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20)

제32화

나와 리온은 오랜만에 시내로 나왔다.

에드가가 알면 난리 날 것이 뻔했기에 가면을 쓰게 했다. 적어도 우리를 발견하고 끌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묘하게 익숙한 리온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거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리온이 부쩍 자라 제복을 새로 맞춰 주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번듯한 이들도 많을 텐데.

나는 리온이 다른 이들보다 초라해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뭘 입어도 태가 나지만, 좀 더 좋은 걸 해 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엘르, 난 이런 거 없어도 괜찮아.”

“아니! 내가 안 괜찮아. 벨루아 가문의 후원을 받은 이라고 알려지기라도 하면 체면이 안 설지도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

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랄까.

“맞다! 검도 부탁해 놨는데.”

“검?”

“응. 리온 네 검 많이 낡았더라.”

그의 검이 제법 낡고 무뎌진 것을 본 이상 그대로 보낼 순 없지 않은가.

나는 리온을 위해 최고급으로 주문해 놨다.

리온의 손에 익어야겠지만, 아마도 그라면 어떤 무기를 손에 쥐어도 잘 사용하리라.

“그래, 가자.”

내가 잡아끄는 손에 리온은 흔쾌히 따라왔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푸른 리본을 매고 있는 내 손목을 향하고 있었다.

“손, 놓지 마. 혹시라도 날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단단히 리온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곤 나와의 발걸음을 맞췄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무기점으로 가고 있던 나는 돌연 그 자리에 굳었다.

‘저 재수 없는 놈이 여긴 왜.’

내 굳은 얼굴을 보고 있던 리온의 고개가 이윽고 앞으로 향했다.

“리온, 우리 다른 곳부터 가자.”

급한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이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를 발견한 남자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이게 누군가. 꼴 보기 싫은 벨루아 가문이네.”

그건 나도 하고 싶은 말인데.

‘아니 무슨 황태자가 저렇게 한가해?’

델테르의 말에 내 얼굴은 절로 썩어들어 갔다.

나는 표정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그를 마주했다.

“꼴에 기사가 있나?”

보자마자 시비 거는 거 보아라.

남자 주인공 후보란 녀석이 인성하고는.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파르르 손이 떨리며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런 곳에서 만나 뵐 줄은 몰랐는데.”

아니, 수도도 아니고 이 변방에 그가 왜 나타나?

생각해 보니 웃긴 일이지 않은가.

자기가 내 영지에 와 놓고 시비를 걸긴 왜 걸어.

“아, 나 역시 이런 누추한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지.”

저것 봐 끝까지 재수 없는 자식.

“그러게요,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오실 줄이야.”

“뭔가 반대로 말한 것 같지 않나?”

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와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오고 갔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리온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엘르.”

리온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잔뜩 경계한 투였다.

아, 아아. 리온은 델테르를 처음 보는 거지?

내가 이런 적의를 드러낸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호위 기사는 맞나?”

그가 흥미로운 표정을 한 채 리온을 훑어봤다.

한 발짝 다가선 델테르는 리온의 얼굴을 가린 가면을 툭 하고 건드렸다.

“수상하군, 이 가면도. 둘 사이도.”

내 손을 잡은 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놈과 미친놈이 만났다.

나는 황급히 리온과 델테르의 사이를 막아섰다.

제길……. 이래서 안 된다니까.

“물러서. 황태자 전하셔.”

나는 리온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주인의 말도 듣지 않는 호위라.”

델테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웃었다.

“하, 하하. 백작가도 참 큰일이군. 망해 가는 건가?”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나는 으득 이를 갈았다. 역시 괜히 나왔나 보다.

“보아하니, 지원했나 보군. 실력이야 형편없을 것 같고. 얼굴을 가린 것은 자신이 없다는 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가린 것뿐입니다.”

보면 눈이 멀 정도로 잘생겼거든.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만 봐도 오금이 저릴지도 모른다.

나는 델테르의 말을 흘려듣고는 뒤를 흘끔 보았다.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자가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왜, 왜 제니스까지?’

홱 하고 리온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곤두박질치더니 불안감에 숨이 멎었다.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잘된 일이잖아.’

그들이 안면을 트는 것은 좋은 일이지 않은가.

나는 애써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리온은 제니스를 한눈에 알아볼까? 자신의 반려가 될 거라는 걸?

“전하, 저 끝났…… 어?”

지척에 다가온 제니스가 리온을 향해 눈을 홉떴다.

마치 일전에 봤던 이를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둘이 만난 적이 있나? 아니 리온은 백작가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내 브로치를 사러 갔을 때도 변장을 한 채 나갔을 테니까.

그럼 대체 저 반응은 뭐란 말이지?

나는 혼란스러워 제니스와 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제니스를 보았음에도 전혀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덤덤히 델테르와 제니스를 보고 있었을 뿐.

묘하게 델테르 카베제르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거 말고는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벨루아 가문은, 그 눈빛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델테르는 쯧-하고 혀를 차곤 뒤 돌았다.

리온에게 반응한 제니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뭐 해? 빨리 따라오지 않고.”

멍하니 리온을 보고 있던 제니스를 향해 델테르가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제니스가 황급히 그를 따라가려 몸을 돌렸다.

“어, 어……라.”

제니스의 몸이 기우뚱 바닥으로 향했다.

치맛자락을 밟은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곧 바닥과 인사할 참이었다.

내가 황급히 손을 뻗었음에도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조심하십시오.”

반응 속도가 빨라서인지 리온이 제니스의 허리를 잡아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얼떨결에 저도 모르게 잡은 것이다.

그걸 본 나는 허 하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 역시 운명은 이어지는 거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내 걱정이나 했어야 하는 것을.

나는 오늘에서야 다시금 깨달았다.

리온의 품에 안긴 제니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제니스의 짧은 비명에 몸을 돌려 리온과 그녀를 보고 있는 델테르가 보였다.

그의 두 눈가에는 슬픔, 원망, 분노가 서려 있었다.

허탈함.

그래 어쩌면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동질감.

“아…….”

리온이 황급히 그녀를 품에서 떼어 내고 나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황녀를 도와준 것은 잊지 않겠다.”

“네, 그 은혜 꼭 잊지 마세요. 벨루아 가문의 호위 기사가 황녀님을 구했으니까요.”

나는 활짝 웃으며 델테르에게 말했다.

그래, 이걸 빌미로 어느 정도 방패는 만든 셈이다.

리온이 벨루아 가문의 호위 기사로 황녀를 도왔으니, 나에게도 이득이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지.”

델테르가 빠르게 다가와 제니스를 재촉했다.

“네, 살펴 가세요.”

우리가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 목을 치는 날밖에는 없을 테니까.

또 보자는 말은 내게 그다지 유쾌한 말은 아니었다.

제니스는 델테르에게 끌려가면서도 리온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감사합니다.”

그녀가 황급히 리온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리온은 그녀를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을 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돌아서 걸었다.

‘잘된 거야. 그래, 잘된 거잖아.’

리온과 제니스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내게도 좋은 징조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거웠다.

너무도 무거워 한 발짝 떼기가 힘들었다.

우뚝 길가에 멈춰선 나는 하늘을 보았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엘르.”

리온이 내게로 다가와 내 얼굴을 살폈다.

왜 네가 내 눈치를 보고 그래.

“가자! 약속된 시간 지났어.”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리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참, 그런데 혹시 황녀를 만난 적이 있어?”

“아니. 백작가에 있던 내가 누굴 만났겠어.”

리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렇네.

하지만 분명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 아는 눈치였다.

그건 기분 탓이었을까?

“엘르, 아까 그건.”

“응?”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무기 점에 다다른 우린 말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리온, 꼭 합격해.”

그래서 이제 내 곁에서 좀 떠나가 주라.

더 함께했다간 안 될 것만 같아서 그래.

“이제 너도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거야? 이미 힘도 각성했잖아.”

마음과 다르게 모진 말이 나왔다.

“그래……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럴게.”

리온은 내가 건넨 검을 받아들이며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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