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죄송합니다. 황태자가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어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마차에 함께 올라탄 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앞으로 장소는 저택에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뭐, 어찌 보면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네?”
“연인으로 본다면 함께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요.”
“아……!”
둘러댄 것뿐인데 다행히 나쁘지 않은 수였다.
“그럼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네, 원하시는 정보가 무엇입니까.”
“아주 귀한 정보라, 대가는 많이 드리겠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든 알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내게는 훌륭한 정보원들이 있었다.
“문양을 가진 이들을 죽인 자에 대해서 알아봐 주십시오.”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건 나도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갑자기 잠수를 타 버린 덕분에 더 그랬지만.
“상관없습니다.”
센 공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간이 상관없다고 하니 뭐, 나도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좋아요. 계약서는 곧 저택으로 발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센 공작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귀중한 손님이었으니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 * *
“괘, 괜찮아요?”
리온은 다친 제 몸을 보며 침음했다.
“호들갑 떨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많이 다쳤잖아요.”
하아. 제길 이 짓도 못 해 먹겠군.
리온은 더는 이곳에서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선명히 문양이 드러날수록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제니스.”
“네? 어, 지금…….”
내 이름을 불러 준 건가?
제니스가 놀라 눈을 홉떴다.
“내 곁에 오지 말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제가 치료해 줄게요.”
“그럴 필요, 윽.”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눈앞에 있는 제니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하, 제길 또…….’
또다시 문양에 잠식되는 건가.
최근 들어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제니스와 더 거리를 두려 했건만.
“이것 봐요!”
“하아……. 제니스.”
리온이 낮게 읊조렸다.
허벅지를 강하게 쳐도 제 입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내…….”
제기랄, 멈춰. 그만해.
그의 몸부림에 제니스가 뒤로 물러섰다.
리온은 손목에 있는 팔찌를 꽉 쥐며 숨을 골랐다.
“알았어요, 떨어질게요. 하지만 힘들면 꼭 말해 줘야 해요.”
시야에서 제니스가 사라지자 그제야 숨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아, 하. 제길!”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엘르를 잊게 될 것이다.
마음이 급했다.
리온은 제 손목에 드러난 문양을 쳐다보았다.
처음보다 더 진해진 문양은 금빛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안 돼, 안 돼…….”
절망에 잠식되어 이성이 흐려졌다.
숨이 막히고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저를 옭아매는 족쇄와도 같았다.
“엘르, 더는 안 될 것 같아.”
리온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더는 자신이 아니기 전에 이것을 끝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엘르를 다시 보고 눈에 담고자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엘르 하나뿐이었으니까.
리온의 몸 주변에 강한 오라가 스물스물 드러났다.
그는 이내 말끔해진 몸을 이끌고 막사를 빠져나갔다.
* * *
리온은 제 손에 묻은 피를 응시했다.
적진에 홀로 쳐들어가 모두를 죽이고 밤중에 몰래 막사로 돌아왔다.
다행히 저를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리온 님?”
순간 제 이름을 부르는 이로 인해 리온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꺅!”
목이 잡혀 바르르 떠는 제니스가 눈에 들어왔다.
“제니스? 당신이 여긴 왜.”
“그게……. 걱정이 되어서 잠시 상태만 살피러 왔는데.”
제니스의 눈이 점차 커졌다.
리온의 몸에 보이는 깊은 상처와 핏자국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괜찮아요? 피가!”
“조용히 해.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면.”
제니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리온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리온은 그제야 제니스를 놓아주었다.
내가 바로 제니스를 알아, 본 건가……?
리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엘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정말로 그 지긋지긋한 문양 때문에?
또다시 저 바닥 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발버둥 치려 해도 제자리였다.
“어……?”
제니스는 리온의 상처를 치료하던 중 손목에 흐릿하게 보이는 문양을 발견했다.
언제나 항상 끼고 있는 팔찌도.
‘이건, 나와 똑같은…… 문양 같은데.’
설마. 아닐 거야.
그렇다면 리온이 제게 적대적으로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다시 한번 더 확인하는 거야.’
제니스는 다시금 치료를 하면서 리온의 손목으로 손을 옮겼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많이 다쳐서 그런 건가?’
하지만 이런 상처에도 끄떡없었는걸.
그의 손목을 다시 보려던 찰나 리온의 제니스의 손을 잡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 죄, 죄송해요!”
“치료는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괜찮으니 이만 막사로 가십시오.”
제니스는 옷자락을 쥐었다. 손목에 있는 문양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봤어요.”
“뭘 말입니까.”
“손목에 있는 문양 말이에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리온의 눈빛이 돌변 사납게 변했다.
제니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 내 반려라면 저렇게 굴지 않을 거야.’
그녀는 애써 미소를 띠었다.
“아니에요. 그냥 저도 문양이 요즘 드러나고 있어서 궁금했어요.”
“이만 가 주십시오. 내일이면 제국으로 돌아갈 테니까.”
“돌아간다뇨?”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제니스는 리온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게다가 곧 있으면 델테르가 이곳에 방문할 것이다.
그 말은 아직 전쟁이 종식되기 전이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리온은 끝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제니스의 호기심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아…….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죠?”
리온은 제니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제 앞에 있으니 온전한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리온은 제니스의 손목을 잡아 막사 밖으로 끌었다.
“후. 제발, 당신이 있을 곳으로, 가.”
“리온 님……?”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제 마음과 달리 뛰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저가 무슨 심정으로 제니스를 마주하고 있는지.
몇 번이고 죽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내며 버티고 있었다.
“당신이 원망스럽고 싫습니다. 끔찍하게 느껴지지 제발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입니다.”
리온의 말에 제니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했나요?”
왜 이리도 제게는 모질게 구는 걸까. 이곳에서 그나마 아는 사람은 리온뿐이었는데.
“알았어요, 더는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제 반려가 맞다면 그 지옥에서 저를 꺼내 줄 유일한 출구일 테니까.
제니스는 리온의 막사를 나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쟁이 끝났어. 내 자유도 끝이 난 거야…….’
또다시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 * *
“다, 단장님!”
해가 뜨고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혼란 가득한 눈동자를 했지만, 리온은 무덤덤하게 막사를 나섰다.
“간밤에 적…….”
“이건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군.”
“전멸이라고 합니다. 정찰병이 주변을 둘러봐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청난 힘의 마나가 남아 있다고…….”
“이걸 상부에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하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싸워 이긴 것도 아니었으니 승리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일단, 오늘 황태자 전하가 오기로 했으니 대기한다.”
“적이 전멸되었으니 이만 제국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 아닙니까?”
보자, 저 옷이 단장이었던가?
리온은 몸을 돌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선 단장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단장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이런 일에 잘 나서지도 않는 놈이 종식이 된다는 소리에 반응을 하다니.
“아, 그래 자네라면 알 수도 있겠군. 마법이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하던데 뭐 짚이는 거라고 있나?”
그는 리온을 빤히 응시했다.
뭔가 알아차린 건가?
의심 가득한 시선에 리온은 턱을 매만졌다.
그렇다면 곤란한데. 힐끔 제니스를 보았다. 그녀도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는데.’
리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잘된 일 아닙니까?”
귀찮게 일이 꼬이는 것 같은데. 눈치라도 채면 곤란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는 없으니까.
황태자가 온다고? 그렇다면 제국에 돌아가는 건 빠르겠군.
“글쎄……. 그런 괴물이 있다면 곤란하지. 꽤 곤란해.”
괴물이란 단어에 리온의 눈썹이 들썩였다.
“괴물이라.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입니다.”
“꽤 잔혹하게 죽였다던데. 우리의 마법사께선 정말 아는 바가 없나?”
“제가 간밤에 홀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을 죽이고 다시 돌아왔다는 겁니까?”
리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단장이 눈을 회피했다.
‘저 자식은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긴달까.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다른 이에게 관심도 없었고, 무엇보다 전쟁 말고는 나서지도 않았다.
“다, 단장님! 잠시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급한 외침에 단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제게서 떨어진 시선에 리온의 표정이 무덤덤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지?”
“아, 다들 소란스러운 것 같아 바로 이곳으로 왔네만.”
델테르가 모여 있는 병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시 상황에 왜 이렇게 다들 어수선한 거지?”
“그, 그것이.”
단장이 머리를 굴리며 대답을 생각해 내려 했다.
“제니스 황녀는 어디에 있지?”
“아, 모셔 오겠습니다!”
단장의 손짓에 병사들이 황급히 제니스 황녀를 데려왔다.
“저, 전하. 오셨군요. 이른 시간부터 오실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제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델테르를 반겼다.
그러자 델테르의 뒤에서 불쑥 얼굴 하나가 나왔다.
“오랜만이에요. 제니스 황녀님.”
“어? 엘르 영애?”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방문에 제니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리고 ‘엘르’란 이름이 들리자마자 리온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정말로 델테르와 함께 온 엘르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