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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64/120)

제64화

“그, 자, 잠시만!”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리온의 입술을 턱 하고 막았다.

리온은 내 태도에 예상했다는 듯이 눈을 접어 웃고는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바짝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를 피하려 한껏 몸을 뒤로 젖혔지만, 리온의 단단한 두 팔은 여전히 나를 거뜬히 받쳐 냈다.

리온의 머리카락이 내 이마에 닿아 살랑이자 간지러웠다.

“나는 아직…… 그러니까.”

마음이 준비가, 아니지. 이게 아니잖아.

하마터면 휩쓸릴 뻔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나는 리온의 가슴팍을 빠르게 밀어내곤 품에서 벗어났다.

“우린 안 돼.”

“왜?”

“그러니까…… 너는 반려가 있고, 나도 반려가…….”

“반려만 없으면 되는 거지?”

그는 너무도 간단한 일처럼 말을 뱉어 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제니스와 입을 맞췄던 리온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때 본 건. 제니스 황녀가 마음대로 행동한 거야.”

“그녀도 너와 같았을 거야.”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거지.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엘르, 내가 널 알아봐.”

“……그래 그런 것 같네.”

“원래라면 너를 못 알아봐야 하는데, 신도 내가 불쌍했나 봐.”

리온은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았다 놓으며 옅게 웃었다.

“그렇게 빌었더니, 그 하나는 들어주더라고. 빌어먹을 운명이 뭔지.”

그의 눈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선명한 붉은빛을 머금고 있었던 눈동자가 이내 흑빛으로 변했다.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리온은 액세서리로 가려진 문양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다른 손목에 너와 같은 문양을 새길 수도 있어.”

“리온, 그러지 마.”

“그만큼 내가 절실해. 간절해.”

그가 내게 무너지듯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해서든 운명을 이겨 낼게. 그러니 너는 네게 가는 그 길을 막지만 말아 줘.”

“……리온.”

“그냥 그 자리에만 있어 줘도 돼. 도망치지도 숨지도 말고.”

심장이 콱 조이다 못해 통증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물기 어린 리온의 목소리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 역시 리온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데려온 것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면 내 욕심에 모든 걸 망쳐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저 살고 싶어서 했던 행동이었는데…….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리온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뚝뚝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나도 모르게 리온을 품에 안고 울었다.

“흐윽, 흡…… 미안, 미안해.”

용기가 없어서 도망치려고만 해서. 너와 같이 이겨 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리온의 얼굴에는 나와 같은 눈물로 얼룩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한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저 슬픈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건 리온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입술이 흐르는 눈물 위에 닿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닿은 뺨 위에 열기가 서렸다. 뜨거운 숨결이 닿는 곳곳에 솜털이 곤두섰다.

눈에서 볼로,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까지.

리온은 다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눈물을 입술로 닦아 냈다. 이윽고 다다른 내 입술 위로 따스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벌어진 입술을 감쳐 물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

베어 문 리온의 입술이 한없이 달콤했다.

베어 물면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질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스르륵 눈이 감긴 눈으로 아까와는 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뻐서, 너무 좋아서,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리온은 내 허리를 꽉 껴안고는 더욱 깊숙이 내 안을 파고 들었다.

* * *

에드가는 느릿하게 제 앞에 앉아 있는 제니스를 빤히 보았다.

“그래서, 황녀께서는 나를 이렇게 부른 연유가 뭡니까?”

“엘르 영애와 약속을 했었어요. 그리고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뭐, 불러 준 것은 감사합니다.”

에드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려 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백작님의 건재함을 알린 일이 되었으니 손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것도 맞습니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말을 끝으로 에드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에드가 백작님께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소식을 듣고 곧바로 왔는지 델테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제니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제니스.”

“……황태자 전하.”

“이런 말을 고작 시종한테 들어야 하나?”

“굳이 제 손님을 알릴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제니스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벨루아 백작과 델테르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곧장 찾아올 줄은 몰랐다.

“황태자 전하께서 워낙 바쁘시니 제 일을 일일이 고하지 않았습니다. 나름의 배려였어요.”

그녀의 말에 델테르의 입가가 씰룩였다.

둘의 모습을 본 에드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관망했다.

‘이런 곳에서 제니스도 골치가 아프겠군.’

그는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며 연신 미소를 머금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저를 보고도 할 말이 없으신가 봅니다.”

에드가의 입이 그제야 떨어졌다. 델테르의 시선이 천천히 제니스에게서 에드가에게 향했다.

“내가 환영의 인사라도 해야 하나?”

“그건 아니지만.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그의 눈매가 가늘게 뜨였다.

에드가에게 한 짓이 있었으니 에드가가 제니스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소문과는 달리 꽤 건강해 보이는군, 다들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네.”

“그렇습니까.”

에드가는 턱을 매만지며 낮게 웃었다. 퍽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는 게 뻔히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델테르와 마주 섰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곧 황실에 선물 하나가 갈 겁니다.”

“……선물?”

“한 가지 더.”

에드가는 델테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 딸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네가 아끼는 황녀도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에드가 백작.”

으득. 이가 갈렸다.

델테르는 주먹을 꽉 쥐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가 제게 하는 말은 경고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럴 생각으로 입 밖에 내뱉은 것이다.

“알아들었을 거라 믿지.”

“지금 한 말은-”

“이런 말 따위로 반역이라 치부한다면 서운하지. 반역이란 건 말일세……. 이렇게 시시한 것이 아니라네.”

에드가의 말에 델테르의 몸이 굳었다. 그럼에도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했다.

긴장이 되다 못해 잔뜩 힘이 들어가 분노로 뒤덮였다. 눈앞이 핑하고 돌더니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에, 에드가 백작님.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는 게 좋겠어요.”

제니스는 황급히 델테르의 손을 잡으며 입을 떼었다.

살기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입술을 콱 깨물며 참아냈다.

‘에드가 백작을 내가 불렀으니 어떤 상처도 입어선 안 돼.’

그 사실을 리온이 알게 된다면 원망은 고스란히 내가 떠안게 될 테니까.

그건 싫었다. 엘르에게 미움 받는다는 것은 곧 리온에게 받는 것과 같았다.

지금까지는 엘르가 제게 적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델테르가 에드가에게 해를 가한다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제발, 조용히 보내 줘요. 전하께서도 소란스럽게 되면 좋을 게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있어요. 제가 에드가 백작을 초대했다는 거.”

“……아버지가 알고 있다라.”

델테르는 맥이 탁하고 풀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보고 행동하는 걸까.

그는 결국 살기를 거뒀다. 에드가는 픽 하고 웃더니 제니스와 델테르를 보며 말했다.

“제니스 황녀님, 이곳은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

제니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다른 이들에게 들었던 것과는 어조가 달랐다.

저를 안쓰럽게 보고 있는 에드가의 눈빛에 왠지 위로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엘르 영애는 사랑받고 있구나. 저런 사람 곁에서…….’

제 아버지와는 다르지 않은가. 에드가를 보자 또다시 욕심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이만. 다음번에도 이야기할 친구가 필요하다면 찾아 주십시오.”

에드가는 제니스를 향해 싱긋 웃고는 응접실에서 벗어났다.

델테르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제니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행동을 한 거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아니요,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아.

꾹꾹 화를 눌러 담아도 끝이 없었다. 이 둘은 에드가가 제니스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제니스가 에드가의 조카란 것은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으니까.

“저, 전하. 큰일이…… 아. 황녀님과 함께 계셨군요.”

황급히 델테르를 찾던 시종이 제니스를 발견하곤 목을 가다듬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시종은 힐끔 제니스를 보다 델테르에게 다가와 서신 하나를 건넸다.

모든 글을 읽어 내려간 델테르는 종이를 와락 구기곤 소리쳤다.

“당장 안내해.”

감히 누가 내 기사들을 죽였단 거지?

단 한 명도 살아 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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