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이제 가는 게 좋겠습니다.”
리온은 제니스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후 그녀에게 말했다.
“저…… 못 가요.”
그러나 제니스는 의외의 말을 뱉어 냈다. 잘도 왔으면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는 감정 하나 묻어나지 않는 눈빛으로 제니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건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음성에 제니스의 몸이 잘게 움찔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지금 제가 없어진 걸 알면 당신도 곤란해질 거예요.”
“그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리온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저가 없어진 것과 무슨 상관이라고.
“제 손목에 있는 문양. 델테르가 모를 것 같나요?”
이야기해도 좋을 건 없을 것이다. 리온은 제니스의 말에도 잠자코 있었다.
제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제니스가 애원하듯 리온에게로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그냥, 절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요. 바라는 건 그거뿐이에요.”
“……하.”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가는 사람이지 않은가.
문양에 이끌려서 왔다고 해도 결국 발을 옮기는 것은 스스로였다.
“다시는 막무가내로 행동하지 않을게요.”
제니스는 다시 한번 리온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더 하면 흔들릴 것 같았다.
저번에도 그렇게 넘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 여겼다.
리온은 날이 선 눈동자로 제 손을 잡고 있는 제니스의 손을 보았다.
“당신은 참…… 저번부터 함부로 저를 대하는군요.”
멋대로 입을 맞추고, 또다시 손을 잡고 있지 않은가.
저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리온은 다른 이가 제 몸에 손대는 것이 소름 끼칠 만큼 싫었고, 지우고 싶은 감각처럼 와 닿았다.
오직 엘르만이 저를 안을 수 있었고, 취할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제니스의 손을 잡아 제게서 떼어 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이대로 버티고 설 것이 뻔했다.
하는 수 없이 리온은 황실로 앞장서 걸었다.
* * *
“곤란하네.”
황궁의 경비들이 심상치 않았다.
섣부르게 움직이기보다 잠시 대기하는 게 나아 보였다.
리온과 제니스가 숨을 죽이며 황궁의 건물에서 경비들을 응시했다.
이내 제니스가 툭툭 리온을 쳤다.
“뒤쪽으로 가서 방으로 가요.”
“……알겠습니다.”
리온은 제니스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열려 있는 방 창문으로 제니스가 들어서는데 순간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헉!”
황급히 제니스가 리온의 손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당기며 떨어졌다.
“……미안해요.”
그녀는 제 위로 바닥을 짚고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 리온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급한 마음에 잡아당기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리온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곤 창밖을 보았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저, 잠시……!”
이대로 간다고? 아직,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좋을 텐데.
이제 가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지 않나.
그 생각을 하자 제니스는 아쉬운 마음에 리온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의 불쾌한 눈빛이 제게 고스란히 닿았지만, 외면했다.
“그게, 그러니까…….”
제니스가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생각해 내려는데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도 없이 다소 급한 모양새로 델테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니스”
불안한 눈동자가 황급히 방 안을 살폈다.
“얌전히 있었던 모양이군.”
그녀는 델테르의 방문에 기분이 퍽 상했다.
“……네, 전하. 나가지도 못하게 문을 단단히 잠그셨잖아요.”
“무슨 일 있나?”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래?”
그러나 델테르는 곧장 문을 닫았다.
당황한 제니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주변을 살피는 델테르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델테르는 제니스를 지나쳐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오늘은 문 잘 걸어 잠그고 자는 게 좋을 것 같군.”
“……네, 알겠어요.”
힐끔 주변을 봤지만 리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 *
“으아아아아!”
온몸이 찌뿌둥해. 나는 기지개를 켜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좀 다르니까?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한 후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변장을 해 놔야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꽤 재료를 많이 놔두기도 했고, 계속 여기에 박혀 있으면 정신이 피폐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슬그머니 문 쪽으로 다가가 슬쩍 열었다.
“흐음, 이 시간에는 괜찮겠지?”
낮에는 시녀들도 모두가 바쁘니까. 변장을 했으니 시녀인 척하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끼이익-
오래된 문이 열리고 상쾌한 공기가 코로 들어오는 순간 쿵하고 뭔가가 문 앞에서 쓰러졌다.
“……이게 뭐지?”
커다란 두 검은 형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발로 툭툭 치며 생존 여부를 확인하자 움찔거리는 게 아니겠는가.
“뭐, 뭐야.”
황급히 문에서 떨어진 나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 눈에 보이는 막대기로 쿡쿡 찔렀다.
“누구길래 여기서 자고 있는 걸까.”
자는 건 맞겠지?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문을 다시 활짝 열고는 밖으로 나가 이들을 확인했다.
붉은 안대?
“……설마, 에드가의 그림자?”
이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황당함에 두 사람을 빤히 보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커헉!”
“으으으…….”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정신이 들었는지 두 사람이 꿈틀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딱 하고 시선이 마주했다.
뭐, 안대를 쓰고 있으니 그건 착각이겠지만…….
어쨌든 둘은 잠시 멈칫했다.
“저 왜 여기에 계세요?”
“당신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나? 크윽. 아, 아가씨?”
화들짝 놀란 그림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두 남자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과 대치 아닌 대치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에드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이 왜 여기에 있지?”
“이 사람들 그림자 맞죠?”
에드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이내 물음표를 띄웠다.
“아버지가 저 지키라고 보냈어요?”
“내가?”
에드가의 눈빛을 보니 아닌 모양이다.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을까.
“네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나?”
“제가요?”
나와 아버지는 연신 서로 질문을 하며 의아한 눈동자를 했다. 그럼 둘 다 상관없다는 건데.
그럼 대체 이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발로 차 버릴 뻔했다. 툭툭 건드리긴 했어도…….
“죄송합니다, 백작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
꽤 강한 마나를 지니고 있는 이들을 굴복시킬 자라면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터.
그 생각을 하자 리온이 떠올랐다.
‘아, 아버지가 보낸 이들의 기억을 지웠구나.’
어쩐지 일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감시하러 오신 건가.”
내 말에 에드가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 따님의 목숨을 위해 황실에 거래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저도 같이 가요?”
“그럴 리가. 아무리 변장을 했다지만, 벨루아 가문에서 신원도 보증이 되지 않은 자를 또 보호할 수는 없으니까.”
칫. 안 통하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얌전히 있었으면 하고 경고차 온 것이다.”
“알았어요, 정말로 오늘은 얌전히 있을게요.”
에드가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 듯했다.
* * *
에드가가 공작저를 나선 후 나는 더욱 심심해졌다.
“아가씨, 오늘은 저와 산책이라도 가는 게 어떻습니까?”
헤센 경이 말동무가 되어 주긴 했지만, 그것도 사람이 재밌어야 즐겁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방에서 나오려 했다.
그러나 곧이어 누군가가 정보상을 찾아왔고 나의 작은 일탈은 무산이 되었다.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제가 맡은 일인데 해야죠.”
“그게…… 찾아온 이가 센 공작입니다.”
“센 공작이 왜요? 또 부탁할 게 있는 건가.”
뭘 그렇게 몰래 할 일이 있다고. 에드가가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을까.
“변장도 했으니 별일 없지 않을까요?”
“그럼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래요, 그게 낫겠어요.”
나는 망토를 뒤집어쓰곤 센 공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곧이어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쩐지 얼굴이 그때와는 달리 좋지 않은데.
이번엔 또 어떤 의뢰를 할까.
“어서 오세요, 에드가 백작님을 대신하는 대리자입니다.”
“……대리자라. 엘르 영애가 사라지니 이제 다른 이를 쓰는 건가.”
센 공작이 턱을 느긋하게 쓸며 자리에 앉았다.
“어떤 의뢰를…….”
쿵, 쿵.
“아 별건 아닙니다. 자백제를 구하고자 합니다.”
“……자백제요?”
센 공작은 액세서리를 착용한 채 턱을 괴어 나를 응시했다.
“네, 그것도 아주 많이.”
“……알겠습니다.”
쿵. 쿵.
계속해서 심장이 요동쳤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풍겨오는 체향에 어지러웠다.
‘아 X발, 이게 뭐야?’
이 더러운 기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던 생경한 감각.
나는 곧바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새끼가 바로 내 반려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