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나는 델테르를 지나쳐 마련된 테이블로 향했다.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여기 있는 이들 중 반은 벨루아 가문에 힘을 빌린 자들이었다.
‘참 많이도 퍼 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써먹는구나.’
차를 홀짝 마시며 배시시 웃었다.
“다들 제가 부른 이유는 알고 계시겠죠?”
내 말 한마디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눈치를 보는 것을 잠시도 참지 못한 세르탄 영애가 입을 떼었다.
“사실 모르겠어요. 따로 저희를 부르신 연유가 무엇인가요?”
“어머, 정말 모르시나요?”
나는 테이블을 툭툭 치며 눈을 치켜떴다.
“장부.”
내 한마디에 무너질 가문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도 잘 알고 있을 터.
장부란 말에 일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이유를 알아차린 듯했다.
“문제가 생겼어요. 아, 물론 아주 작은 문제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나요?”
“황실에서 제 가문에 재밌는 짓을 벌였더군요.”
“화, 황실에서라면.”
벌써부터 쫄면 곤란한데. 모두가 아는 사실이긴 했다.
벨루아 가문과 황실의 사이를.
그러나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무사히 일어나는 것이었다.
‘리온이 힘을 깨우쳤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황실에 대적하실 생각은…….”
“쉿.”
나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반기라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지 않은가.
“그저 제 가문에 힘이 되어 주시면 된답니다. 그럼 저도 지금처럼 그대들과 거래를 멈추지 않을 테니까요.”
“혹, 정보상을 물려받기로 하신 겁니까?”
“그래요, 요즘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좀 바쁘세요. 아, 참.”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이 모든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내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도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었기에 나조차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그 말씀은.”
“황실에서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요?”
“엘르 나타시아 영애!”
“목소리 낮추세요. 시선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나는 탁 하고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냥 이렇게 종종 차 마시며 친한 척 웃어 주면 돼요. 간단하죠?”
그럴 리 없었다.
황실이 보기에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벨루아 가문과 친하게 지내는 걸 알게 된다면 좋지 않게 볼 터.
그러나 그들은 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벨루아 가문을 건드렸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황제는 알면서도 이번 일을 묻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에 맞설 수밖에.
“자, 이제부터 게임은 시작이랍니다.”
그래, 내가 지금 뭘 가릴 처지인가?
나는 집으로 돌아가 리온에게 서신을 쓸 생각을 했다.
지금껏 답장은 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급한 일에는 답을 해 주지 않을까.
정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 * *
“왜 편지가 안 오는 걸까.”
첫날 가져온 편지 말고는 단 한 통도 받지 못했다.
리온은 허망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엘르에게서 적어도 한 통은 올 줄 알았건만.
자주는 아니어도 시간 나는 틈틈이 서신을 보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어이, 네 녀석은 가족도 없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리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리온은 대꾸조차 없었다.
‘성가시군.’
모든 게 귀찮았다.
엘르가 원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길어질지는 모르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리온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제힘을 온전히 개방해야 했다.
제대로 문양도 나타나지 않은 이가 그 정도로 방대한 힘을 사용한다면 의심받을 게 분명하다.
“야, 말 걸지 마. 저놈 저거 벨루아 가문의 호위 기사로 있었다더군.”
“그 미쳐 날뛰는 가문? 허어. 그래도 그 백작의 딸이 그렇게 예쁘게 생겼다고 하던데.”
다른 이들의 말은 무시했던 리온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이 말한 딸이 바로 엘르였기 때문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계집이라지?”
“쉿, 너 그러다가 큰일 나.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가 있어.”
그들은 계속해서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리온의 두 눈동자가 번뜩였다.
“차, 참으세요!”
“뭐 하는 겁니까.”
탁하고 제니스의 손을 쳐낸 리온이 얼굴을 굳혔다.
제니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를 향한 살기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었다.
“헉, 허억. 리, 리온, 님…….”
힘겹게 부르는 제니스의 목소리에도 리온의 눈은 이채가 서렸다.
감히 더러운 입에 엘르를 담다니.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턱.
제니스가 힘겹게 리온의 옷 끝을 잡았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는 살기를 거뒀다.
“괜찮습니까?”
“하, 하아. 네…….”
매번 제 옆에 있어 봤자, 좋은 일 하나 없는데 왜 자꾸 주변을 맴도는 걸까.
“앞으론 따라다니지 마십시오.”
“하지만…….”
제니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신경 쓰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저를 당기는 기분마저 들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누군 밀어내는 리온 님 옆에 있고 싶은 줄 아시나요?”
그녀는 별안간 서러움이 폭발했다.
누가 봐도 저가 매달리는 꼴이었지만, 그녀도 자존심이 있었다.
“저도 리온 님 시, 싫어요!”
“잘 되었네요.”
제니스의 눈물에도 리온은 무덤덤했다.
그녀가 우는 이유가 저 때문이란 생각조차 못 했으니까.
“앞으론 아는 척도 하지 마십시오.”
리온은 제니스를 지나쳐 막사로 들어갔다.
그녀와 자꾸 함께 있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울렁거리기도 하면서, 아무렇지 않았던 감정이 달라지는 기분이랄까.
별안간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나팔 소리가 퍼졌다.
* * *
“디리아, 혹시 내 이름으로 서신 온 거 없어?”
“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없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저, 엘르 아가씨. 이것 좀 봐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헤센 경의 말에 서류에 집중했다.
“최근에 누군가가 벨루아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델테르겠죠.”
듣지 않아도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우리 저택에 왔던 이유가 뭐였더라.
“아, 참. 그 떠들썩했던 사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무슨 일인지 잠잠하다고 합니다. 덕분에 문양을 가진 이들이 한시름 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요즘 잠잠했던 거구나.”
이상한 일이네. 마치 리온이 떠난 날과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에이, 나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가씨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 많죠.”
아버지 일도 그렇고, 리온은 잘하고 있을지도 궁금해.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이 자리에서 가문을 지키며 전쟁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랄 뿐.
한숨을 푹푹 내쉬자 지켜보고 있던 디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리온 님에겐 무슨 말을 쓰셨나요? 저도 보고 싶긴 하네요.”
“꼭 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아버지는 남에게 힘을 빼앗기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힘을 흡수하는 리온이라면 에드가의 몸에 있는 마법을 빼낼 수 있지 않을까?
아직 원인은 찾지 못했지만 이것저것 시도를 해 볼 생각이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놓을 순 없었으니까.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그래도 승전보가 계속 울리는 것을 보면 곧 끝나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 전쟁터에서 리온은 사랑을 싹 틔우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입가가 쓰게 느껴졌다.
“아가씨…… 힘내세요.”
“고마워, 디리아.”
그래도 내 곁에 같은 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책상에 가득 쌓인 업무를 보면 숨이 턱하고 막혔지만.
“자 그럼 다시 해 볼까나.”
나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서류를 펼쳤다. 그동안 아버지가 해 온 일들이 워낙 방대해야지.
“깨어나기 전에 흠이 될 만한 일은 다 접어야겠어요.”
대신할 만한 사업으로 바꿔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 수완은 내게 있지 않은가. 이미 원작에서 잘되는 일들이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양심에 찔려 하며 알고도 모른 척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이 세계의 악역의 딸이었고, 그런 나는 원래의 역할을 할 뿐이다.
“문양을 가리려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했었죠?”
“네, 아무래도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가 봅니다.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으니…….”
“잘됐네요. 디리아 네가 할 일이 있어. 여기에 찾아가서 좀 만나자고 해 줘.”
“여긴…… 베르뎅 쥬얼리 숍이 아닌가요?”
“맞아, 거기에 주문 제작할 게 있어. 사업으로 아주 괜찮을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헤센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다.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나는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은 실험을 해 봐야 했다.
팔목에 문양이 드러나니, 그만큼 화려한 장신구를 만든다면 가리기에도 좋을 것이다.
무조건 가리게 된다면 의심을 사겠지만, 유행하는 액세서리라면 모두 자연스럽게 여길 것이다.
유행이라면 장사도 잘될 터.
“일단은 나부터 착용을 해야겠지. 다음 연회를 잡아 줘.”
“네! 알겠습니다!”
디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챙겨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