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어색한 기운이 둘 사이를 에워쌌다.
리온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훔치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
“달아.”
너무 달아서 연신 먹어 치우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다.
살짝 풀린 눈과 붉어진 얼굴이 잘 읽은 복숭아처럼 보여서 베어 물면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메울 것만 같았다.
리온은 멍하니 있는 엘르의 뺨을 가볍게 쓸고는 품 안에 다시금 가뒀다.
“달아서, 눈이 부셔서. 매번 불안해.”
꿀을 훔치려 드는 벌레들이 너무 많아서, 빛을 지게 만들려는 인간들이 끝도 없이 저를 방해하지 않은가.
“그, 그런 말 좀 하지 마.”
부끄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엘르는 품에 안긴 채 웅얼거렸다.
정말로, 제가 지금 리온과 입을 맞춘 건가.
여전히 제 입술에 닿았던 감촉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제 입술을 매만지며 아까의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달콤한 꿈에 젖어 허우적거리던 엘르는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빨리 가야 해. 나 없어진 거 이미 귀에 들어갔을 텐데.”
큰일이다.
에드가의 화난 얼굴이 눈앞에 그려져 엘르의 몸이 그물에 걸려 팔딱이는 물고기처럼 튕겨져 올랐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리온이 엘르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같이 가 줄까?”
엘르에게 말하는 음색이 너무도 다정하게 들려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아니, 그러면 더 큰일 날 거야.”
“또 숨거나 도망가는 건-”
“안 그럴게. 그러니까 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에 올 때 그때 몰래 만나자.”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생각이야.”
“음…… 일단은 내 목숨이 보장될 때?”
그녀의 말에 리온의 눈썹이 들썩였다.
“안전이 보장되면 더는 숨지 않아도 된다는 거네.”
“뭐, 그런 셈이지……?”
엘르는 물음표를 띄우며 리온을 빤히 보았다. 어쩐지 그의 입가에 머문 미소를 보자 불안했다.
* * *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벨루아 가문에 도착했다.
나는 순식간에 사라진 리온의 모습에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자, 이제 어떻게 하냐는 건데.
일단은 뻔뻔하게 나가자는 마인드로 건물 안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 역시 내 존재를 알아차리면 안 되었기에 곧장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저벅저벅, 조금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복도를 조용히 울렸다.
“흐음, 다행히 아무도 없네.”
내가 없어진 걸 알았을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살며시 초조함이 여전히 내 주변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오지 않을 순 없지 않은가.
방에 가까워질수록 안도보단 불안함이 더 커졌다.
“이상한데…….”
“그래 이상하겠지. 난리가 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왁!”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둠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진짜 화들짝 놀랐다. 뻣뻣하게 굳은 목이 천천히 위로 올려졌다.
어둠 때문에 에드가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냥을 하기 위해 모습을 감춘 맹수처럼 빛나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꿀꺽.
나는 침을 삼키며 말갛게 웃었다.
“배, 백작님. 아니 아버지.”
이럴 땐 내가 가족임을 인지시켜야지. 그래야 내 목이 남아날 테니까.
안 그래도 다른 놈들이 이 목을 못 따서 안달인데, 아버지마저 노리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어딜 다녀왔을까, 내 따님께선.”
“그게…… 액세서리가 잘 팔리고 있나 궁금해서.”
“베르뎅 쥬얼리 숍에 갔다고 하기엔 시간이 꽤 늦었는데. 누가 보면 네가 직접 제작하는 줄 알겠군.”
“뭐, 제 아이디어이고 감시하는 사람으로서…… 죄송합니다.”
그래 사람이 눈치껏 빠르게 죄를 인정해야 할 때도 있는 법. 나는 곧장 잘못을 토했다.
딱-
손가락을 튕겨 내는 소리와 함께 환하게 불빛이 생겨났다.
‘오, 이런 능력도 있었던가.’
내심 아버지의 능력에 감탄하며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네게 닿았다.
“네 목을 노리는 이들이 많은 건 알 테고.”
에드가는 상체를 숙이곤 내 턱을 잡아 이리저리 보았다.
“잘 붙어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버지만 제 목을 지금 따지 않는다면 저는 안전해요.”
“말은 잘하지.”
그가 쯧 하고 혀를 차곤 손을 떼어 냈다.
이윽고 문을 열고는 먼저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뒤를 따랐다.
* * *
방안에 마련된 소파에서 얌전히 앉은 채 에드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나를 보며 침음했다.
“다른 일은 없었나?”
“어떤 일이요?”
“네 목을 따려는 이들을 마주했다든지.”
“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 가만히 계셨어요?”
“그림자를 풀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 처리를 했다고 하더군.”
“……그래요?”
나는 모른 척 시침을 뗐다. 리온이 나를 구해 줬다고 말하는 순간 사달이 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모르쇠를 시전해야 했다.
에드가는 모르겠다는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너에게 그런 힘이 있을 리는 없고, 델테르의 개들이 다른 이로 착각했을 리도 없을 텐데.”
“착각했을 수도 있죠.”
“왜지?”
“변장하고 나갔거든요.”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지금은 분장이 풀렸지만, 그렇게 생각 없이 나가진 않았다고.
“하.”
물론, 내 말에 에드가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살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에드가는 미간을 엄지로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마주치지 않았다는 건가?”
“아마도요.”
“마주치지 않았으면 않은 거지 아마도?”
“저는 못 봤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누군가 몰래 뒤에서 처리를 했다는 말이군.”
몰래는 아니고 보지 못하게 처리는 했어요.
그것도 아버지가 들으면 싫어할 인물이긴 하지만.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래도 목이 잘 붙어서 왔으니 다행이죠?”
베시시 웃으며 에드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씰룩거리며 파르르 떨렸다.
“네 반려는 찾고 있으니 좀 더 몸을 사려.”
“그럴게요, 그런데 아버지는 몸 좀 괜찮아요? 리온이 언제 와서 봐주기로 했더라.”
“그놈이 오는 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요, 방금 입까지 맞추고 왔는데.
거짓말을 하다 보니 죄책감에 심장이 콕콕 쑤셔 왔다.
“그럼 이 시간까지 뭘 하다 왔지?”
“음 시장 조사를 좀 했어요.”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시장 조사까지, 내 따님은 겁도 없군.”
“아버지를 닮았나 보죠.”
이런 뻔뻔한 부분까지. 그런데 에드가는 어딜 다녀온 걸까.
“그러는 아버지는 차림새를 보니 어딜 다녀오신 것 같은데요?”
“누가 초대를 친히 해 줘서 말이야.”
“설마 황궁에 다녀오셨어요?”
“눈치는 빨라선.”
“제니스가 이렇게 빨리 초대를 해 줬단 말이에요?”
나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도르륵 굴렸다.
부탁을 하긴 했지만, 내가 없을 때 에드가를 불러들일 줄은 몰랐다.
아버지의 건재함을 보이기만 하면 되었으니 연회가 아니어도 상관없긴 했다.
그래도 우리 쪽에서 나쁜 건 아니었으니까.
“혹시 황태자 전하도 마주쳤어요?”
“왜, 내가 사고라도 쳤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데…….”
사실 조금? 그렇긴 한데.
굳이 말했다간,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 하지 말자.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에드가의 눈치를 봤다.
델테르가 에드가의 목숨을 위협했으니 나였어도 마주쳤을 때 이성의 끈을 놓쳤을 것 같다.
“경고만 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에이, 걱정 안 해요! 그런데 무슨 경고요?”
“뭐 알 것 없다.”
어련하시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풀썩 드러누운 나는 천장을 보며 노곤해진 몸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진짜 오늘 죽다 살아났어요.”
“마주친 적 없다며?”
“아, 맞아. 그랬지. 그런데 델테르의 개들이 죽었다고 했잖아요? 그가 가만히 있을까요.”
“글쎄. 사실 나는 좀 움직여 줬으면 해.”
그렇게 말을 내뱉는 에드가의 표정에 진심이 묻어났다. 왠지 보다 보면 리온과 비슷한 부분이 참 많단 말이야.
“문양 사냥꾼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아, 그걸 좀 이용해 볼 생각이다. 당분간 떠들썩할 테니 놀라지 말고.”
“또 뭘 꾸미고 계시는…….”
“내일부터 정보상은 네가 나가서 일을 받도록 해. 분장을 하면 못 알아보는 것 같으니까.”
“숨어 있으라더니 일은 잘도 시키시네요.”
“이거라도 안 하면 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잘 아시네요.”
나는 하는 수 없이 에드가의 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할 말이 끝났는지 방을 나가기 위해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놈이 잠잠하군.”
“리온이요?”
“네가 없어진 걸 알고 눈이 돌아서 나갔는데. 조용한 게 영 이상해서 말이지.”
“리온도 나름대로 뭔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에드가는 영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