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저…… 리온 님 맞으시죠?”
제니스의 확신에 찬 말에 리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엘르와 시선을 마주한 지금 저인 것을 들키게 되면 좋을 게 없었다.
가만히 집에 있겠다고 했건만.
“쯧.”
리온은 제니스의 손목을 낚아채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까지 거슬리게 굴 줄은 몰랐는데.
“아, 아파요……!”
제니스는 빨개진 손목에 낮게 신음했다.
“나를 어떻게 알아본 거지?”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당연하다?
리온은 제니스의 말에 입술을 짓씹었다. 분장을 했기에 엘르 역시 제대로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제니스가 절 바로 알아봤다라.
자연스레 리온은 제니스에게서 몇 발짝 떨어졌다.
“저와 같은 문양을 가졌잖아요, 아닌가요?”
제니스의 노골적인 질문에 불쾌함마저 들었다. 왜 그리도 제 문양에 집착하는 걸까.
그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 반려가 누구인지 깨달은 지 오래였으니까.
제니스는 제 손목을 내어 보였다.
저번보다 더욱 선명해진 금빛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내게 이러진 못할 텐데.’
리온은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제니스의 손목을 잡았다.
“뭘 원하는지 몰라도, 저는 당신과 다릅니다.”
“…… 왜, 왜 달라요? 우린 운명이 짝지어 준 반려잖아요.”
제니스의 가녀린 몸이 잘게 떨렸다.
그녀의 눈에는 금세 투명한 눈물이 차올라 후드득 붉은 뺨을 타고 흘렀다.
“반려…….”
그 누구보다 반려를 없애고 싶은 사람이 저란 걸 제니스가 알면 똑같이 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겁을 먹고 도망칠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게 뭔지 아나?”
“그럼 당신은 제가 혐오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제니스는 오히려 리온에게 되물었다. 그녀의 말에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향한 매서운 눈빛만 할 뿐이었다.
“저는, 이 황실이 싫어요……. 당신이 아니면 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 제발 내 반려가 되어 주세요.
제니스는 절박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 리온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리온은 저와 반려로 이어진 제니스와 함께 있는 이 순간도 싫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제겐 엘르 나타시아 외에는 다른 이는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온통 그분 생각뿐이죠?”
저를 구해 주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준 사람이니까.
그러니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제게는 단 하나뿐인 사랑이자, 모든 것이었다.
저주를 받았음에도 온전히 저를 받아 준 엘르.
그녀가 아니면 의미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겐 아는 척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물론, 나를 아는 척도 안 하는 게 더 좋겠지만.”
리온의 냉정한 말에 제니스의 눈에는 다시금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젠장, 젠장!
마음이 아팠다.
원치 않았음에도 저는 제니스를 마음에 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제니스 역시 마찬가지일 터.
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원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
리온의 손이 절로 제니스의 얼굴에 닿았다.
‘그만, 그만해.’
이런 건,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는 달리 제 손은 제니스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 내고 있었다.
“제길…….”
“거봐요, 당신도 어쩔 수 없잖아요.”
그제야 제니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황실에 대적할 힘을 가진 리온이라면 저를 벗어나게 해 주리라.
리온은 힘겹게 제니스에게 닿은 손을 떼어 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리, 리온 님!”
제니스가 황급히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리온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엘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것인지 리온이 뒤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거지?
리본도 하지 않았는데 리온이 곧바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가.
“……리온?”
“엘르, 미안 좀 늦었지.”
“어? 아니야. 그런데…….”
나는 곧장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열면 안 될 판도라 상자 같았다.
“범인을 찾았어.”
“뭐?!”
화들짝 놀란 나는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어색하게 웃으며 리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구석으로 리온을 데리고 온 나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범인은 어디에 있어? 몇 명이나 돼?”
“그들은 백작저에 있어. 다른 이들이 찾지 못하는 곳에 모아 놨어.”
“……모아 둘 정도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말일까.
내 물음에 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손에 쥔 건 뭐야?”
리온의 말에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소매를 걷었다.
“아, 이거 네 거야.”
움찔거리던 리온이 황급히 손을 내빼려 했지만, 나는 도망가는 리온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아. 피하지 마.”
결국 리온은 내게 손을 맡겼다.
나는 천천히 액세서리를 끼워 주며 그의 손목에 드러난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자, 이러면 안 보이지?”
“……그러네.”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예 사라지지 않는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걸리자 리온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엘르, 난. 네가 내 반려였으면 좋겠어.”
“안 된다는 거 잘 알잖아.”
이미 반려는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금빛 문양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서 그를 구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볼까? 의뢰인에게 소식을 전해 줘야지.”
“잠시만, 아주 잠시만…….”
리온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난 네 눈물만 닦아 주고 싶어. 다른 이들이 슬퍼하는 걸 보면서 똑같이 아파하고 싶지 않아.”
“……무슨 일 있었구나.”
나는 리온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까 제니스와 함께 자리를 비웠을 때 이야기를 나눈 게 분명하다.
“괜찮아, 리온. 그리고 나 잘 안 울어.”
아마도……? 리온의 앞에서 운 적은 잘 없었으니까.
“그건 그렇네.”
픽하고 리온이 낮게 웃었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 * *
나는 리온과 함께 센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미소 지었다. 리온은 내 뒤에서 거리를 지킨 채 고개를 까딱였다.
“센 공작님, 연회가 끝난 후 백작저로 가시죠.”
“범인을 찾았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센 공작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스쳤다.
“역시, 벨루아 가문입니다.”
“쉿.”
이런 데서 그렇게 티 나게 기뻐하면 쓰나.
아무리 그래도 정보상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여기서 무슨 작당이라도 하는 것처럼 박혀서 뭐 하고 있지?”
“제발 저한테 관심 좀 꺼 주시면 안 될까요, 황태자 전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델테르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입매를 비틀고는 이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툭툭 털었다.
“지나가다가 뭘 묻히고 다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급하다고 아무하고나 손을 잡으면 탈이 날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만히 있던 센 공작이 불쾌한 표정으로 델테르를 보았다. 리온이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막았다.
“급체해 본 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센 공작과 나는 정보 제공자와 의뢰인일 뿐이었으니까.
“그냥,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요즘 다시 문양 사냥꾼이 기승이라기에.”
“전하께서는 문양이 없으신가 보네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시는 걸 보니까. 그런데 황녀 전하는 좀 다르지 않나요?”
내 말에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이 광기에 젖어 번들거렸지만, 피하지 않고 맞섰다.
“……그 말은 제니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여부가 있을까요?”
나는 델테르의 손을 잡아떼어 놓으며 웃었다.
“그러니, 혼자 두시면 안 되죠. 저기 홀로 계시는 것 같은데.”
내 말에 델테르의 시선이 돌아갔다.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는 제니스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엘르 나타시아,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모두가 널 주시하고 있으니까.”
“아무렴요.”
나는 아까보다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액세서리에 대한 반응이 꽤나 좋았다.
이렇게 일을 벌인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 * *
연회를 마무리 지은 나는 황급히 마차에 올라탔다.
센 공작에게는 따로 마차를 줬으니 백작저에서 만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아낸 거야?”
“뭐, 우연히.”
“우연치고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엘르, 때론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잘 떨어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해.”
리온은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손에 착용된 액세서리를 보니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다.
“곧이어 유행이 돌 거야. 그렇게 되면 너 또한 벨루아 가문의 사람이니 선물 받아 착용했다고 둘러대.”
“……그래.”
“마탑은 언제 가는 거야?”
“네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는 마치 언제 가도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마탑이 자유 입학제였던가?
그런 건 듣지 못했는데.
리온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택에 다다른 마차가 이내 멈춰 섰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이상한 느낌에 문을 열고 내리자 헤센 경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한 채 저택을 가리켰다.
“헉, 허억. 에, 에드가 백작님께서……!”
나는 헤센 경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곧장 백작저를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