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혼담도 없던 것으로 했는데.”
아멜란 공작이 에드가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혼담은 이미 어그러졌고, 제 쪽에서 사과까지 했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안 하니 원.’
설마 문양이 있는 것을 들킨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아멜란 공작은 불안해져 다리가 달달 떨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에드가는 말없이 저 상태였다.
그것도 한 시간 째.
언제 봐도 에드가 공작이 풍기는 살기는 무자비했다.
그의 앞에서 힘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저 괴물은 힘을 죄다 흡수하니, 원.’
공작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좀 이용하고 버리려 했는데 일이 꼬인 것이다.
결국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물었다.
“에드가 백작.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물음에도 에드가는 입을 떼지 않았다.
턱을 매만지며 저를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살이 떨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
“에드가 백작!”
결국 참지 못하고 아멜란 공작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백작님.”
그와 동시에 그와 함께 온 기사가 에드가를 불렀다.
“경매품 손에 넣었습니다.”
기사의 말을 들은 에드가가 손을 모아 얼굴 앞에 가져갔다.
“아멜란 공작.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네.”
분명 계급은 낮았건만, 그는 하대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멜란 공작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말을 높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벨루아 가문이라면 공작가보다 더한 재력과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황제께서 벨루아 가문과 부딪히진 말라고 하셨으니 몸을 사릴 수밖에.
‘제길.’
어쩌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까지 된 거지.
아멜란 공작은 검지를 이마를 꾹 눌렸다.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말하는 겁니까?”
“세드릭 아멜란. 네 아들 녀석 말이지.”
“세드릭이 백작가에 갔을 때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조금 허당기가 있긴 했어도 허튼짓할 놈은 아니었다.
‘설마.’
정말로 들킨 건가?
순간 아멜란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눈치챈 모양이군. 그렇다면 변명이라도 들어 볼까?”
에드가는 다리를 꼬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흠칫 몸이 떨렸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아멜란 공작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에드가가 입을 떼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아멜란 공작.”
“에드가 백작. 내 이야기를 좀 들어 보게.”
그가 다급히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몰랐네! 내 아들도 몰랐고! 정말 갑자기 생긴 것이네. 문양이 이리 빨리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네.”
“……몰랐다? 변명도 성의가 없군. 얼마나 나를 무시했으면.”
에드가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아멜란 공작을 보았다.
“세드릭 아멜란, 스물한 살.”
“에, 에드가 공작.”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무려 일곱 살 차이.
“열여섯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아멜란 공작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 이번 한 번만 봐주게.”
그는 필사적으로 빌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벨루가 가문이었다. 백작의 계급을 가졌어도, 황실이 견제할 만큼의 힘을 가진.
그렇기에 자칫 걸렸다간 개죽음당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벨루아 가문은 뒷배도 든든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손이 안 뻗은 곳이 없었다.
“내 아들이 엘르에게 관심이 많았네. 한눈에 반한 모양이야.”
“하.”
에드가는 낮게 조소했다.
감히 누구를 마음에 품었단 말인가.
게다가 엘르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입도 거칠었고, 제 행동에 스스럼이 없었다. 귀족 가문에서 반길 만한 며느릿감은 아니란 소리였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하는 말마다 저질스러워서 시간이 아까울 정도야.”
에드가는 제 발아래 엎드리고 있는 아멜란 공작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은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제, 제발.”
에드가는 말없이 공작의 손을 짓밟았다.
“내가 아멜란 가문의 그 황당한 요구에 응해 준 것은 그대들이 황실에서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있었기에. 단지 그뿐이었네.”
구둣발에 손등의 살갗이 벗겨졌다.
“아악! 으아아악!”
고통 섞인 신음이 입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걸 손에 넣은 지금 내가 뭘 할 것 같나?”
에드가는 미동 없이 아멜란의 짓이겨지는 손을 응시했다.
“감히 벨루아 가문을 상대로. 그것도 내 딸을 넘봐?”
가당치도 않지.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제국에 귀족은 많았으니 가문 하나쯤은 사라져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이 공작 가문일지라도.
에드가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처리해.”
기사들은 에드가의 말에 곧장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없애.”
에드가는 구두에 묻은 피를 카펫에 닦았다.
그러곤 울부짖는 아멜란 공작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즐거웠네, 공작.”
뒤돌아 걸어가는 에드가를 보며 아멜란 공작이 소리쳤다.
“내, 내 아들만큼은! 제발! 용서해 주게!”
그러나 에드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 딸에게 수작을 건 대가는 치러야 했다.
황제가 이 일을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에드가는 그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상태였다.
* * *
리온은 마음이 불편했다.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엘르를 보기로 했지만, 그러지 못할 거 같았다.
에드가가 저를 찾아와 경고를 했으니까.
“조용히 가. 인사도 할 필요 없이 그냥 가는 게 좋을 거다.”
“네 녀석이 엘르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알지만, 지금 이곳에 누가 와 있는지 잘 알겠지.”
“혹여나 델테르가 네 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엘르겠지. 머리를 잘 굴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눈치껏 행동하라는 에드가의 말이었다.
그의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에 부쳐져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황실이 이곳에 온 이유도 최근에 일어나는 일 때문이지 않은가.
처음 보는 이가 눈에 계속해서 띈다면 거슬릴 터. 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은 분명했다.
이미 그 부분은 늦은 것 같지만.
델테르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토록 눈치 볼 일은 없었을 텐데.
정원에 거닐 때 제니스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되짚었다.
‘분명히 그 여자가 내 반려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죽이지?
리온은 으득 이를 갈았다. 속이 타들어 가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확신했다.
자신은 시험에 붙을 것이다. 엘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고, 약속이니까.
“해도 너무하는군.”
딸을 아끼는 것은 알겠지만, 이토록 저를 경계해야 할 정도인가?
정보를 알아내려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이 백작가를 떠나기 전에 얻은 것은 없었다.
리온은 상의를 벗고 손목을 보았다.
“이것까지 들키고.”
정말 형편없네.
제 손목을 보았던 엘르의 표정이 떠올랐다.
배신감? 원망? 아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델테르와 제니스 앞에서 했던 행동에선 또 어떠했고.
도대체 누굴 신경 쓰고 있는 건지.
“델테르 카베제르.”
그 황태자 녀석이 자꾸만 거슬렸다.
엘르를 묘하게 낮잡아 보는 것도 그렇고, 말투와 언행 모두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죽여 버릴까.”
그는 엘르 빼고 다른 이들 모두 죽여 없애고 싶었다.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보고 싶다.”
잠시 보지 않았을 뿐인데,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리온은 곧장 방문을 나섰다. 그는 생각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으니까.
‘당분간은 몸을 사려야겠지.’
제니스가 의심되니 다른 이들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엘르의 방으로 다가갈수록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 시간이면 자고 있겠지.
보지 않아도 엘르의 행동이 훤하게 떠올랐다.
방 앞에 다다른 리온은 가만히 안의 기척을 살폈다.
‘자네.’
역시 엘르의 기척은 잠잠했다.
주위를 살피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익.
소리가 나자 리온이 흠칫 몸을 떨었다. 다행히 깨지 않은 모양이다.
리온은 방 안으로 들어가 엘르를 찾았다.
뭘 하다 잠이 들었는지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는 게 보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했길래 여기서 이렇게 불편하게 자는 걸까.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널 잊어.”
리온은 테이블에 널브러진 편지지를 발견했다.
바닥에 구겨져 버려진 종이들을 보니 꽤 고심한 것 같았다.
엘르가 제게 쓴 편지지 옆에는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이건 또 언제.’
검은색과 빨간색이 교차된 팔지가 보였다. 엉성한 것이 직접 만든 게 분명했다.
리온은 가만히 잠이 든 엘르를 보았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엘르를 보니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는 몸을 숙여 엘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조심성도 없고.”
그렇게 밤에 문 잠그고 자라고 했는데.
엘르는 저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어린 나이와는 달리 이미 컸는데 여전히 저를 아이 취급하지 않는가.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카락이 새하얀 얼굴과 잘 어울렸다.
리온의 눈동자는 이내 붉게 물들었다.
푸른 리본을 매고 있는 엘르의 손목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미안, 인사도 못하고 가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엘르를 살며시 들어 올렸다.
“으으음.”
엘르는 끙끙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그 바람에 리온이 행동을 멈췄다.
미간을 찡그리며 웅얼거리는 모습조차 예뻤다.
리온은 엘르가 깰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엘르는 리온의 품에 안겨 잘 잤다.
조심스레 침대로 가 엘르를 눕혔다.
얼굴에 펜이 묻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슬며시 볼에 묻은 펜 자국을 지웠다.
‘열심히 쓰긴 쓴 모양이네.’
리온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란 걸.
자고 있는 엘르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잘 있어. 다시 올게.”
리온은 자신의 몫인 편지와 함께 팔찌를 챙겨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