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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120)

제54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냈다.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기에 미소는 계속 머금고 있었다.

‘대체 뭐야, 왜 이러는 거지?’

센 공작의 행동에 당혹스러웠던 나는 얼굴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럼 내일 봅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법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곤 유유히 백작저를 빠져나갔다.

적막이 맴도는 응접실에서 나는 힐끔 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내가 왜 리온의 눈치를 봐야 해?’

그러나 리온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아, 왜 죄짓는 느낌이야.

“리온은 뭐 들은 거 없어?”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리온에게 물었다.

“응, 난 너에게 어떠한 것도 듣지 못했어.”

리온은 내 대답에 내 앞으로 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곤 제 손수건을 꺼내 닦아 냈다.

“더러운 게 묻었네. 씻으러 가자.”

“……응?”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센 공작의 입이 닿았던 것을 더럽다고 칭한 건가?

“엘르 넌 내게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구나.”

“리온, 그게 아니라.”

“언제부터 네가 센 공작과 연인이 되었을까.”

“그건 의뢰 때문에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야. 정말로 그와 내가 연인처럼 보여?”

리온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봐 주길 원해?”

오히려 그는 내게 되물었다. 센 공작과 연인이 된다면 리온은 이런 반응일까.

뭔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이런 마음이 들어도 괜찮은 걸까.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리온,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 나한테 있어 중요한 건 너야. 엘르 너와 관련된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중요해.”

리온의 손길이 멈췄다.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내가 잠시 없던 그사이에 엘르 넌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리온……?”

“정말 나한테는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네. 나는 다 이야기했는데.”

리온은 이내 내 손을 내려놓았다.

그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잠시 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피곤해서 이만 가 볼게.”

“리온, 잠시만!”

“나도 조금 쉬어야겠어. 네 의뢰건 잘 풀리길 바랄게.”

리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손에 쥐여 준 손수건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리온이 꽤 화가 난 것 같다.

* * *

리온은 끓어오르는 분노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나를 찾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리온은 턱을 매만졌다.

센 공작이라…….

그자가 델테르가 말했던 데이트 했던 자가 분명했다.

그러니 제 앞에서 잘도 연인이니 하는 말을 지껄인 걸 테고. 저를 도발하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한이었다. 문양 사냥꾼이라니 저를 지칭하는 말을 듣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사람 하나 찾겠다고 정보상에 의뢰를 하다니.

센 공작이 뭘 숨기고 있을지 궁금했다. 꽤나 초조하여 다시 엘르를 찾은 것 같았는데.

“엘르에게 문양이…… 있었어.”

흐릿하지만 분명 손목에 문양이 있었다.

그런데 왜 제겐 말하지 않았을까.

붉은색이라면, 모두가 기피하는 색이지 않은가.

리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등을 닦기 위해 팔을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엘르의 손목에 붉은 달이 분명히 존재했다.

‘어째서, 이번에도 나와 너는…….’

제 반려는 아니었다. 리온은 금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엘르만큼은 문양이 없길 바랐다.

그래야 저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엘르의 손목에 있던 문양을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엘르가 모를 리 없어. 그런데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게 숨길 생각인 거겠지.”

어떻게 해야 엘르가 제 진심을 알아줄까.

아니, 그건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애초부터 제 손목에 문양이 나타나게 될 것이란 걸 아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발현이 된 지금 반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설마.

리온은 믿을 수 없었다. 엘르가 다 알고 있다고?

제 반려가 누구인지 알고서 제니스와 저를 붙이려 한 걸까.

그랬다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그의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문양을 가릴 수 있는 가리개를 만든 건가.”

제 문양을 숨기기 위해서. 붉은색이라면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나았으니까.

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다시 활동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는 돌아온 이후 백작저를 나간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전장에 차출된 이후 문양을 가진 이들을 습격하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 제 행세를 하고 있었다.

무슨 목적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놈이 아니라 놈들일 확률도 있었다.

“엘르에게 의뢰를 맡겼으니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되겠어.”

리온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엘르는 적잖은 충격을 먹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리온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이 났다.

‘자, 그럼 나 대신 활개를 치는 놈들을 찾아볼까.’

엘르가 찾기 전에 저가 먼저 찾아 엘르에게 알리는 것이 좋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는 김에 붉은 문양을 가진 이를 찾아내야지.

그게 만약 엘르의 반려라면 죽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으면 엘르가 죽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은 지켜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리온은 엘르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러니 엘르, 날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반려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것만큼은 막을 테니까.

붉은 문양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그만큼 살아남는 이들이 없다는 소리였다.

서로를 죽이려 하는 저주 때문에 결국 비극을 맞이하곤 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엘르와 똑같은 시기에 나타난 붉은 문양이 있다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

그래야 엘르가 살 수 있으니까.

리온은 제니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전 뭐라도 해야 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문양에 발버둥 치는 것도 지쳤다.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팔이라도 잘라 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 질긴 운명을 끊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리온은 밤하늘을 보며 낮게 웃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 또한 지옥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서.

제가 원했던 삶과는 달라서 허탈하게 느껴졌다.

* * *

나는 방으로 돌아와 씻기 위해 욕조로 향했다.

입욕제를 풀고 물에 들어가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도대체 리온은 아까 왜 그런 걸까.”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놈이라니까. 갑자기 그렇게 가 버리면 어떻게 하라고.

왜 화가 났는지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아가씨, 고생 많으셨어요.”

“응? 고마워.”

디리아가 목욕 시중을 들어주며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진짜 디리아 손길이 짱이라니까.

한결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어머, 아가씨……!”

“으응?”

디리아가 화들짝 놀라 나를 흔들었다.

팔을 부드럽게 닦아 내던 디리아가 가리킨 곳에는 내가 아까 그렸던 붉은 달이 있었다.

“아, 맞다. 이거 안 지웠었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물로 슥슥 손목을 문질렀다.

“어라 잘 안 지워지네.”

“이, 이게 뭐예요?! 붉은색이라니!”

“디리아, 이거 그린 거야.”

“네?”

그게 더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긴 붉은색으로 문양을 그리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나는 하는 수 없이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아, 액세서리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러셨구나. 하필 붉은색이라니 아가씨도 기분이 찝찝했겠어요.”

“응, 까먹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렇네.”

“그런데 이거 잘 안 지워지는 것 같아요……. 어쩌죠?”

“진짜 안 지워지면 안 되는데.”

나는 퍽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며칠이나 가겠나 싶어 놔두기로 했다.

“알아서 지워지겠지. 뭐,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저는 영 기분이 별로예요.”

“그러네. 찝찝하긴 해.”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않은가. 안 지워지는 걸 문질러 봤자 팔만 아플 것이다.

“안 보이게 노력하면 되니까 괜찮아. 다음부턴 소매가 펄럭이지 않는 드레스를 입어야겠어.”

“네! 네가 준비할게요.”

“항상 고마워. 이건 헤센 경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가요?”

디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다들 알고 있다면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붉은색 문양이 나타난 것은 아니니까.

나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이 욕조에 몸을 기댔다.

역시 따뜻한 물에 푹 담그는 것만큼 피로에 좋은 약은 없을 것이다.

“내일 센 공작과 만나야 해서 조금 일찍 나설 것 같아.”

“어머, 그럼 예쁘게 꾸며야겠군요.”

“음? 그럴 필요는 없어. 그저 일 때문에 보는 거니까.”

“그래도 대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다르잖아요!”

디리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니 하게 놔두는 것이 맘 편할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해.”

“백작님께서 조금 나아지셨다면서요?”

“응, 리온 덕분이지.”

“와…… 리온 님 멋있네요. 마치 왕자님 같아요. 뭔가 필요할 때 나타나서 해결해 주는 느낌이랄까.”

왕자는 아니지만 남자 주인공이긴 하지.

나는 디리아를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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