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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120)

제50화

리온과 오랜만에 나란히 걸어서 그런지 어색했다.

나는 힐끔 발걸음을 맞춰 걷는 리온을 보았다.

‘많이 컸네.’

안 본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날 찾았어?”

나는 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멈춰 섰다.

“내 서신이 안 갔어?”

“단 하나도 오지 않았어.”

리온이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봤다.

“정말 서신을 보냈어? 날 잊지 않고 찾은 거야?”

“내가 어떻게 널 잊어.”

나는 리온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래도 정이 있는데……. 사실 정이라고 애써 돌려 말한 거긴 했다.

내 솔직한 마음은……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종종 네 소식 들었어. 잘하고 있어서 안심했어.”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리온은 멍하니 나를 빤히 보았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쿵쿵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만이 들렸다.

“와, 다행이다.”

리온은 이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리본이 없어서 못 알아봤어.”

아까는 정말 착각이었구나. 리온이 날 바로 알아볼 리 없지.

“미안해.”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하면, 속상하겠지.

나는 손을 들어 부드러운 리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목 안 아파? 몰라보겠어.”

훨씬 키가 크는 바람에 목이 꺾였다.

그럼에도 리온은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비볐다.

“엘르, 엘르…….”

리온은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다.

안도하는 건가?

“그러는 리온은 왜 서신 안 보냈어? 날 잊지 못할 것처럼 굴더니.”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면서. 이렇게 단칼에 쳐낼 줄은 몰랐다.

문양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감추기엔 어려웠다.

리온은 그제야 내게서 얼굴을 떼어 냈다.

“보냈어. 나 역시 답이 오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네가 날 잊은 줄 알았어.”

“그랬구나.”

“날 버린 줄 알고…… 직접 찾으러 가려 했지.”

“어?”

“아니야. 그보다 델테르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얼굴이 좋지 않아.”

리온이 손등으로 가볍게 내 뺨에 대었다.

“아, 피곤해서…….”

“엘르. 서신을 보낸 건 내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않아?”

“눈치챘어?”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리온이 눈치를 챈 모양이다.

하긴, 델테르와 이곳에 온 것부터 이상했겠지.

사이가 좋지 않은 황실과 벨루아 가문의 사람이 함께 전시 상황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무엇보다 리온은 내가 델테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어.”

“잘됐네.”

“응? 지금 뭐라고.”

리온이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잘됐다고 하지 않았나?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는데 리온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잘 안 됐다고 그랬어. 무슨 문제가 생긴 건데?”

“그게. 나도 모르겠어. 분명 델테르가 아버지를 해한 것 같긴 한데. 원인을 모르니 치료할 수가 없어.”

“그렇구나.”

리온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에드가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달까.

“리온, 그 이야기는 들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버지가 너를 따로 만나서 협박했다며.”

“협박이라.”

“정말 미안해. 내가 만나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리온이 힘을 개방한 후 전쟁터로 갔을 것이다.

이미 문양이 완성되어 사랑을 찾아 깨달았을 테고.

하지만 제니스와 데면데면한 걸 보니 그것도 아직 인 듯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버렸어.’

이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제니스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일이 자주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게다가 델테르가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둘 사이는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기 힘들 터.

“엘르, 내가 필요해서 간 거야.”

“미안.”

그건 네가 제니스와 빨리 이어지길 바랐으니까.

사실 그러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니 강요할 수 없었다.

“난 괜찮아. 네가 날 찾아와 줬으니까. 사실 걱정했거든.”

“응……?”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꽁꽁 숨어 버릴까 봐.”

리온의 눈이 반짝였다.

생기가 돌듯 초롱초롱해진 눈동자에 뜻 모를 위화감마저 들었다.

“리온……”

“그럼, 엘르. 넌 지금 내가 필요해진 거지?”

“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필요했다. 리온이라면 에드가를 깨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하다고 해도 될까?

내가 또다시 리온의 길을 방해하는 건 아닐지 고민이 됐다.

“복잡할 거 없어. 엘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하면 돼.”

리온은 나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따스한 손이 내 두 얼굴을 감싸 안았다.

“넌 늘 내가 필요할 때 있어 줬잖아. 그러니까 너도 내게 말할 권리가 있어.”

리온의 말에 죄책감이 스르륵 사라졌다.

“필요해. 아버지를 살려 줘.”

“그래, 엘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맞는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지금 급한 것은 에드가의 생사였다.

이대로 아버지가 죽는다면…….

“미안해 리온.”

내 마음대로 널 버리고 널 찾아서.

그럼에도 리온이 흔쾌히 내게 와 준다는 사실이 기뻤다.

“미안해하지 마.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뭘……?”

“날 버리는 거 말이야. 엘르, 이젠 내가 널 안 놔줄 생각이니까.”

리온은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

“그러니 벗어나려는 생각도 하지 마.”

“리, 리온……?”

갑작스런 리온의 고백에 귀까지 빨개졌다.

“혹시, 리온. 너……”

나는 내 얼굴을 잡고 있는 리온의 손을 잡았다.

옷소매를 들추자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손목엔 내가 준 팔찌를 찬 상태였다.

어쩐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억지로 운명에 끼어 맞춰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건 신경 쓰지 마.”

“문양이 제법 선명해졌네.”

“상관없어.”

리온은 황급히 옷을 내리며 내게서 떨어졌다.

“팔찌 잘 어울리네.”

나는 리온의 손을 잡아 다시금 손목을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곳곳에 상처가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거야?”

당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리온의 손을 꽉 잡았다.

분명 힘이 개방되었다면 스스로 몸을 치유하는 힘도 있었을 터.

그런데도 이렇게 자국이 남았다는 것은…….

매일같이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팔에 자상을 냈다는 것이다.

“왜냐고 묻지 않아도 알잖아.”

리온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이 문양이 선명해질수록 너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 그게 싫어.”

“하지만!”

“운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집어치워. 엘르, 내 운명은 처음부터 너였어.”

리온의 말을 들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 슬퍼 보여서,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로 새겨지는 것 같았다.

“데이트는 무슨 말이야?”

“아, 그건…… 일단 돌아가자.”

나는 리온에게 해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질 거야.

너도 나도 그리고 제니스도.

내 마음을 리온이 알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막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폐하께서 가 보라고 하셨나요?”

“그래.”

“헛걸음하셨네요. 오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네 몸은 어때.”

델테르는 제니스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외관상으로는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델테르는 제니스의 팔을 잡아 옷을 올렸다.

“뭐 하는 거예요!”

화들짝 놀란 그녀가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문양이 선명해지고 있네.”

어렴풋이 봤지만, 금빛의 색을 띠고 있었다.

델테르는 으득 이를 갈았다.

“반려는 찾았나?”

“아직 못 찾았어요.”

“그런가.”

그는 제니스의 손목을 빤히 응시하다 이내 놓아주었다.

“반려가 나타나면 말해.”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제니스는 제 반려일지도 모를 리온을 떠올렸다.

그러나 델테르가 알게 된다면 리온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황위 때문에 이러는 건가요?”

“내가? 너한테 황위를 빼앗기기라도 할 것 같나?”

제니스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계승권에 민감한 상태였다.

그건 저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저는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고, 귀족들이 힘을 보태 주려 했다.

“그럴 수도 있죠.”

“꿈도 크군.”

델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니스의 턱을 우악스레 잡았다.

“잘 들어. 네가 황제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황후라면 모를까.”

“그게 무슨 말이죠?”

“알아들은 것 같으니 이쯤 하지. 건방지게 굴지 마. 내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제니스는 몸이 떨렸다.

그가 말하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아들었다.

“알았으니 놔줘요.”

“명심해. 나는 네게 아주 관심이 많거든.”

델테르가 제니스의 귓가에 속삭이며 웃었다.

“나눠 가지는 것보다 함께 가지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제겐 반려가 있어요.”

“반려? 착각하지 마. 제니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자가 황실을 능가하는 힘이라도 가진 이라면 모를까.”

능가하는 힘.

그것만 있으면 다 되는 일이구나.

순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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