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내가 지금 뭘 본 걸까.
마치 두 사람의 밀회를 목격한 것만 같았다.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리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더없이 친밀하게 맞물린 입술이 보였다.
리온은 눈을 채 감지도 않고 저를 응시했다.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도 리온도 다른 행동은 하지 못했다.
주춤 주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 채 두 사람을 빤히 보았다.
‘발이 안 떨어져.’
두 발이 바닥에 묶인 것처럼 꼼짝을 않았다.
제니스가 리온의 이상함을 깨달았는지 밀착했던 몸을 떼어 냈다.
그러곤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에, 엘르 영애.”
당혹스러워하는 얼굴과 함께 그녀는 리온의 옷깃을 꽉 쥐었다.
나는 말없이 둘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얼굴에 그려 넣었다.
“죄송해요, 제가 방해를 했나 보네요.”
“그게 아닙니다. 엘르, 이건……!”
리온이 제니스를 다급히 떼어 놓으며 내게로 왔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되는 게 올바른 일이겠지.
나는 짐짓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은 선택을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그랬는데,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끔찍하게 다가왔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게다가 내게 문양이 생겨 버린 지금 한 줌의 희망마저 사라져 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픽 하고 웃으며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두 사람 보기 좋네요.”
내 말에 제니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얼굴에 홍조를 띠곤 수줍어하는 모습이 정말로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다.
“오늘 이렇게 부른 것은…… 황녀님께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예요.”
“뭐든 말만 하세요.”
제니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여전히 리온을 향해 있었다.
“황녀님께서 연회를 여시고 벨루아 가문을 초대해 주시면 됩니다.”
참 별거 아니죠?
나는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 역시 최선을 다해 대접해 드릴게요.”
“괜찮아요. 저 역시 목적이 있으니까요. 이미 보답은 받은 것 같은 걸요?”
제니스의 말에 리온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눈동자가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보답이라…….
리온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됐다는 건가?
나는 더는 묻지 않고 힐끔 시계를 보았다.
“그럼, 좀 더 즐기다 가세요.”
“엘르, 아니 엘르 님.”
리온이 황급히 나를 불러 세웠지만, 끝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나는 멍하니 정원에 앉아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왜 그렇게 청승맞아?”
기척도 내지 않고 온 걸 보면 참 대단하다고나 해야 할지. 그래서 에드가답다 해야 할지.
고개를 뒤로 젖혀 보니 에드가의 얼굴이 뒤집혀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실없이 웃기는.”
에드가는 내 옆으로 다가와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망치듯 응접실에서 나와 정원에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또 발견한 걸까.
“못 본 척할 수 없어 온 것이니 감동받을 필요는 없어.“
“어련하시겠어요.”
그럼 그렇지.
나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시큰둥한 눈빛으로 에드가를 보았다.
보아하니 좀 살 만한 모양이네.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아무래도 내가 잠든 사이 내 따님께서는 더 건방져지신 모양이군.”
“뭐 새삼.”
이렇게 영양가 없는 대화도 오랜만이고, 나쁘지 않았다.
“제니스 황녀는 아까 보니 돌아간 것 같던데.”
“그래요? 생각보다 일찍 가셨네요.”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망치는 길은 걷지 말아라.”
“지금 제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나는 놀란 눈동자로 에드가를 보았다. 죽었다 살아나더니 철이 들었나?
그것도 아니면 아직 다 안 나은 거 아니야?!
“네 녀석은 그게 문제다. 감정을 다 드러내면서 잘 숨긴다고 착각하는 거 말이다.”
에드가는 내 이마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한 번을 안 지지.”
그가 눈썹을 긁어 올리며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백작님도 일어났으니 일단 벨루아 가문의 일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요.”
“어디라도 갈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군.”
나는 손목을 매만지던 것을 멈추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문제가 생겼어요.”
이걸 당신에게 말해도 될까? 나는 아직도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료했다.
에드가는 내 아버지였고,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그러니 밑져야 본전이지 않겠는가.
나는 얼굴을 손에 묻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녀석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꽤 심각한 것 같은데.”
에드가는 손을 들어 숨어 있던 기사들을 물렸다.
“……와, 계속 감시하고 있었으면서!”
나는 오소소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놓고 우연히 발견한 척하다니.
에드가는 내 손목에 있는 액세서리를 응시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천천히 그의 손에 의해 풀린 액세서리가 툭 하고 땅에 떨어지자 지워지지 않은 문양이 드러났다.
아니, 지워질 수 없는 문양이 맞는 말이겠지.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거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붉은 문양의 존재를 믿고 싶지 않겠지.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저주의 색.
한 사람이 죽어야만 상대가 살 수 있는 죽음의 붉은 문양.
에드가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반려는 찾았나?”
“……아니요. 저도 알아차린 지 고작 하루 됐어요.”
“아는 이는?”
“없어요, 그 누구도.”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헤센 경과 디리아 역시 액세서리를 위해 그렸던 문양으로만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처음엔 그렇게 알았으니까.
그렸던 문양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졌을 지도 모른다. 지워지지 않는 붉은 문양을 깨달았을 때, 처음엔 복잡한 심경만이 들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오만이 내 눈을 흐리게 했던 걸까.
왈칵 눈물이 흘러나왔다.
왜 하필 나여야 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왜, 나는……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요? 그냥 끝까지 불행해야 맞는 건가 봐요.”
뜨거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려 손등을 적셨다. 솔직히 말해서 억울했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행복하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삶이었지 않은가.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내게 주어진 운명을 비틀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랬더니, 이젠 벗어날 방법도 없는 시련을 얻게 됐다.
어쩌면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에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엘르, 누가 그래.”
“……흑, 네?”
“네가 불행해야 한다고 누가 그랬냐고 물었다.”
“그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주어진 삶이 그러했다.
이걸 말한들, 소용이 있겠냐 싶어 나는 입을 닫았다.
“나는 널 불행하게 만들 생각이 없다.”
“……백작님?”
“내가 말했지 않았던가. 벨루아 가문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에드가의 눈에 사나운 기색이 스쳤다.
“차라리 건방진 따님이 낫겠어.”
그는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 내곤 액세서리를 주워 다시금 문양을 가렸다.
“황실에 문양 사냥꾼을 넘기는 것은 좀 미뤄야 할 것 같구나.”
“네? 하지만, 그건……!”
“아직 할 일이 남은 것 같으니 조금 미룬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그 순간 나는 불안한 예감이 들어 황급히 에드가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뭘 생각하든 하지 마세요.”
혹시, 설마.
아버지가 내 반려를 찾아내 죽일 생각이라면…… 막아야 한다.
이 일이 밖에 흘러 나가게 된다면 벨루아 가문은 더는 일어서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되지 않은 이들의 목숨도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에드가는 안심하라는 표정으로 내 손을 토닥였다.
“당분간이라도 좋으니 외부 활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그렇게 되면 의심을 살 텐데요.”
“좋은 방법이 있다.”
나는 에드가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훔쳤다.
말하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말을 잘하긴 개뿔.
마차에 올라탄 나는 벨루아 가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헤센 경과 다리아에게조차 숨긴 채, 도망치듯 저택을 떠난 나는 창문 밖으로 백작저를 보았다.
‘……미안, 리온.’
게다가 리온에게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가 알면 소란이 일겠지만 어차피 마탑으로 떠날 사람이니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주머니에 있는 보석과 지도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사라진 다음 날 에드가는 황실에 실종 신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