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차는 돌고 돌아 비밀 공간에 도착했다.
에드가가 내게 숨어 있는 동안 정보상의 역할을 맡길 계획이라고 해 더욱 놀랐다.
에드가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
“……헤센 경은 알고 있었어요?”
“아뇨,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아가씨가 여기로 올 것이란 말을 했습니다.”
하 정말.
이럴 때 보면 내 아빠라 해도 무섭단 말이지.
“원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요. 그래서 잘나신 내 아버지는 무슨 계획이시려나.”
“저 또한 알고 싶습니다.”
헤센 경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따뜻한 차를 내어 줬다.
왠지 그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져 더는 말을 걸기 어려웠다. 우린 한동안 말없이 차로 목을 축이기만 했다.
* * *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긴 했지만, 역시 내 방이 아니라 그런지 불편했다.
나는 뒤척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온은 괜찮을까……?”
말을 하지 않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이라도 서신을 보내면 괜찮을 테지만.
그걸 에드가가 허용할 리 없지 않은가.
“불안해, 불안한데…….”
할 일이 더럽게 많다.
일은 대체 언제 받은 걸까.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일일이 서류를 읽어 봐야 했다.
“이건, 불법이라 안 되고, 이건 위험해서 불가능해.”
온갖 범죄에 관련된 일까지 들어와 버려서 그걸 걸러내는 것만 해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것만 같았다.
잔뜩 쌓인 서류를 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래서야 갇힌 채 일만 하다가 시간 다 보내겠는데?
나는 아득해지는 기분에 머리를 짚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니 손목을 가리고 있던 액세서리도 책상에 내려놓았다.
다행히 에드가가 베르뎅의 서신은 전달해 주기로 해서 사업은 차질이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사교계에 퍼지게 되면 한동안 시끄러워질 게 뻔했다.
액세서리의 공급이 적어질 것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는 물건의 가치를 더 높여 줄 것이다. 사교계의 사람들은 어차피 희소성에 열광하는 법이다.
“호오, 이거 괜찮겠는데?”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분장 도구는 준비가 되었으니 필요할 땐 몰래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베르뎅에게 서신을 써야겠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용하라고 말이야.”
그 생각을 끝낸 나는 빠르게 서신을 써 문 앞에 두었다.
어찌나 빠르신지 소통할 수 있는 곳까지 마련해 둔 것이 아니겠는가.
“나가게 되면 꼭 따져야겠어. 어디서부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야.”
아니지 나도 에드가의 말대로 가만히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 언제부터 말을 잘 들었다고.
나는 짧게 웃고는 곧장 변장에 필요한 약품을 입 안에 넣었다.
* * *
리온은 기척을 숨긴 채 센 공작저로 침입했다.
그의 손목에 있었던 붉은 문양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문양 사냥꾼을 찾은 이유가 뭔지 알아야겠어.’
제 손목에 있는 문양 때문이라곤 하긴 했지만,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는 뭔가 다른 걸 원하고 있었다.
리온이 잡아 온 그들은 제대로 된 문양 사냥꾼도 아니었거니와 진짜는 저였으니까.
“붉은색 문양.”
그의 손목을 확인했어야 했어.
리온은 쯧 하고 혀를 가볍게 차곤 숨을 죽였다.
“센 공작의 손목에도 있었지.”
기억을 되짚어 보니 확실했다.
그가 있을 만한 집무실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자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엘르 나타시아가 사라졌다지?”
센 공작의 말을 들은 리온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다.
‘소식이 빠르군, 벌써 다 퍼진 건가?’
그렇다면 좀 더 찾기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센 공작의 표정이었다.
기뻐하는 얼굴이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이 웃었다.
둘은 마치 골칫덩이를 해결한 것 같았다.
리온의 눈빛이 분노로 물들었지만 그와 다르게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갔다.
센 공작은 창문을 열고는 바람을 한껏 만끽했다.
“곤란하게 됐군. 문양 사냥꾼 놈들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잡히기나 하고 말이지.”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의자에 앉았다.
기뻐하는 모습 반면에 짜증이 뒤섞인 느낌이었다. 뭔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은 게 있는 것처럼 보였달까.
“문양이 발현된 것이 분명한데. 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걸까.”
“정말 그분이 반려가 맞습니까?”
“내 생각엔 그래. 그녀가 확실해.”
센 공작은 의자에 몸을 기대곤 한숨을 내쉬었다.
문양이란 단어에 리온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반려?
그가 앞서 말했던 것을 되짚어 보면 그걸 분명 엘르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정말로 엘르가 센 공작의 반려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을 듣고 있는 제 자신이 싫었다. 귀를 틀어막고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센 공작은 시종을 향해 물었다.
“그래, 아직 벨루아 가문에서 다른 움직임은 없던가?”
“잠잠합니다.”
“……이상하군. 딸이 사라졌는데도 신고 외에 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좀 더 주시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딸과 사이가 좋다고 들었는데, 그 또한 거짓된 정보란 건가.
하긴 제 딸의 손목에 문양이 나타났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사라졌다고 한들 관심이 있겠는가.
센 공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알 만한 집안이군. 그러니 황실과 척을 졌겠지.”
변방으로 쫓겨나간 주제에 쓸데없는 힘을 가져선. 그러니 처리하기 곤란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스스로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제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그런데 공작님, 정말 괜찮을까요?”
그러나 시종은 불안한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벨루아 가문이지 않은가. 황실에서도 제거하지 않고 변방으로 보낸 것은 이유가 있을 터.
센 공작은 그의 감정을 읽어 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괜찮지 않을 것도 없지. 게다가 그 여자가 사라졌다면, 내 쪽에선 더 좋은 일이기도 하고.”
센 공작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발을 까딱였다.
그제야 시종이 안도한 얼굴로 입을 떼었다.
“공작님 사실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황태자가 은밀하게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황태자가?”
“네, 그림자가 움직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호오.
센 공작은 흡족한 얼굴로 더욱 환하게 웃으며 목을 축였다.
“엘르 나타시아, 그 여자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군.”
정말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들 움직여 주니 편하지 않은가.
센 공작은 제 손목에 있는 액세서리를 보며 코웃음 쳤다.
“이런 걸 만들 생각까지 하고 꽤 똑똑한 여자였는데. 내 반려로서는 적합했지만, 죽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그녀도 이해하겠지.”
붉은 문양. 제게 나타난 것을 알고 얼마나 절망했던가.
반려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을 하다 문양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를 찾아내 부탁을 하려 했건만 사라져 버리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양 사냥꾼, 그래 그자가 아니었으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지. 고마워해야겠군.”
센 공작은 웃으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쳤다.
* * *
이 모든 것을 들은 리온은 당장이라도 센 공작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엘르를 찾아야만 했으니까.
엘르의 반려가 누구인지 알아냈으니 급할 건 없었다.
그저 목숨을 조금 더 이어 가는 것뿐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리온은 시종이 방을 나서자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인사하고 싶진 않았는데.”
리온은 책상을 가볍게 쓸며 센 공작의 앞에 섰다.
“너, 너는…….”
“쉿, 소리를 지를 것까진 없을 테니 걱정 마.”
그의 눈동자에 스며든 광기에 센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제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지금은 다른 급한 게 있어서 죽이지 못하지만, 그냥 가기엔 아쉬우니까.”
리온은 센 공작의 손목을 잡고는 싱긋 웃었다.
액세서리를 빼어 낸 그가 붉은 문양이 그려진 것을 확인하곤 귓가에 속삭였다.
“주제를 알아야지. 네놈이 엘르의 반려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으드득.
리온의 손에 의해 액세서리가 무참히 부셔졌다.
“그러니 너는 얌전히 죽음을 기다려야 할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네놈이 그녀와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네가 그녀의 반려도 아니면서! 난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잘못되었나?”
“……잘못된 건 없지. 다만, 상대가 엘르란 게 잘못이야.”
리온은 센 공작의 다른 팔에 칼로 똑같은 문양을 그려 넣었다.
“으, 으아아아악!”
“아파? 고통스럽나? 잊지 마. 다시 찾아올 테니까. 엘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명을 단축하는 일일 거다.”
센 공작의 다른 팔에도 피가 새어 나와 문양을 물들였다.
“헉, 허억. 그, 그만.”
센 공작이 애원하듯 리온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그에게서 떨어진 리온이 손을 뻗어 중얼거렸다.
“넌 오늘 날 본 적이 없는 거다.”
그 말을 끝낸 리온은 바람처럼 센 공작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윽, 이게 대체 뭐지?”
내가 미쳤었나? 문양의 부작용인가.
센 공작은 제 손목에 남겨진 피로 물든 문양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