 하겠습니까. 제 어미를 죽이고, 저를 그곳에서 살게 한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자네 걱정이나 하는 게 좋겠군. 벨루아 가문은 변방에서 숨을 죽인 채 살아가는 게 잘 어울리니 명심하게.”

황제는 에드가에게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알현실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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