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20)

제42화

“으으으으, 아 허리야.”

나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밤새 편지를 쓰다 잠이든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침대로 왔던가? 왜 기억이 없지?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나 곧이어 시계를 본 나는 튕기듯 침대에서 벗어났다.

헉, 시간이 벌써.

“빨리, 빨리!”

나는 서둘러 준비했다.

생각보다 늦게 일어났다.

잘못하다간 리온이 시험을 보러 가기 전 타이밍을 못 맞출지도 모른다.

똑똑똑.

“아가씨, 들어갈게요.”

“디리아, 빨리 들어와!”

마음이 조급했다. 조금만 시간이 지체되어도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왠지 오늘 안 보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초조함에 대충 치장을 했다.

“대충해. 진짜 이러다 놓치겠어.”

“아가씨.”

디리아가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했다.

“리온이 기다릴 거야. 늦으면 안 되잖아.”

가기 전에 줄 것도 있고. 해 주고 싶은 말도 있었는데.

결국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리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이상하게 눈빛에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었다.

‘왠지 분위기가 가라앉은 게 수상한데.’

나는 디리아를 향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뭐야? 나한테 할 말 있어?”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이럴 때면 늘 안 좋은 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 늦는다니까?”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디리아는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떼었다.

“리온 님 벌써 가셨어요.”

“뭐?!”

아닌데 그럴 리 없는데.

“거짓말!”

나랑 약속했지 않은가. 가기 전에 꼭 보고 가겠다고.

이렇게 말도 없이 갔을 리가 없다.

나는 버럭 화를 내며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편지를 찾았다.

“…… 없어.”

나는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 방 안을 들쑤셨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내가 고심해서 쓴 편지도 그리고 팔찌도.

“설마 왔다 간 건가?”

왜 인사도 안 하고…….

왈칵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가씨…… 이거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나는 디리아가 건넨 편지를 받았다.

편지 고르는 센스 하곤. 누가 봐도 리온의 것이었다.

의자에 털썩 앉아 편지를 보았다.

[엘르, 다녀올게. 네가 어디에 있든 찾을 거야.]

이게 무슨 편지야. 나는 딱 두 줄 쓰여 있는 편지를 몇 번이나 읽어 내려갔다.

“인사도 안 하고 갔을 리가 없는데.”

“사실, 에드가 백작님이 리온 님을 몰래 부르셨어요.”

“……백작님이?”

정말 끝까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에 사라진 것이 역시 사달을 낸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떠나는 아이인데 이렇게 쫓아내듯 보낼 건 뭐란 말인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당장 백작님에게 가야겠어.”

“지금은 조금……!”

황급히 디리아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디리아를 향해 목소리를 깔았다.

“디리아, 나 지금 화 많이 났어. 비켜 줘.”

“아가씨…….”

“비켜.”

사람이 정도가 있지. 이건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디리아는 내게 길을 비켜 주었다.

* * *

“백작님 안에 있죠?”

“……나중에 다시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내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나는 헤센 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켜요.”

하, 나 오늘 이 말 몇 번이나 하니?

와락 구겨진 내 얼굴을 보면서도 헤센 경은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썽 안 부릴게요. 대화만 하려는 거예요.”

나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헤센 경.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저는 지금 당장 만나야겠어요.”

물러서지 않는 헤센 경을 보며 낮게 경고했다.

나는 엄연히 그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백작이 나를 딸로 인정하지 않는다해도, 나는 엄연히 벨루아 가문의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헤센 경은 꺾이지 않는 내 눈빛을 보더니 이내 길을 터 줬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에드가의 찡그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늘 앉아 나를 노려보던 시선이 없었다.

그 자리에 늘 있어서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에드가를 찾았다.

“어……라? 왜 저기에.”

집무실에 마련되어 있는 침대에 에드가가 누워 있었다.

뭔가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성큼성큼 에드가에게 다가갔다.

조금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뭐야, 왜 여기에 누워 있어요?”

나는 손을 뻗어 에드가를 툭 하고 쳤다.

“안 자는 거 다 알아요.”

“엘르 아가씨. 백작님께서는.”

“연기하는 거죠? 내가 잔소리할까 봐. 리온을 그렇게 보낸 거 따질까 봐서.”

어제만 해도 멀쩡했지 않은가.

살짝 에드가의 손을 스쳤을 뿐인데 소름이 돋았다.

“왜, 왜 이렇게 차갑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평온하게 자고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불안한 걸까.

“몸이 좀 안 좋으십니다.”

“델테르 전하도 알고 있나요?”

나는 퍼뜩 그의 존재를 떠올렸다. 황실에서 알게 된다면 좋을 게 없었다.

안 그래도 벨루아 가문을 벼르고 있는데 약점이라도 잡히면 곤란했다.

“네,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설명해 봐요. 아버지가 왜 침대에 누워 계시는지.”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계획에 없었다.

알고 있던 내용과도 달랐다.

에드가가 이런 식으로 신변에 위협을 받은 일은 아직까지 생기지도 않았을 터.

그걸 위해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세르티아 헤센 경. 내 말이 안 들리나요?”

집무실에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헤센 경이 입을 떼었다.

“사실 어제 아멜란 공작가에 갔었습니다.”

“아버지 혼자는 아닐 테고. 아멜란 공작가에서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 힘이 있었던가?”

아니, 전혀.

세드릭만 봐도 그들이 가진 힘이 얼마나 하찮은지 가늠이 되었다.

그럼 다른 이로 인해 지금 저 지경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에드가는 마나를 뺏기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으니까.

다른 이들의 힘을 빼앗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그런데 저런 상태가 되었다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어떤 가설을 세워도 에드가를 굴복시킬 힘은 없었다.

“정예 기사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아멜란 가문에선 문제가 없었는데…….”

“거긴 왜 가신 거야.”

“그건…… 그들이 벨루아 가문을 속였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아…….”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다. 결국 나 때문에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온을 지키기 위해 한 말에 에드가가 다쳤다.

아멜란 가문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를?

혼란스러움도 잠시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처음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일어나긴 힘들 것 같다는 게 의사의 소견입니다.”

“아버지를 찾아온 이들은 앞으로 제가 만나겠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와 관련된 정보는 모두 가져다주세요.”

에드가가 의식을 차리지 못한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정보상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도 그렇고, 그와 연계되어 얽힌 일들이 많았으니까.

“벨루아 가문을 건드린 이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

에드가가 그랬듯 나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괴롭힐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안 된다.

어떻게 고치고 있던 인간이었는데!

갑자기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않은가.

리온의 일을 따져 묻기 위해 왔건만 더한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상태는요?”

“다행히 많이 다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보입니다.”

“의식만 잃은 것뿐이죠?”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헤센 경의 말을 들은 나는 한시름 놓았다.

아픈 게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저주라든지, 나도 몰랐던 흑마법 같은 것에 당했다면 답이 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풀겠어?

시일이 걸릴 뿐 깨어나긴 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방팔방으로 조금은 알아봐야 하겠지.

나는 눈을 감고 있는 에드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끝까지 도움이 안 돼. 아버지란 사람이 앞길이나 막고.’

미운 정이 든 것은 확실했다. 예전 같았으면 얼씨구나 하고 필요한 걸 챙겨 달아났을 텐데.

그러나 나는 에드가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었다.

누워 있는 그를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헤센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런 시선이 느껴졌지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자기도 할 말이 많을 테니까.

“아가씨, 리온 님의 일은…….”

“됐어요. 나중에 깨어나면 직접 듣도록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겠어요.”

이렇게 된 거 에드가가 숨기는 일에 대한 것도 좀 파헤쳐야겠다.

“그동안 힘들었으니 조금은 쉬셔도 되겠죠.”

“그런데 왜 안 놀라시는 겁니까?”

“한 번은 이럴 줄 알았으니까요.”

내 말에 헤센 경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언젠가 에드가가 사고를 치고 목숨이 위험할 일을 당할 것이라 어렴풋이 예상했었다.

그러게 적당히 성격 죽이고 살라니까! 말 안 듣더니.

힐끔 에드가를 본 나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폈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대가를 받아 내 볼까요?”

책상에 앉은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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