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20)

제37화

똑똑똑.

“엘르 아가씨,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어김없이 에드가가 나를 찾았다.

그놈이 일러바쳤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를 알아낸 것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함이리라.

나는 머리를 또르륵 굴렸다.

‘뭐라고 둘러대지.’

문양이 있는 것을 곧바로 말했다간 그 영식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서로 입 다물기로 했지 않은가.

리온에 대한 소문이 밖에 나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니까.

내가 더 손해인 것 같긴 하지만,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 갚아 줘도 될 문제였다.

“혹시 그사이에 사고라도 치신 건 아니죠?”

디리아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친 사고는 아니었다. 리온이 쳤으니까.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 리온의 신변은 내가 보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이죠?”

디리아의 걱정 어린 시선에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으니까.

“응, 그저 영식과의 만남이 어땠는지 궁금하셔서 그럴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저는 백작님이 아가씨를 찾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고요.”

하긴, 이곳에서 리온 말고 내 안위를 걱정해 주는 것은 디리아가 유일하긴 했다.

요즘 들어 시녀들과 부쩍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 또한 얼마나 갈지 모르지 않은가.

디리아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는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이름도 모르시는 건가요? 왜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그냥 이름을 입에 담고 싶지 않으니까.

“이름이 중요해? 어차피 가문끼리 필요에 의해서 얼굴 한 번 봤을 뿐인데.”

“그 말도 맞네요! 하지만 그분과 같은 문양이 생겨나면 정말 인연이라 생각할 것 같아요.”

정말이지.

디리아는 문양을 향한 환상이 너무 심했다.

그녀는 아직 문양이 생기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문양이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은 모양이다.

“다녀올게.”

나는 활짝 웃으며 문을 닫았다.

안내해 주는 시종장을 뒤따라가는 내 표정은 어느새 싸늘하게 굳은 채였다.

* * *

에드가의 집무실에 가던 나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아, 진짜 오늘 X같네.’

하필이면 에드가에게 가는 길목에서 델테르를 마주친 것이다.

‘지 집도 아니면서 잘 돌아다니네.’

꼴 보기 싫은 마음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나는 상념에 잠긴 척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걸었다.

“……앞은 좀 보고 다니지? 그것도 아니면 못 본 척하려는 술수였나?”

역시나 델테르는 이런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칫. 너무 티 났나? 역시 그랬겠지.

그를 못 본 척 지나가려는 계획이긴 했다.

“어머, 전하께서 이 시간에 왜 이곳을 돌아다니고 계시는지.”

결국 능청을 떨며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델테르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야말로 지금 너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그냥 지나치면 서로 피곤할 일이 없을 텐데.

왜 자꾸 아는 척을 하려는 건지.

황족이라 그런가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병이라도 나나?

“아버지를 만나고 가시는 길인가요?”

“내가 그렇게 한가하게 보이나?”

“하하……. 설마요.”

매우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게 되겠지.

“그럼, 그대야말로 백작을 만나려고 온 건가? 생각보다 둘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그런가요? 저희는 이게 일상이랍니다.”

부르면 가야 하는 갑을 관계랄까.

델테르는 의외란 얼굴을 하며 나를 훑어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제니스 황녀를 보지 못했나?”

“글쎄요. 저도 방금까지 일이 있었던 터라.”

“벌써 백작가의 일을 돕는 건가?”

뭐야, 그 깔보는 눈은.

마치 네가? 픽. 하고 웃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에 내가 뭔들 마음에 들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지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와 사이가 좋아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시녀들에게 찾아봐 달라 할까요?”

“뭐, 이 작은 백작가에서 사람 찾는 게 얼마나 걸린다고. 됐다.”

“……아, 네.”

그럼 그러시던가.

나는 델테르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곤 갈 길을 다시 가려 했다.

“혼담이 들어왔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래?

백작가에 스파이라도 있나?

델테르에게 백작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일러바치는 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무려 황태자이지 않은가. 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뭐 이참에 배신자를 색출해 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에드가에게 가는 김에 귀띔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이 좋은 건물이 방음이 하나도 안 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가문과는 얽히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세드릭 아멜란이었던가.”

“……왜요?”

엮일 생각도 없었지만,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멜란 공작가는 허울뿐인 명예만 지닌 가문이다. 곧 멸문할 위기에 있어.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모르다니.”

에드가는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뭘 얻으려 한 거야?’

날 팔면서까지 얻으려 한 정보가 별거 아니라면 내 기필코 오늘 한바탕하고 말리라.

“그런데 왜 그런 걸 제게 알려 주세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해 주는 거지?

오히려 내가 그런 가문과 결혼을 하면 그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델테르가 무슨 변덕으로 내게 정보를 내어 주는 건지 알아서 뭐 하겠어.

“가만 보면 전하께서는 제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나는 멈춰 서서 고개만 돌려 델테르를 보았다.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을 것 같나?”

그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비웃거나 말거나, 관심 없으면 됐어.

“그럼 알려 주신 김에 하나 더 알려 주실래요?”

“내가 또 무슨 소릴 들으려고.”

그는 퍽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뭐, 가련한 중생 구한 셈 치고요. 대신 저도 제니스 황녀님이 가실 만한 곳을 알려 드릴게요.”

찍는 거긴 하지만. 우리 백작가에 그녀가 갈 만한 곳은 한 곳뿐이긴 했다.

“아멜란 공작가에서 다음 경매에 참가할 거야.”

“어떤 경매요?”

“그런 건 좀 알아서 찾아보지 그래?”

여기까지인가 보다.

그래도 정보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마음이 놓였다.

“황녀님 아마 백작가 뒤에 있는 정원에 있을 확률이 높아요.”

“왜지? 다른 곳에도 정원이 있을 텐데.”

“거긴 다른 곳에서 잘 볼 수 없는 꽃들이 많거든요.”

예쁘게 활짝 핀 꽃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홀려 정원을 걷게 될 것이다.

자의로 온 것이 아니라면 속이 답답할 터.

산책하러 간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럼 저는 이만.”

나는 멋지게 등을 돌려 가려고 했다. 곧이어 델테르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지만.

“아, 참. 네 호위 기사 말이다.”

“……네?”

“쓸데없는 관심은 접어 두라고 해.”

“그게 무슨?”

갑작스런 말에 눈을 깜빡였다.

리온이 황태자에게 관심이라도 던져 준 건가?

그의 성격이라면 그럴 리 없을 텐데.

“제니스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일개 호위 기사 주제에 황녀를 넘보다니.”

……그건 네가 리온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넘보다니. 델테르가 몰라서 그렇지 리온은 제니스에게 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델테르의 말에 헛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허.”

“지금 비웃었나?”

“아니요, 그럴 리가요. 호위 기사가 귀한 분을 처음 봐 무례했나 봅니다. 일러두겠습니다.”

그는 내 변명에 의문 어린 시선을 했다.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제가 오늘 많이 시달릴 예정이라. 한숨이 절로 나오네요.”

허, 허허. 퓨우우.

나는 델테르의 시선을 의식한 채 보란 듯이 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그를 떼어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도 근심이 많아 보이세요. 역시 이곳이 불편하신 거죠?”

델테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난 이곳이 더 편한데, 그대가 불편한 모양이군.”

허어어.

원수나 다름없는 벨루아 가문에서 머무는 것이 편하다니.

내가 그의 말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편히 쉬세요. 저는 아버지께서 기다리셔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운명이 그들을 같은 곳으로 이끌 텐데.

저런 걸 보면 내심 안쓰럽다는 말이지.

“……그 표정은 뭐지?”

아차.

나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다.

“아까부터 말이야. 계속해서 거슬리는 게.”

델테르의 인내심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제는 정말 대화를 그만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제가 오늘 피곤해서 그러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하하하.

나는 어색한 미소를 남기곤 그가 나를 잡기도 전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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