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20)

제31화

그날 이후부터 리온의 태도가 뭔가가 달라졌다.

대체 뭐지?

나를 볼 때마다 의미 모를 옅은 미소를 지었다. 힘도 아직 사용하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왜 미친 듯이 베고 있는 거야? 지금 저 힘은 다 뭐고?

“디리아, 저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 아니지?”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선명했다. 리온이 힘을 각성한 것인가.

그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는데…….

멍하니 리온의 훈련을 쳐다보고 있던 내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게 네 녀석이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하지 말라 했지 않나.”

밖에 잘 나오지도 않는 양반이 여긴 왜 나왔대.

나는 에드가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붙어 나갈 것 같군.”

왜 저렇게 못 쫓아내서 난리야.

에드가의 말을 들은 나는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네가 피해 다니면 수가 없을 줄 알았나.”

에드가는 계속해서 입을 나불거렸다.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허! 참! 그렇게 뭐, 무섭게 내려다보면 어쩔 건데.

이제 무서울 게 없다는 말씀.

리온도 집에서 나가는 마당에 내 약점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요.”

나는 콧방귀를 뀌며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저놈이 정말 네게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군.”

있지.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우리 둘 다 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리온을 보살피고 마음을 줬는데!

“특별해요. 리온이 살아야 나도 사니까. 리온이 죽으면 나도 죽어요.”

그에게 달려 있는 내 목숨을 에드가가 알겠는가.

에드가의 시선이 이내 리온에게 향했다.

“저놈의 생사에 네 생사도 달려 있다라. 웃기는군.”

그는 짧게 조소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다 털어놓는다 한들 누가 믿겠어?

“좋으시겠어요. 아직 성년도 안된 불쌍한 아이를 사지로 내몰아서.”

나는 턱을 괴곤 리온을 빤히 응시했다.

뭐가 저리도 절박한 걸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리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홱-하고 내 고개가 에드가에게 향했다.

매섭게 치켜뜬 눈에 에드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혹시 양아치처럼 협박한 건 아니죠?”

“양……아치?”

“그래요, 양아치! 애한테 무슨 말을 했어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건방지네.”

에드가의 낮게 깔린 음성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놈의 집구석은 뭐만 하면 남자가 목소리를 깔고 그래?

“네 녀석이 이러니까 내쫓는 거다.”

“저 때문이란 말이에요?”

“결과적으론 그렇지.”

에드가를 노려보던 내 시선이 거두어진 것은 리온 때문이었다.

“엘르 나 보러 온 거면 말하지 그랬어.”

뒤에서 나를 살며시 끌어안는 그로 인해 흠칫 몸이 떨렸다.

백 허그라니!

에드가와 마주하고 있던 내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에드가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졌지만.

“리온……?”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리온은 나를 더욱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뭐지, 이 집착 가득한 목소리와 행동은.

“엘르, 조금 기다리지 그랬어. 훈련이 곧 끝나는데.”

“어, 어. 그러게.”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행동했다.

에드가는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내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보는 눈이 많은데 조심성이 없군. 네 녀석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처음부터 제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까?”

리온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에드가에게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둘 사이에 끼여 상황 파악하려 노력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뭐야, 지금 벌써 미치면 곤란한데?’

리온의 저 태도.

저건 분명 여주에게나 보일 법한 행동이지 않은가.

문양이 발현되려면 2년이나 남았다.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 네놈의 얼굴을 이제 그만 볼 수 있겠군. 더는 이 집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거라.”

에드가는 내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네놈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나는 에드가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나를 뒤로 보낸 후 리온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턱을 부여잡은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뭐라고 하는 거지?’

에드가의 말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불안함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리온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결국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 * *

“저…… 리온?”

나는 빼꼼 방문을 열어 리온을 불렀다.

리온은 침대에서 누운 채 미동도 없었다.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잠이든 걸까?

아직 이른 시간인데.

아까의 일로 기분이 많이 상한 걸까.

괜스레 리온의 눈치가 보였다.

쭈뼛쭈뼛하며 방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던 찰나 리온의 입이 달싹거렸다.

“엘르, 거기서 뭐 해. 들어 와.”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했다.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간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그런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붉고, 촉촉해 보이는 도톰한 입술.

‘참, 예쁘단 말이지.’

나는 가만히 리온을 응시했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달까. 그는 참 타고난 것이 많은 것 같다.

리온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슬며시 손을 내렸다.

감겨 있던 두 눈이 뜨이자 기다란 속눈썹에 그늘이 드리웠다.

어쩜 저렇게 예쁘지?

“너무 예뻐.”

“예쁜 건 너지.”

헉. 나 지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은 거야?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리온의 손이 내 팔목을 잡아 제 품에 폭 안기게 만들었다.

“리온, 혹시 어디 안 좋은 거야? 아까 훈련을 무리한 건…….”

“아니, 아니야. 그냥 널 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렇다고 하기엔 네 심장이 너무 쿵쿵 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가만히 리온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쿵쿵. 쿵쿵.

그렇게 있다 보니 정말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랄까.

“리온, 자?”

나는 리온에게 슬그머니 말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리온은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기분 좋은 체향과 함께 잠이 솔솔 왔다.

이렇게 어루만져 주면 곤란한데…….

“아니, 안 자.”

리온과 시선이 맞닿았다.

언제부터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던 걸까.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묘한 기시감.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리온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내가 널 안고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잖아.”

“어……?”

리온은 나를 더욱 세게 안으며 간격을 좁혔다.

밀착된 두 몸에 열기가 확 하고 올랐다.

“어떻게 내가 잠이 오겠어.”

그의 손이 이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둘이 있는 공간이 이렇게 긴장될 수가.

이래서 에드가가 단둘이 있지 말라고 한 건가?

역시 리온도 남, 남자였던 거야?!

나는 아까보다 더욱 커다래진 눈동자를 깜빡이며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 나하고 어디 좀 가자!”

리온의 진득한 시선에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딜……?”

“시험 보기 전에 살 물품도 있고, 리온이랑 시내에 나간 적은 없으니까. 추억이라도 쌓고 싶어서.”

나의 우물쭈물하는 어투에 리온이 방긋 웃었다.

그제야 리온의 손길이 내게서 떨어졌다.

후, 후아아…….

심장 떨어질 뻔했네.

나는 리온의 품에 안겨 있던 내 몸을 떼어 내며 침대에 앉았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발, 나대지 말아 줘.

눈을 질끈 감아도 박동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추억, 추억이라…….”

자리에서 일어난 리온의 눈가에 씁쓸함이 비쳤다.

“가자. 엘르가 원하는 거라면 나도 즐거워.”

리온은 풀어진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렇다고 단추까지 잠글 필요는 없는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리온은 셔츠 단추 한두 개 풀어헤쳤을 때 정말로 섹시하단 말이지…….

“아, 참 엘르는 이걸 좋아했지.”

담추를 끝까지 다 잠갔던 그가 이내 하나둘 풀었다.

툭.

투둑.

툭.

하나씩 단추를 풀던 리온의 손길이 멈춘 것은 셔츠의 단추가 모두 풀린 직후였다.

“아. 이런 다 풀렸네.”

신이시여.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나는 리온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그! 아무래도 여긴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위험하다고?”

리온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그런 차림새로 귀엽기까지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곤 손짓했다.

“그, 그래! 어서 옷 입어! 단정하게 입고 나와!”

그 말을 끝으로 리온의 방을 빠르게 벗어났다.

하마터면 내가 리온에게 위험할 뻔했지 않은가.

나는 아찔했던 상황을 다시금 상기하며 호흡을 빠르게 골랐다.

아무래도 하루빨리 리온이 내게서 달아나는 게 좋을 것만 같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