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20)

제33화

‘한눈에 반한 건가?’

나는 제니스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살짝 보았을 때 아직은 문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건 리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온의 손목을 힐끔 보자 옷으로 꽁꽁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으음, 그런데 경비가 많아 보이네.”

황태자가 여기까지 온 것도 그렇고. 뭔가가 이상하긴 했다.

“그건 아마도 요즘 일어나는 이상한 일 때문일 겁니다.”

무기 점 주인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나와 리온은 눈을 마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이상한 일이요?”

보고 받은 바는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변방이긴 하나 에드가가 잘 통치하고 있었다.

잡다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 꽤나 평화로운 영지라 생각했는데.

“그게 좀 섬뜩합니다.”

“‘섬뜩’이요?”

“문양이 드러나는 사람마다 괴한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이들이 많아졌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수사에 들어갈 만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난 듣도 보도 못했다.

혹은 에드가는 알고 있었음에도 쉬쉬했거나.

하여튼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단 말이지.

“죽진 않았다는 말이죠?”

“예, 예. 다만 문양이 나타난 곳에 꽤 상처가 깊어서.”

이 세계에서 문양은 꽤 중요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염원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양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공격하다니.

누가 봐도 그 어떤 문양도 없는 이들이 벌인 일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것도 아니라면…….

붉은 달의 문양을 가진 이들이 벌인 일이거나.

그들은 반려가 생기는 것 자체가 저주였다. 그 끝의 결말은 죽음이었으니까.

결국 반려가 각인되기 전에 찾아내 죽이는 것이 자신이 살길인 셈이었다.

무엇이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리온, 빨리 돌아가야겠어.”

“그러는 게 좋겠네.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한 것 같으니까.”

리온은 내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 점 주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작게 말했다.

“밤에만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얼굴을 본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하는 걸 보면 보통 뛰어난 솜씨가 아닌 거죠.”

주인은 두려운 눈빛으로 제 손목에 드러난 문양을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서로 반려가 있는 이들에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더 이상하네요.”

문양이 목적이라면 가리지 않아야 할 텐데.

왜 문양이 드러나 반려를 아직 찾지 못한 이들을 공격하는 걸까.

나는 짐짓 리온이 걱정되었다. 그가 가지게 될 금빛 문양을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재빠르게 고개를 털었다.

“역시, 빨리 가야겠어.”

리온은 점장의 말을 들었음에도 무덤덤했다.

무섭지도 않은 건가? 자신이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하긴, 나라도 리온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겁날 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찝찝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에드가에게 향했다.

이 사항을 모른다면 알려 줘야 했고, 안다면 왜 내게 숨겼는지 이유를 들어야 했으니까.

쾅.

문을 다짜고짜 열어 버린 나로 인해 시종장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제가 잠시 기다려 달라 했지 않습니까…….”

그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있을 줄은 몰랐지.

나야말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묻고 싶었다.

왜, 황태자와 제니스가 백작가에 있는지 말이다.

마차를 보지 못했는데? 다른데 잠시 맡기기라도 했나?

“이해하십시오. 제 딸이 워낙 과격한지라.”

에드가는 놀란 기색도 없이 황태자에게 말했다.

하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뒤 돌아 문을 닫았다.

그 찰나 마주쳤던 리온의 눈동자에는 체념이 묻어나 있었다.

그가 가면을 아직 벗지 않아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닫힌 문을 등지고 황태자와 제니스를 보았다.

“오늘따라 자주 마주치는 느낌이네요. 전하.”

“다시 보자고 하지 않았나.”

그게 이렇게 빠른 줄은 몰랐지. 곧바로 보게 될 줄이야.

무엇보다 내 목숨을 위협하는 둘이 내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로 왔지? 내 따님께서 굉장히 급한 일이 있나 본데.”

그놈의 따님 소리.

에드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았다.

나 역시 그에 응당한 태도로 활짝 웃었다.

“저희 영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을 들어서 말이에요.”

그가 묻기에 가감 없이 말했다.

그제야 에드가의 인상이 썩어 들어 갔다.

그래, 저 표정 오랜만이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황실에서 친히 이곳으로 왔다는구나.”

역시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뭐, 사심도 채운 것 같긴 하지만.

제니스의 옷차림을 본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벨루가 가문이 있는 곳에서만 유행하는 옷으로 맞춰 입고 있지 않나.

하늘하늘한 옷과 레이스로 겹겹이 올려진 치맛자락.

그리고 붉은 다이아몬드로 제작된 목걸이까지.

“그래서 뭐 좀 알아내셨어요? 아까 보니 쇼핑만 하시는 것 같던데.”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정말로 사심 1도 없이 공적인 일을 위해서 온 거 맞아?

아닐걸?

“온 김에 변방의 문화도 경험하긴 했지. 아, 물건을 사면서 정보도 수집하고.”

델테르는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에드가는 속도 없나. 황실하고 그렇게 사이가 안 좋다면서 여긴 왜 들여보내 줬대?

저번에 내 손목을 잡으며 내 딸 어쩌고 하면서 화낼 땐 언제고.

“수사 협조를 할 정도로 사안이 큰지라.”

에드가는 곧바로 내게 말했다. 내 눈빛을 읽은 모양이다.

“설마 수도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뭐, 없진 않지.”

델테르는 애매하게 대답하며 나를 빠르게 훑었다.

“아까 건방진 호위는 어디 가고 혼자 왔지? 문밖에서 기다리는 건가?”

“……호위 기사?”

아뿔싸.

에드가에게 말하지 않고 갔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리온과 함께 나간 걸 들킬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제니스를 가리켰다.

“그, 그나저나! 황녀 전하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참 잘 어울려요. 하지만, 이 색보다는 다른 색이 더 예쁠 것 같은데.”

놀란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는 제니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잠시 실례할게요.”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걸려 있는 붉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래,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에게 붉은색보다는.

내 목에 걸린 은빛 목걸이를 풀어 제니스에게 걸어 주었다.

붉은색 목걸이는 제니스의 손에 쥐여 줬다.

“이 색이 훨씬 잘 어울리세요. 어때요?”

나는 제니스를 델테르와 에드가에게 보이며 웃었다.

그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스는 제 손에 들린 붉은색을 보더니 웃었다.

“그러네요……. 이건 엘르 나타시아 영애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제니스는 내게 자신의 목걸이를 건넸다.

“붉은색이 참 잘 어울려요.”

그녀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 이거 이상하게 선물을 교환한 셈이 되었네.

“다른 이들이 알면 꽤 즐거워할 일이군. 안 그런가? 에드가 드 벨루아 백작.”

못 잡아먹어선 안달인 황실과 벨루아 가문이 뭔가를 주고 받았다라.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 그럼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요?”

다시금 내게로 쏠린 시선에 화제를 돌렸다.

리온의 이야기가 나와선 안 된다.

절대로 그의 정체가 벌써 탄로 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됐다.

“그런데 황녀님과 황태자 전하께선 문양이 나타나셨나요?”

나는 그들의 손목을 번갈아 보았다. 시내에서 잠시 봤을 땐 그 무엇도 없었다.

“뭐, 선명하진 않지만.”

델테르가 제니스의 손목을 잡아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 안쪽에 흐릿하게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 문양이.”

아까는 없었는데?

당황한 내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델테르는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인지라.”

“황실 근위대도 있잖아요?”

황제가 그토록 아끼는데 제니스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내 생각엔 제니스를 노리는 것 같아.”

“왜요?”

변방까지 만연하다면, 이들은 목적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했다기엔 꽤 당한 이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단체로 움직인다는 것인데.

델테르는 이 모든 것이 황실에 대적하는 이들이 벌인 일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벨루아 가문을 의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설마, 저희 가문을 의심하는 건가요?”

“아니라곤 못 하지.”

델테르는 팔짱을 끼곤 나를 응시했다. 에드가가 그를 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밖에 새어 나가 봤자 우리에게 도움이 되진 않을 테니까.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네요, 아버지.”

“어차피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났으니 상관은 없지.”

에드가는 책상을 툭툭 치며 제니스의 손목을 살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벨루아 가문에서도 이미 조치를 취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죠.”

그는 제법 예를 갖추고 말했다.

황실에서 공무 집행을 이유로 이곳에 왔으니 막 나갈 수도 없었을 터.

“이를 어쩌지, 에드가 백작. 나는 감사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야겠는데.”

그의 말에 에드가와 나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저 개자식이 어디에 머문다는 거야?

델테르가 이곳에 있게 된다면 리온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래도 리온을 수도로 보내야 할 것만 같다.

리온이 수도에 가서 전쟁터로 가게 되면 어차피 제니스 또한 차출될 것이 뻔했다.

문양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녀에게도 힘이 생겼다. 그렇다면 둘이 같은 곳에 가게 될 확률이 컸다.

시기가 당겨지긴 했지만, 서로 비슷한 시기에 발현이 되었다면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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