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20)

제45화

“아가씨, 일어나세요.”

디리아의 말에 잠에서 깼다.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으음, 몇 시야?”

“아직 시간이 일러요. 늦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 오늘이었지?”

어젯밤 황실에서 보란 듯이 내게 초대장을 보냈다.

‘떠보시겠다?’

에드가의 상태와 더불어 벨루아 가문의 상황에 대해 알아볼 요량이 분명했다.

“뻔뻔해서 못 봐주겠네.”

이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귀족들을 만나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조금 더 힘이 필요했다.

“아가씨, 리본은 안 어울리니 뺄게요.”

“……어?”

나는 디리아의 말에 손목에 묶인 리본을 보았다.

“아니, 그냥 오늘 푸른빛 드레스 입을게.”

“리본을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것도 아니면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디리아의 물음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리온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모르니까.

이것마저 풀어 버리면 정말로 리온을 잊을 것 같았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냥 예쁘잖아.”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계속 맸던 것 같아요.”

“……그랬던가?”

나는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카락을 빗는 손길이 우뚝 멈췄다.

“어? 그러고 보니 리온 님이 오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네요.”

“그냥 시기가 우연히 겹쳤을 뿐이야.”

어차피 리온이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제니스밖에 없었다.

굳이 그의 약점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까?

“디리아, 조금 빨리해야 할 것 같아. 서류도 봐야 하거든.”

“아, 네. 알겠어요.”

그제야 그녀의 손길이 아까보다 빨라졌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거울을 응시했다.

‘좀 초췌하네.’

황실에 갈 건데 어느 정도 차려입어야 하는 걸까.

다른 영애들도 분명 초대되었을 것이다.

벨루아 가문만 초대하면 의심을 살게 뻔했다.

내 입장에서는 환영이었지만, 황실이 구실의 빌미를 줄 리는 없었다.

“디리아, 오늘 바짝 힘 더 주자.”

“정말요?”

“응,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부탁해.”

오늘 같은 날은 어디 가서 지면 안 된다.

밀리는 순간 다음 일도 꼬일 것이다.

내 말에 디리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랜만이네.”

나는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에 숨을 들이마셨다.

‘작정을 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부른 걸까. 마차에서 내려 멍하니 섰다.

마음을 가다듬긴 했지만, 홀로 적과 맞서는 것은 익숙지 않았다.

그런데 저 멀리서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고 가만히 서서 응시했다.

“뭐야?”

내게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델테르였다.

“뭐예요?”

“에스코트가 필요할 것 같아서.”

“괜찮으니 혼자 갈게요.”

“거절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재수 없어. 얘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분명 제니스를 따라 전쟁에 나갈 텐데.

아니지 가지 않는 게 리온에게는 좋은 거 아닌가?

그 생각을 마친 나는 황급히 델테르의 손을 잡았다.

“……뭐지?”

“에스코트해 주신다면서요.”

델테르는 내 행동이 떨떠름해 보였다.

둘이 나란히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전하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 아버지 그렇게 만든 거.”

델테르의 고개가 내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델테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맞나 보네, 너 맞지?”

“……지금 뭐라고?”

후.

숨결을 불어넣었다.

델테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맞잡은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당겼다.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신 바짝 차리셔야죠?”

“……엘르 나타시아. 미쳤나 보군.”

“그럼 안 미치고 버티겠어요?”

나는 픽 하고 웃었다.

곧이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황후가 있었다.

나와 델테르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내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는 모양새가 딱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은가.

‘알 만하네.’

황제는 이 사건을 탐탁지 않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델테르와 황후가 내 눈치를 살피겠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 나를 불러 줄 줄이야.

똥줄이 타긴 했나 보다.

“벨루아 가문이 제국에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지.”

황후는 가식적인 웃음을 그려 넣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즐기다 가시게. 연회가 끝난 후 티파티도 준비했으니 꼭 참석하도록 하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티파티라. 벌써부터 즐겁다.

“여기 참석한 걸 보니 너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긴 해.”

“그걸 이제 아셨어요? 저 건드리지 마세요. 지금 미친개라 확 물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를 위협하며 말했다.

붉은 머리카락을 본 이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기 바빴다.

“언제 봐도 저 붉은색은 불길해.”

“쉿, 조용히 해. 요즘 미쳐 날뛴다잖아.”

저기요, 다 들리거든요.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영애들을 응시했다.

바라보며 활짝 웃어 주었다.

“어머, 저 희번덕거리는 눈 좀 봐. 그러고 보니 황실에서 요즘 벨루아 가문에 관심이 많아 보이지 않아?”

“그러네, 황태자 전하가 에스코트해 주는 것도 그렇고.”

“그럴 리가. 요즘 주변 상황이 불안하잖아.”

“아, 그렇지.”

전쟁이 시작된 후 제국의 상황은 조금은 불안했다.

“그 소식 들었어? 전장에 엄청 뛰어난 마법사가 나타났대.”

“그래?”

“황녀 전하랑 그렇게 붙어 다닌다던데.”

우뚝 내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리온이 제니스 황녀와 만났구나.’

이야기가 도는 것을 보니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모양이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건만, 얼굴이 흐릿했다.

나만 볼 수 있었던 붉은색 눈이 그리웠다.

“그 호위 기사놈.”

“……리온 말인가요?”

나는 손을 빼내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뚫어지라 응시하는 델테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 전하께선 저와 주변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단 말이죠.”

그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리온이 내 곁에 있었다면, 에드가가 그런 꼴이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슬픔에 빠진 것을 봤다면…… 적어도 은혜를 갚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했을 터.

“내가? 하. 당치도 않군.”

“그만 재잘거리세요. 같이 붙어 있는 것도 소름 끼치니까.”

나는 손으로 팔을 털어 냈다.

적과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아는가?

델테르는 내 행동 하나하나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감정을 못 감춰선 황태자라 할 수 있을는지.”

“정말 미친 게 분명하군.”

델테르가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놀라 홉뜬 눈으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우릴 보았다.

나는 태연자약하게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델테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금 뭐 하는……?”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전하께선 날 이렇게 긁어 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이유 없이 귀족들에게 해를 가할 순 없다.

그리고 에드가가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황실에게도 좋지 못할 것이다.

황실의 눈에 난 귀족 가문들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을 테니까.

지금의 황제는 생각보다 적이 많았고, 황태자는 사람들에게 아직 인정받지 못했다.

“당신보다 제니스 황녀가 더 입지가 두텁잖아요?”

“……말조심해.”

“그리고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기도 하죠. 참 재미있어요.”

얽히고 얽힌 운명들이 더욱 꼬여가는 게 답이 없지 않은가.

그조차도 모르고 비뚤어지고 있는 황태자라니.

우습고 또 우스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건 곧 두고 보면 알겠죠.”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을 것 같나? 아니.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귀족들을 만나기엔 딱 좋았다.

델테르 카베제르에게서 두어 발짝 물러서자 기회를 엿보던 이들이 내게로 왔다.

“엘르 나타시아 영애?”

“어머, 이게 누구시죠. 세르탄 영애 아니신가요?”

나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미리 서신을 보낸 효과가 있었네.

세르탄 영애는 헤르티아 백작 가문의 장녀였다.

헤르티아 가문이 벨루아 가문에게서 몰래 얻어먹은 돈만 해도 성 한 채는 사고도 남을 정도로 받아먹었다고나 할까.

그것도 가문의 부채를 막기 위해 급하게 빌렸었지.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 있는 목소리와는 달리 불안해 보였다.

자신의 가문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걸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곤란할 테지.

귀족들은 누구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저도 왔답니다. 엘르 영애.”

내게 친한 척하며 다가오는 키에르네 영애가 보였다.

“혼자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들 이렇게 반겨 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저희 자리를 옮겨 볼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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