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황녀는 찾았으려나?”
심심한 데다 잠도 안 오는데. 한번 슬쩍 가 볼까나.
나는 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곤, 뒤에 위치한 정원으로 향했다.
에드가의 일도 얼추 마무리가 되었으니 오늘 밤은 잠을 좀 잘 수 있을 것이다.
아까보다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콧노래를 살짝 흥얼거리며 정원으로 향하던 중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어라? 뭐 하는 거지.’
델테르는 우뚝 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또 엮이긴 싫은데.
나는 흥이 식어 버린 탓에 몸을 돌렸다.
델테르와 대화를 또 나눠야 한다니.
한 번이면 되지 두 번은 별로.
미련 없이 다른 정원이라도 거닐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잠시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곤 뒤돌아 델테르를 한 번 더 보았다.
여전히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였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정원에 숨겨진 것도 없을 텐데 뭘 저리 유심히 보고 있을까.
“아 궁금한데.”
아니, 때론 궁금함을 참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으으으!”
진짜 후회할 건데! 돌아가는 게 나을 건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푸는 것을 반복했다.
“아, 몰라!”
오늘 밤은 푹 자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 하는 행동은 충분한 숙면을 위해서다.
역시 인간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델테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천천히 델테르에게 다가갔다.
‘내 기척을 못 읽었나?’
이렇게 가까운데. 이상한 일이었다.
델테르라면 진즉 내 기척을 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내 기척조차 읽지 못할 정도로 패닉 상태 같았다.
나는 손으로 툭툭 델테르의 등을 두드렸다.
“여기서 뭐 하세요?”
“쉿.”
그가 황급히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뭐길래 이래?
델테르는 잠잠해지는 나를 확인하곤 손을 뗐다.
“여긴 왜 왔지?”
그가 작게 속삭였다.
안 그래도 바짝 붙어 있는 통에 숨결이 닿아 기분이 좋지 않는데 말이야.
이런 속삭임이 달갑게 느껴질 리 있겠는가.
나는 퍽 기분이 상했다.
“전하께서 착각하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여긴 제집인데요.”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할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나?”
“아니요, 물어보셔서 대답한 건데요.”
나는 퉁명스런 어투로 말했다.
그가 작게 속삭이는 통에 나까지 조곤조곤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델테르의 옆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제야 앞의 상황이 보였다.
“어?”
제니스를 몰래 훔쳐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델테르가 그토록 멍하니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
그 이유는 제니스와 리온과 함께 있어서였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정말 서로 뭔가가 끌리긴 하나 보네.’
리온이 뒤에 있는 정원에 종종 오긴 했지만 이런 밤에 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낮에 나와 가끔 산책을 한다든지, 고민이 있을 때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가곤 했었으니까.
“괜찮으세요?”
나는 델테르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러게요.”
그에게 아는 척을 해서 어쩌겠다고. 정신 차리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눈빛이 안 괜찮아 보여서요.”
그를 향해 별다른 뜻은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대충 둘러대기 위해 한 소리였는데 그는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안 괜찮아 보이나?”
아까부터 왜 이렇게 질문을 해 대는 걸까.
마치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입을 일자로 다물곤 리온과 제니스를 응시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고 있는 거야?’
제니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반면 리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둘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철저한 무시 때문인지 델테르의 인내심이 다다른 듯했다.
나를 향한 시선이 뜨겁다 못해 살기마저 느껴졌으니까.
‘그만 좀 쳐다봐라.’
그렇게 쳐다보면 할 말도 못 하겠어.
말 한 번 잘못 했다간 저 눈빛에 죽을지도 몰랐다.
물론, 이곳은 벨루아 가문의 영토였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제 얼굴 뚫리겠어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너무 괜찮아 보이시니 그만 쳐다보면 안 될까요?”
그제야 델테르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안도의 숨을 내뱉는 것도 잠시 리온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헙.”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곤 델테르를 잡아당겨 몸을 숙였다.
숨을 필요는 없었는데 왠지 마주쳐선 안 될 것 같았다.
바스락. 바스락.
풀잎이 발에 밟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아.
바람이 불어 나무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스산한 소리를 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지척에 다다른 발소리가 바로 앞에 우뚝 멈췄다.
나는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나와 눈이 마주친 건 역시나 리온이었다.
기척을 읽어 내는 건, 기가 막히다니까.
“전하? 왜 그러고 계세요?”
뒤따라온 제니스가 델테르를 발견하곤 물었다.
나와 델테르는 짧은 찰나에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리온과 마주 섰다.
그의 시선이 이윽고 내 손목으로 향했다.
푸른색 리본이 매여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떼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가씨.”
리온이 나를 지칭하는 단어에 흠칫 몸이 떨렸다.
아가씨.
하긴,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
당연한 것이었는데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산책을 하다가…….”
전혀 믿지 않는 눈치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그였으니까.
리온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거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네가 왜 제니스 황녀와 함께 있지?”
델테르의 말에 리온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제니스는 힐끔 리온을 쳐다보다 이내 델테르의 앞을 막아섰다.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났어요. 이번 공고에 지원을 했다고 들어서 궁금한 것을 묻던 중이었어요.”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두려워하고 있네.’
델테르가 제니스에게 어떻게 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유치하게 괴롭혔겠지.’
한눈에 반한 여자가 자신의 배다른 누이라니. 속이 비틀릴 법도 하지.
“여기 정원에 꽤 예쁜 꽃들이 많죠. 구경은 하셨나요?”
나는 제니스를 향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잔뜩 긴장한 채 델테르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리온 경께서 안내해 주셨어요.”
제니스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리온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끌리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어머, 그랬군요. 리온 경이 황녀님을 잘 챙겨 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여요.”
그나저나 리온이 제니스에게 정원을 소개해 줬다고?
의외였다.
나는 리온을 빤히 쳐다보다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래도 제법 잘 지내는 것 같네.’
붙어 나가기 전에 안면을 텄으니 문양이 제대로 생기게 된다면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인연이었다고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고.
“호위 기사가 주인의 곁을 떠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나?”
내 얼굴에 핀 미소를 본 델테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호위 기사라고 말했긴 했으나 여긴 백작가 안이지 않은가.
리온 말고도 나를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은 곳곳에 널렸다.
“다들 숨어서 절 지켜보고 있어요. 모르시진 않잖아요?”
나는 델테르를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그가 리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앞 전에도 내게 경고했지 않은가.
“주제를 알아야지.”
쯧- 하고 델테르가 혀를 찼다. 그의 말에 제니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제 주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죠.”
리온이 내게 한발 다가와 내 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로 제니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제길.’
리온이 아니라 내가 쓸데없는 오해를 산 것 같다.
“저는 제 주인인 엘르 나타시아 아가씨가 아닌 그 외에의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리온을 살짝 밀어내곤 고개를 위로 들었다.
리온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였다.
나를 잡고 있는 손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니 황태자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니스의 눈이 커다랗게 홉 뜨였다.
왜 하필 마주 보고 서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리온의 말에도 웃을 수 없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복잡하게도 얽힌 세 명의 운명에 끼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불편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단단히 나를 잡고 있는 리온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가 풀린 셔츠 사이엔 희미한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