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20)

제36화

“허!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짓……!”

화가 난 듯 영식이 테이블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온의 멱살을 잡기 위해 그가 손을 올리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제 시종에게 손을 댄다면 저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나는 부채를 탁 하고 펼치며 영식에게 낮게 경고했다.

‘아, 이름도 안 물어봤네.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에드가는 참 기본적인 정보라도 주지 그랬어.

이제 와 이름을 물을 수도 없고…….

하지만 한 번 더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겠어.

“영애, 나는 지금 이 시종이 왜 이런 불경한 짓을 했는지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그가 이를 꽉 깨물며 내게 말했다.

그건 내가 리온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어디에서도 시종이 혀를 사용해 찻물을 닦아 주진 않습니다.”

당연하지. 어디에서 이렇게 하겠어?

영식의 말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다.

“뭐, 그건 그렇죠. 일반적인 곳이라면.”

“일반적인? 그 말은 벨루아 가문은 일반적이지 않은 가문인가 봅니다?”

명백히 비꼬는 어투였다.

나는 카트에 올려진 손수건을 테이블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하아, 에드가가 알면 또 난리 치겠네.’

답이 없었다. 인제 와서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의 피부는 부드럽죠. 혀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입니까?”

“전 이런 싸구려 손수건을 잘못 쓰면 두드러기가 나서요.”

내 말에 이름도 모를 영식이 헛웃음을 뱉어 냈다.

“종종 시종의 혀를 손수건 대신해서 사용하곤 하죠. 꽤 따뜻하고 부드럽거든요.”

“허! 그게 지금 말이라고!”

그가 또다시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신경질이 나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다 이내 영식의 손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둘 사이가 꽤 진척이 있는 사이라면 타액 정도야 더럽지 않겠죠.”

어차피 그와 혼인할 생각도 없었는데, 이렇게 된 거 좀 깽판 쳐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확실한 것 같은데.

나는 팔짱을 끼곤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요즘 다들 이렇게 재미 좀 본다면서요?”

“하? 급 떨어지게 누가!”

“어머, 제가 들은 것과는 꽤 다른데요.”

사실 들은 건 없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 있긴 했다.

혼인하기 전 애인을 만드는 것. 은밀하고 꽤 스릴 있는 사이 말이다.

“괜찮으시면 세컨이라도?”

“하! 이런 무례한.”

“당신도 저한테 무례하게 했잖아요?”

나는 부채로 그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손목에 떡 하니 문양이 드러났다.

‘개새끼.’

역시 맞잖아. 아까 잘못 본 게 아니었네.

“이건……!”

당황한 영식이 황급히 문양을 감췄다.

“아버지의 힘이 좀 탐났나 본데, 이거 어쩌나. 내가 그렇게 호구는 아니라서.”

사실 아까 그가 흥분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걸 제 아버지께서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지 참 궁금하네요.”

나는 생긋 웃으며 부채를 접어 턱에 받쳤다.

“어떻게 할래요?”

내 말에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어떻게 되시더라?”

“…… 세드릭, 세드릭 아멜란입니다.”

세드릭은 모멸감에 찬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 문양이 발현되지 않았다더니, 그것도 거짓이었고.

그럼 나이도 속였다는 거네.

나는 싸늘한 눈동자로 그를 훑어보았다.

“세드릭 아멜란 영식. 당신의 반려가 될 분이 불쌍하네요.”

진심이었다. 저딴 놈과 사랑에 빠지게 되다니.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자, 그럼 오늘 일은 서로 각자 잘 이야기하는 걸로 하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곤 리온을 향해 눈짓했다.

“이렇게 남들이 있는 앞에서 티를 내면 곤란하다니까. 이리 와.”

가만히 서 있던 리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리온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리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흠칫.

“……엘르?”

아까의 기백은 어디 가고 또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어, 쉿. 쉿. 리온 이대로 응접실을 나가자.”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는 세드릭을 흘깃 보곤 밖으로 나섰다.

* * *

“그런데 리온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방금 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을 듣고자 했다.

그런데 리온은 입을 열지도 아무런 변명도 늘어놓지 않았다.

“응? 리온. 말해 봐. 무슨 생각으로 시종 행세를 한 거야?”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리온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리온은 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냥, 널 볼 수 있을까 하고.”

“그게 하필이면 내가 공작 영식을 만나고 있을 때였는지 묻는 거야.”

“……너에게 혼처가 들어왔다길래 궁금해서.”

아.

또 저런 표정이네.

나는 결국 더는 따질 수 없었다. 뭐, 일도 잘 마무리가 되긴(?) 했으니까.

“알고서 온 거야?”

“……우연히 봤어.”

“그럼 귀띔이라도 해 주지. 아까 그런 행동은 앞으로 하지 마.”

너에게도 나에게도 안 좋으니까.

“……엘르, 난 너에게 문양이 나타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해.”

리온은 내 말에 대답 않고 대뜸 문양에 대해서 말했다.

하긴 자유롭긴 했다. 문양이 나타나는 순간 반려가 정해지는 거니까.

문양이 나타났다면, 저런 이상한 놈의 반려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음, 뭐. 이번은 그렇긴 하지. 그런데 갑자기 문양은 왜?”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다른 놈 옆에서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건 지금도 잘 웃고 그러는데.

나는 리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도 곧잘 웃었다.

“음, 리온? 나는 잘 웃고 다니는…….”

또, 또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그리고 리온이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 고는 리온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리온은 내게 잡힌 손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네가 먼저 내 손을 늘 잡아 주잖아.”

“이건…… 어쩔 수 없었잖아. 계속 그곳에 있을 수도 없고.”

황급히 변명을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손을 잡고 있었을 줄이야.

꽉 잡았던 리온의 손을 스르륵 놓아주었다.

리온은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리온, 준비는 잘 되어 가?”

“……응.”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만 가 봐야겠어. 아버지가 날 찾을 것 같기도 하고.”

핑계긴 하지만, 둘이 이렇게 있는 건 위험하지.

그리고 정말로 에드가가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 아까의 일을 공작에게 다 일러바쳤다면.

리온은 제게서 멀어지는 내 소매 끝을 잡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엘르, 넌 나만의 친구고 가족이잖아. 내 하나밖에 없는 가족. 그리고 나만의 작은 세계.”

“……어?”

“그러니까 네 손목엔 내 리본만이 있었으면 좋겠어.”

리온이 내 손목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의 눈동자엔 또다시 씁쓸함이 내비쳤다.

* * *

방으로 들어온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도망쳐 온 사람처럼 보였다.

“디리아! 얼음 띄워서 찬물 좀 줘!”

내 말에 디리아가 영문을 모른 채 얼음물을 가져왔다.

그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분명 지금 세드릭 영식과 만나고 있어야 하는…….”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야기를 제지했다.

“디리아. 그놈 이야기는 하지 마. 이야기 들으면 너도 기겁할 테니까.”

그놈 손목에 문양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하지?

일단 이걸 약점으로 잡아 이용할 생각이긴 한데.

‘이걸 지금 터트리긴 곤란해.’

조금 더 두고 봐야 했다. 리온이 엮여 있으니까.

나는 곧장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까 리온의 행동은 마치…….

아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여전히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디리아, 한잔 더!”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묻지 마. 입 밖으로 내뱉으면 또 난리 날 것 같으니까.”

디리아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원했던 찬물 한 잔을 가져와 건넸다.

또다시 벌컥벌컥 마시자, 목구멍을 타고 가슴 아래까지 시원함이 퍼졌다.

부족해. 이래도 진정되질 않잖아.

“아가씨, 천천히 마시세요. 그렇게 찬물 빨리 마시면 심장이 멈출지도 몰라요.”

“좀 멈췄으면 좋겠다.”

“무슨 그런 무서운 이야길 하세요! 큰일 나요.”

디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야.”

나는 진심이었다.

심장이 너무 미친 듯이 뛰어 터질 것만 같았다.

진정해 이 미친 심장아.

나는 테이블에 쾅 하고 머리를 박으며 눈을 감았다.

“……정말 어떻게 하려고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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