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리온은 가만히 제니스를 응시했다.
체취도 목소리의 높낮이도 전혀 달랐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눈앞의 여자는 시내에 보았던 그 여자가 틀림없다.
황녀라고 했던가?
그의 시선이 이윽고 손목으로 향했다.
“문양이 있군요.”
“아……. 최근에 생겼어요.”
리온은 제니스의 말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손목 다치셨어요……?”
제니스는 붕대로 감긴 리온의 손목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피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리온의 손을 잡았다.
탁.
“……죄송합니다. 남이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송해요.”
제니스는 아릿한 통증에 손을 감싸 안았다.
무례했나 봐.
괜스레 민망해져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리온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가면이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가면은 왜 쓰고 계시는 거예요?”
“그걸 제가 말해야 하는 의무는…….”
왜, 모질게 말할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리온은 인상을 구겼다.
역시나 거슬리는 여자이지 않은가.
“잠시 손목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단순히 확인을 위해 제니스의 팔을 잡았다.
색이 조금은 드러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도 문양만 어렴풋이 보였을 뿐 색은 없었다.
“……저 왜 그러시는 건가요?”
제니스가 한껏 움츠러든 채 리온에게 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양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리온의 말에 제니스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문양은 다른 이들에겐 신기한 거구나.
하긴,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양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가.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 네……. 제가 방해했나 봐요.”
제니스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리온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 발걸음을 옮겼다.
“옷이 젖은 것 같으니 빨리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말 한마디만 던지고 제니스를 지나쳤다.
정말로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제니스는 리온의 태도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상처를 받고 있는 걸까.
젖은 드레스에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면서, 어쩐지 제 마음도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 * *
아! 정말! 대체 왜 이렇게 나를 찾는 거야.
안 그래도 집에 눌러 붙은 델테르와 제니스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아침부터 나를 찾는 에드가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집무실로 향했다.
델테르와 제니스의 얼굴을 아침부터 보지 않아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드가의 얼굴은 보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다.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집무실의 문을 발로 뻥 찼다.
씩씩거리는 내 모습에도 에드가는 덤덤히 차를 홀짝였다.
예상했다는 저 태도!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재수 없어!!
“아침부터 제발 안 부르시면 안 될까요? 뭐 좋은 사이라고 얼굴을 보고 하루를 시작해요?”
내 말에도 에드가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내게 고개를 까딱하며 가까이 오라는 행동만 취했다.
“이번엔 또 뭔데요.”
“이거나 봐.”
나는 에드가가 내민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뭐가 이렇게 많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다.
조항과 더불어 정보상에 대한 내용이 주르륵 쓰여 있었다.
“저 안 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에드가를 보았다.
자꾸 자기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하는 통에 죽을 맛이었다.
“봐 둬. 필요할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이걸 왜 해야 하죠? 어차피 정보상을 할 생각이 없는데요.”
“알아. 줄 생각도 없어.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허어.
그게 목적이었구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 이건가.
뭐 얼마나 돈이 들어갔다고 그래, 이제 와 갚으라고 하다니.
“……좀생이.”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
“다 들려.”
에드가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여유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면 하시긴 할 거예요?”
“네 수완이 좋다면.”
어라?
그가 내 말을 들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마음이 달라지지.
“그럼, 이 광산 사업 이렇게 해요.”
“싫다.”
아 뭐야! 한다며! 한다고 그랬잖아.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곤 에드가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그럼, 저도 안 할래요. 지금까지 제가 하란 대로 해서 잘 안 되었던 거 있었어요?”
에드가는 내 당당한 모습에 조소를 머금었다.
어디 한 번 더 지껄여 보라는 행동이지 않은가.
“아, 그렇지. 네게 혼담 들어왔다.”
혼담?
갑자기 무슨 혼담이야. 아직 성인이 되려면 조금 남았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손에 들린 종이를 구겼다.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인제 와서 아버지 노릇 하려는 건 아니죠?”
진짜 왜 이래.
오늘따라 에드가가 지나치게 질척인다.
정말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에드가는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춘 그가 낮게 읊조렸다.
“당연히 아니지. 이상한 놈과 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일적으로 만나라는 거야. 어차피 둘 다 문양이 생기면 끝날 사이니까.”
결혼이 그렇게 간단해?
내가 문양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일로 날 이용하겠다는 거잖아.
“……싫다고 하면요?”
“어디 한 번 그래 보던가.”
부들부들.
혈압이 올랐다. 입술을 꽉 깨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또 리온을 걸고넘어질 거예요?”
“네 약점이 그놈이라면 언제든.”
하아.
진짜 끝까지. 더럽고 치사했다.
리온이 합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날 이용할 생각임이 틀림없다.
내가 리온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백작가의 모든 이가 알고 있으니까.
“때마침 황실에서 조사도 나왔고 말이야. 리온을 던져 준다면 꽤 좋은 미끼가 되겠지.”
“……약았어.”
“원래 이런 사람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었을 테고.”
에드가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다 알고 있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하는 수 없이 에드가가 말한 자리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
끔찍하게도 싫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반쯤은 포기한 채 물었다.
“그래서 그게 언제인데요?”
“오늘.”
“뭐요?”
정말 미친 거 아니야?!
그와 동시에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저…… 백작님. 약속한 손님이 왔습니다.”
“때마침 왔군. 응접실로 바로 가면 될 거야.”
* * *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응접실로 왔다.
공작가의 영식이라 그런지 꽤나 멀끔했다.
그는 가만히 나를 보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희 둘이 문양이 함께 발현되면 좋을 텐데요.”
퍽이나.
문양이 발현되지 않아서 서로 이용당한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그런가요? 전 아닌데.”
내 대답에 당황한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정보상을 물려받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벨루아 가문이 운영하고 있는 곳은 귀족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하거든요.”
“그래요? 저는 몰랐는데. 그리고 하나 정정할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정보상을 내가 물려받지 네 거니? 게다가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일까.
나는 팍 인상을 쓰다 이내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비볐다.
너도 돈 좋아하는구나? 나돈데.
“정보상은 물려받을 생각이 없답니다. 게다가 저는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목표거든요.”
“아, 돈이라면.”
“아니 당신 돈 말고, 내 돈이요.”
공작가가 가진 것은 공작이라는 작위, 명예 그뿐이었다. 그리하여 벨루아의 재력이 탐이 난 거겠지.
그게 바로 이 혼담의 목적이었다.
“그러니 당신도 헛꿈 꾸지 말고 돌아가요. 어차피 우리 둘 문양 안 같을 거예요.”
에드가가 내게 만나 보라 한 영식의 가문은 황실과 매우 가까운 가문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황실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정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날 장기 말로 이용할 거면 원하는 바를 제대로 밝히기라도 해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지 끝이 좋지가 않지.
똑똑똑.
“차를 더 드리겠습니다.”
응?
시종장의 목소리가 아닌데.
나는 심각한 얼굴로 영식을 바라보다 차를 따르는 시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
리온이 왜 차를 따르고 있는 거지?
시종장은 어디 가고……?
내게 차를 따라 주고 있는 리온의 눈빛이 무서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 뚫어지겠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주는 차입니다. 향이 좋아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도 좋습니다.”
“벨루아 가문의 시종은 훌륭하군요.”
공작가의 영식은 흡족한 표정으로 리온을 보았다.
“아침부터 보이지 않아 아가씨를 찾았는데…… 여기 계셨더군요.”
“아…… 그, 그랬어요?”
나는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왜 죄지은 기분이 드는 거람.
“이런,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가 익숙지 않아 차를 흘렸습니다.”
“제가 닦으면 되니 괜찮아요……헉!”
리온은 곧장 찻물이 튄 내 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할짝.
내 손등을 핥는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