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리온은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좁은 틈 사이로 델테르와 제니스를 보았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온 것인지는 진즉 알아차렸다.
시내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짐작했으니까.
‘벌써 수사를 시작했나?’
리온은 뒤돌아 제 방으로 향했다. 몰래 엿들을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제니스의 손목에 문양이 나타났다는 말은 선명하게 들었지 않은가.
저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그녀의 문양이라.
확실히 연회에서 그녀와 마주했을 때도 기분이 묘했다.
“하아 황실을 간과했군.”
엄한 곳을 들쑤신 꼴이지 않은가.
황실에 저의 반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을 텐데.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모든 곳을 헤집고 돌아다녔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문양이 나타난 자를 아무리 만나도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늘 제니스를 보지 않았다면 반려가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리온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직까지 엘르는 눈치 못 챈 모양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그녀 역시 위험해질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그건 막아야 했다.
조금 더 곁에 있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제 욕심이 컸던 모양이다.
잠자코 있었다면 모를까.
리온은 다시금 손목의 문양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흐릿하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끝까지 없었으면 했건만.
정확한 색은 드러나지 않았다.
“아니겠지.”
그는 도리어 고개를 저었다. 불현듯 극도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손을 들어 손목의 문양을 쓱 문댔다.
그러나 붉어진 살에 문양은 더욱 선명해지기만 했다.
리온은 방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손목을 문질렀다. 아무리 지워 봐도 소용이 없었다.
문양이 점점 더 진해지는 기분에 초조했다.
이대로 다른 반려가 나타난다면, 저도 모르게 마음을 품게 되지 않을까?
또다시 초조함에 목이 타들어 갔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된다.
그는 방에 놓여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목을 잘라 낸다면 괜찮을까?
이전엔 아예 잘라 내려는 시도는 해 보지 않았었다.
아. 그렇게 되면 시험을 보지 못하겠구나.
‘살을 발라내면?’
그건 괜찮을지도 모른다.
리온은 생각을 끝마침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검 쪽으로 다가갔다.
검을 쥔 그가 자신의 손목을 베어 내듯 힘을 주었다.
주르륵.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아릿한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문양이 사라졌으면 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리온을 비웃기라도 하듯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손목엔 여전히 문양이 어렴풋이 보였다.
실패.
그래 이 문양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리온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오늘 밤에도 그는 엘르의 손목에 문양이 생겼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저와 똑같은 색의 문양이 나타날지도.
리온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목을 응시했다.
‘이런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엘르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는 일이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엘르밖에 없다.
* * *
델테르 카베제르는 가만히 엘르를 응시했다.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데 뭔가 불안해 보이는 것이 신경이 아주 거슬렸다.
“원래, 벨루아 가문은 표정이 그러한가?”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다.
지낼 곳을 내어 주긴 했지만, 내키지 않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오래 있을 건 아니니 표정을 풀지?”
델테르가 엘르를 향해 말했다.
누가 좋아서 이딴 곳에 있고 싶겠는가.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벨루아 가문이 의심되니 직접 가서 살펴 오라는 말만 안 했어도.
게다가 제니스는 왜 데려가라 한 건지.
그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불순한 것은 맞을 것이다.
“백작도 가만히 있는데 그대가 영 불편해하는 게 보이는군.”
“어머, 그랬나요?”
엘르가 황급히 웃으며 입에 고기를 넣었다.
잘근잘근 씹어 대는 모습이 영…….
“맛있어요.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인 것 같아요.”
제니스가 둘 사이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다소 긴장되어 보였지만, 천천히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다행이네, 음식이 입에 맞나 봐.’
엘르는 하인을 시켜 제니스에게 고기를 더 내어 주게끔 했다.
“많이 드세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델테르의 손이 멈췄다.
제니스를 바라보던 그의 눈가가 가라앉았다.
“그렇겠지. 출신도 모르는 자가 이런 귀한 음식을 먹었을 리 있겠어?”
말을 해도 참.
엘르는 델테르를 보며 고개를 털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저렇게밖에 마음을 표현 못 하는 건가.
“전하께선 참…….”
많이 배우셔야겠네요.
저래서야 여자의 마음을 얻기야 하겠는가.
델테르의 마음을 제니스가 알긴 알까.
그걸 생각하자 조금은 안쓰럽게 여겨졌다.
엘르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언제까지 머물 생각인가요……? 피차 서로 불편한데 오래 머물 건 아니죠?”
그녀의 말에 델테르 카베제르의 말문이 막혔다.
그때도 느꼈지만, 저를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대범하지 않은가.
그런 점이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확인만 되면 갈 테니 걱정하지 마. 누가 이런 곳에 계속 머물 생각이라 했나?”
말이라도 못하면.
정말 입만 안 열어도 반은 갈 텐데.
엘르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그럼요, 어서 빨리 원래 자리로 가셔야죠.”
그럼 이참에 하나 물어나 볼까.
엘르는 넌지시 델테르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공고가 벌써 떴나요? 전쟁이 일어나기라도 하나요?”
델테르는 팔짱을 낀 채 엘르를 빤히 보았다.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알기 위함이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아, 벨루아 가문에서도 지원을 할 생각인가.”
그가 보기엔 엘르는 어떠한 능력도 없어 보였다.
공고에 지원하기 위해선 자격 요건이 필요했다.
전쟁이 바로 투입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
“제가 지원할 것 같나요?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엘르는 턱을 괴곤 해사하게 웃었다.
그저 리온을 위해 정보를 캐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델테르를 보니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빠르게 포기했다.
에드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들을 머물게 한 것일까.
눈앞에 투 샷을 보고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긴 하지만.
내 공간까지 침입하니 그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둘 사이에 스파크가 파바박 튀는 와중에 제니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엘르와 델테르의 시선이 이윽고 제니스에게로 쏠렸다.
화들짝 놀란 건지 그녀가 옷에 물을 쏟은 것이다.
“괜찮아요. 시녀를 부를게요.”
엘르는 곧장 시녀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제니스가 한사코 말렸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물을 엎지른 것인데 시녀가 오면 헛일이지 않은가.
제니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가 봐야겠네요. 먼저 일어나도 괜찮을까요?”
“그러든지. 있어 봤자 도움도 안 되는데.”
델테르의 말에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인사만 한 그녀는 곧이어 미련 없이 식당을 나섰다.
엘르는 그런 그녀를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 * *
‘힘드네. 역시 그냥 황실에 있을 걸 그랬어…….’
제니스는 복도를 걸으며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호위 기사는 분명 연회에서 봤던 사람인 것 같은데.
그녀는 기억을 되짚었다. 어렴풋이 봤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궁금하다.
어떤 사람인지. 가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어쩐지 마주했을 때 심장이 거세게 뛰지 않았던가.
제니스는 제 손목을 매만졌다.
정말로 제 반려가 있는 걸까? 어느새 드러난 문양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다시 보고 싶어, 궁금해.”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젖은 드레스 자락이 축축했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가면을 쓴 남자로 가득했다.
어쩌면 저와 비슷한 분위기 때문에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걸어가던 제니스의 발걸음이 이내 멈췄다.
정원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달빛에 비친 남자의 머리카락이 이내 반짝였다.
‘검은색.’
제국엔 검은 머리를 가진 이가 없었다.
저주를 받은 이라는 소문을 듣기도 했고, 벨루아 가문에 그런 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제니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이내 반짝였다.
‘혹시, 아까 그 사람일까?’
그녀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정원으로 향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냥 가 보고 싶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그를 다시 보게 될지도.
넘어지지 않게 잡아 준 것에 제대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인사를 하리라.
‘엘르 영애의 호위 기사라 했었지.’
기사라…….
저를 호위하는 이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매번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는 그들과는 다른 눈빛.
엘르를 보는 그의 눈동자엔 다른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제니스는 빠르게 정원으로 뛰었다.
제 옷이 젖어 있단 것도 깜빡한 듯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저……하아.”
달려온 탓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날씨는 어찌나 추운지 온몸에 한기가 서렸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대답은 날이 선 검뿐이었다.
“누구지?”
잔뜩 경계하는 어투로 살의를 가진 리온의 목소리에 찌르르 마음이 아팠다.
제니스는 너무도 놀라 딸꾹질을 해 댔다.
달빛에 비친 은빛 목걸이가 이내 반짝였다.
“엘르……?”
이상하다. 엘르가 아닌데 엘르의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리온은 제 눈앞에 있는 제니스를 보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