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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20)

제52화

긴장이 되었다. 혹시 생각하는 것만큼 나오지 않았으면 어쩌지?

그렇다면 들인 돈이 좀 아까울 것 같은데.

나는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내일이면 연회가 열린다.

그곳에서 물건을 선보이기로 했으니 완벽하게 나와야 했다.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긴장이 되는 걸요. 돈이 꽤 들어갔잖아요.”

“엘르 님. 벨루아 가문에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돈은 돈이지 않나. 아까운 것은 사실이었다.

에드가가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아먹었어?! 하고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고.

“아가씨라면 잘하실 겁니다.”

“어디서 그런 믿음이 생기신 건지 모르겠네요.”

“뭐, 지켜보니 알겠더군요.”

헤센 경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흔들림 없이 곧은 눈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정말 잘 안 되면 큰일 나겠는데.’

그렇게 어려운 공정은 아니긴 했지만, 사람이 살 만큼 이목을 끌어야 성공적일 테니까.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문양을 가릴 액세서리를 말이다.

그동안 문양은 가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었고, 반려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러니 이번 상품은 꽤 논란이 될 것이다.

때마침 베르뎅 쥬얼리숍에 도착해 비장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표정 푸십시오. 누가 봐도 긴장한 티가 나지 않습니까.”

“그래? 후아…….”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쳐들었다.

저번에 만나서 액세서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나는 자리였다.

제국 내에서도 유명한 액세서리 장인.

그가 만들어 낼 물건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첫 시도이니 불안한 마음은 들었다.

나는 천천히 쥬얼리 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딸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려한 장신구들이 나를 반겼다.

한눈에 봐도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액세서리들이 즐비했다.

‘이러니 값이 꽤 나갔던 모양이지.’

그걸 알고 나 또한 베르뎅에게 제작을 맡긴 거지만.

“아! 오셨군요?”

안경을 끼고 있던 베르뎅이 나를 발견하곤 활짝 웃었다.

그의 표정을 보니 물건이 잘 나온 모양이다.

‘와, 십년감수했어.’

나는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준비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베르뎅에게 다가가자 그가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들어가자 은밀한 공간이 드러났다. 작은 가게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작업을 하는 곳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치곤 화려하달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소파에 앉아 베르뎅을 보았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원하신 대로 나왔을지 모르겠지만…….”

베르뎅은 이윽고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처음 보는 디자인에 시선이 절로 쏠렸다.

화려한 체인과 보석으로 이뤄져 손목을 감싸고 이내 손가락 링에 이어져 고정할 수 있었다.

“신사분 버전은 보석을 뺀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가죽으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르뎅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나왔다.

장갑을 끼고 다니는 귀족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액세서리에 대한 거부감도 그리 크진 않을 터.

“착용해 보십시오.”

나는 장갑을 벗은 뒤 조심스레 착용해 보았다.

생각보다 착용감도 나쁘지 않았다. 밖에서 나갈 때만 쓴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안할 정도였다.

“어때요?”

“뭐, 아가씨께서 연회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합니다.”

“한정 수량으로만 해 주세요. 시즌마다 스타일을 바꿀 거예요.”

“예?”

“어때요? 베르뎅 쥬얼리숍에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판매 금에서 10% 드릴게요.”

“10%로 말입니까?”

“네, 제작 비용을 제외한 10%.”

내 말에 베르뎅의 눈이 홉 뜨였다. 제작 비용은 오로지 내가 다 댈 예정이었다.

사업만 성공한다면 그 정도 가격은 아무렇지 않았다.

“저야 벨루아 가문과 함께라면.”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나는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

“여기에 서명하면 오늘부터 저흰 동업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들이민 것은 비밀 유지 서약이었다. 제품에 대한 비밀을 유지하는 것.

발 빠른 사교계이다 보니 히트를 친 상품을 카피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수록 내 제품에 대한 가치는 높아지게 될 테지.

따라 하는 상품보다 훨씬 더 나은 디자인과 제품을 제공할 테니까.

베르뎅이라면 가능했다.

그는 앞으로도 더욱 유명해질 장인이었다. 그걸 알고서 그에게 의뢰를 한 것이기도 하고.

“확실히 예쁘네요.”

나는 손목 쪽을 보았다. 아무런 문양이 없어 어떻게 가려질지 예상이 안 됐다.

“아, 혹시 펜이나 뭐 그릴 수 있는 거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하필이면 빨간색이라니. 뭐, 상관있겠어?

나는 액세서리를 빼곤 손목에 달을 그려 넣었다.

“아가씨?”

“문양이 있어야 가려지는지 보죠.”

빨간색이라 영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잠시 그리는 건데 별일이야 있겠는가.

“흐음, 꽤 괜찮은 것 같죠? 가려지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그럴싸하네요.”

헤센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변형해서, 커플처럼 맞출 수 있는 원석이나 이런 걸 추가하면 쌍으로 팔 수 있어요.”

“예?”

“커플 아이템처럼. 남자들은 싫다고 해도 여자들이 살 수도 있는 거잖아요?”

두 개를 같이 팔면 딱이지.

“우선 이건 샘플로 나온 거니 시범으로 차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 주문은 서신을 보낼게요. 아 참 샘플 몇 개 더 주문한 건 내일 받을게요.”

나는 기쁜 마음으로 베르뎅 쥬얼리 숍을 벗어났다.

* * *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헤센 경이 넌지시 물었다.

“아가씨 그런데 괜찮을까요?”

“뭐가요?”

“리온 님 말입니다. 정말 믿어도 될지…….”

“헤센 경.”

나는 헤센 경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뭘 걱정하는지는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백작님이 리온에게 한 행동이 있으니 그런 거겠죠?”

“……아가씨.”

“그런 걸로 마음에 담아 둘 리온 아니니 걱정 말아요.”

그랬다면 애초에 내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저는 못 믿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가서 확인하면 되겠죠.”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작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럼, 그땐 제가 알아서 할게요.”

헤센 경이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나도 내가 리온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그래도 다른 이가 리온을 의심하는 것은 싫었다.

쫓겨난 곳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아가씨.”

“그만, 거기까지만 해요. 더는 리온을 모욕하지 말아요.”

나는 손을 들어 헤센의 말을 저지했다.

“우리끼리 이야기해 봤자 소용없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헤센은 입을 닫았다.

* * *

저택에 도착한 나와 헤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펴요.”

“아가씨도 어둡긴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헤센 경 때문이잖아요. 그만하고 들어가요.”

“……네.”

나는 헤센 경의 가슴에 상자를 툭 하고 던졌다.

둘은 곧장 에드가의 방으로 향했다. 확인을 시켜 주는 것이 마음이 편할 테니까.

‘리온도 피곤할 텐데. 좀 쉬었으려나?’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치료라니.

부탁을 하긴 했지만,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밉긴 해도 핏줄이란 건가.

괜스레 리온을 배려하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이 밀려왔다.

에드가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할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리온에게 먼저 가서 괜찮은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헤센 경의 의심 먼저 풀어 주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그는 리온을 의심할 테니까.

이윽고 다다른 에드가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인기척이 없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헤센 경이 문을 열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침입 역시 배제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저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이참에 저택에 경비를 좀 강화하지 그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헤센과 함께 들어서자 잠들어 있는 에드가와 그 옆에 엎드려 있는 리온이 보였다.

“리온 님.”

“쉿.”

나는 입술에 검지를 대며 말했다.

천천히 리온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잠들었네.”

역시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다가온 기척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순간 에드가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 아, 버지?”

지금 움직인 건가. 나는 눈을 다시금 깜빡였다.

“헤센 경, 금방 에드가 아니 아버지가 움직인 것 같아요.”

“예? 그게 사실입니까?”

헤센 경은 빠르게 다가와 에드가를 살폈다.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네, 어서요.”

나는 침대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분명 아까 떨림이 있었다.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 걸까?

믿기지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리온의 힘이 온전히 개방되었다는 것이었다.

침대에 기대어 엎드린 채 자고 있는 리온을 빤히 응시했다.

천천히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눈썹이 작게 움찔거렸다.

“고마워 리온.”

이제 정말 욕심내선 안 되는 거구나.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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