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20)

제29화

“엘르 나타시아.”

“어머, 귀가 간지럽네.”

나는 에드가를 마주칠 때마다 안 들리는 척 그를 무시했다.

만날 때마다 내게 공고 이야기를 하는 통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본채로 들어오라는 것도 마다하고 버티고 있었다.

리온은 나를 향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절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자신을 쫓아내려 한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그때마다 리온을 향해 아무 일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엘르, 정말 내게 할 말 없어?”

리온의 물음에 나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응, 정말 별거 아니래도. 신경 쓰지 마. 에드가 저 인간과 따로 만나지도 말고!”

나는 황급히 리온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당부했다.

“하지만 요즘 네가 시달리는 것 같아.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

“그럼! 리온, 너는 훈련에만 집중하면 돼.”

당연하다마다. 리온에게 공고란 단어가 들어가선 안 된다.

그걸 위해 다른 사람의 입마저 봉했지 않은가.

알아서들 잘 처신하라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웃으면서 하하 호호 하던 내가 정색하며 말을 하니 다들 충격 먹은 모양이다.

하지만 내 평판이 어떻게 되든 중요한 것은 리온을 더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진짜, 에드가는 그 조금을 못 참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텐데. 모두가 살길은 그뿐인데 뭐가 그리 급하단 말인가.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겨우 참으며 리온의 등을 떠밀었다.

“자, 자. 나하고 논다고 또 시간만 뺏겼잖아. 어서 가.”

에드가 때문에 하루 종일 리온과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혹시나 따로 그를 불러내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 결과 에드가는 나도 리온도 따로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한 달 동안이나 그를 피하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공고가 길어 봤자 얼마나 길겠어?

조금만 더 버티면 에드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 * *

에드가는 오늘도 실패하고 말았다.

어찌나 떨어질 생각을 않는지 둘이 꼭 붙어 다녀 머리가 아팠다.

그는 엘르의 말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엘르를 마주할 때마다 공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럴 때마다 엘르는 차디찬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정말 누굴 닮아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건지.”

안 그래도 황실 일로 머리가 아픈데 엘르까지 저러니 속이 답답했다.

공고 마감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무려 한달 동안이나 엘르는 철저히 저를 무시했다.

이대로 가다간 공고가 마감되고 말 것이다. 엘르는 그것까지 고려하고 무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영악해.”

“그보다는 머리가 좋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보좌관의 말에 에드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넨 대체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작자이지?”

“벨루아 가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시면서 뭘 묻습니까.”

“내가 요즘 점잖게 있었던 모양이군.”

에드가의 분노 섞인 목소리에 보좌관이 황급히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제 주인은 에드가 드 벨루아 백작님이시죠.”

“……됐으니 그놈이나 불러.”

“이 시간에 말입니까?”

“그럼 이 시간 말고 언제 부를 수 있지? 엘르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통에 빼내 올 수가 없지 않나.”

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내쫓고 싶으실까.

보좌관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 아비에 그 딸이지 않은가.

지키려는 자와 내보내려는 자.

아주 치열한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보좌관은 시종장을 불러 은밀하게 지시했다.

혹시라도 아가씨에게 걸리면 다른 걸로 둘러대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곧장 여기로 달려와 에드가의 멱살을 잡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릴 땐 무서워하시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 거침이 없어지셨달까.

하긴 에드가의 태도도 많이 변했긴 했다.

예전 같았으면 엘르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리온을 잡아 끌어내 억지로라도 내보냈을 터.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보좌관은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무엇보다 자신은 에드가의 사람인 것이 다행이었다. 적으로 만났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데 그 정보는 왜 안 넘기신 겁니까?”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고 했지, 황녀가 될 거란 것은 의뢰를 하지 않았잖아.”

여자를 찾던 황태자의 의뢰에 에드가는 약속대로 정보를 내줬다.

물론, 제니스에 대한 기본적인 것만 주었다.

황제의 사생아란 것도 델테르의 배다른 누이란 사실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단지 몰락한 남작 가문의 딸이란 것만 알려 줬으니까.

제니스 아벨 보니타. 몰락한 남작 가문의 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을 달랐다.

황제가 꽤 오랫동안 마음을 줬던 여인이 있었다. 바로 엘르의 엄마의 언니인 데펠로아 델리샤였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아이를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황제는 자신의 핏줄이라 믿고 찾았지만, 결국 데펠로아가 낳은 아이는 찾지 못했다.

이는 에드가가 자신의 부인 셀리느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던 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지금은 예전의 영광을 되찾은 듯 평화로운 카테앙 가문. 시골에 있지만 사람들의 미담이 종종 들리는 곳이었다.

“정말 이럴 때 보면 무섭습니다.”

“이제라도 아니 다행이군. 그 뒤로 특별한 사항은 없었나?”

“네 다행히 다시 찾아오진 않았습니다.”

정당한 거래였으니 그쪽에서 따지고 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쪽 역시 신분을 캐지 않았으니 어쩌면 서로에게 손해 보는 조건은 아니었으리라.

황태자는 에드가가 자신이 의뢰했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꽤 굼뜨군.”

에드가는 시계를 보며 리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부른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오는 걸까. 엘르가 제 부름에 답하지 말라고 했을 건 뻔했다.

하지만, 리온이라면 올 것이다. 오지 않을까 싶어 미끼도 던졌으니까.

리온에겐 엘르라는 이름만 꺼내도 낚여 줄 미끼가 있었지 않은가.

똑똑똑.

“백작님, 리온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

굳이 알리지 않고 들어와도 될 것은 매번 예의를 차리는 것이 영 께름칙했다.

에드가는 그냥 리온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앞에 선 리온을 본 에드가의 입이 달싹였다.

손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아하니 엘르의 작품인 것처럼 보였다.

저것도 치료라고 한 건가?

오히려 더 상처가 덧날 것 같은데. 제 딸이지만 정말 손재주는 기가 막힐 정도로 없는 모양이다.

에드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엘르가 네 녀석을 꽤 아끼는 모양이군.”

“그렇습니까?”

“난 여전히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마음이니까요. 다 아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만.”

리온은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라는 어투였다.

“그러니까 하루빨리 떠나도록.”

“그건 싫습니다. 엘르의 곁에 하루라도 같이 있고 싶거든요.”

에드가는 리온의 말에 책상에 놓여 있던 서류를 던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서류에 리온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어차피 문양이 생기면 갈라설 것을. 이거나 지원해.”

“제가 싫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이 뭘까. 그게 나에겐 그리 소중한 것은 아닌데 말이지.”

에드가의 말에 리온의 두 눈빛이 돌연 변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차피 때가 되면 떠나려 했으니 잘 된 거 아닌가?”

갈 곳도 없는데 지원이라도 하면 숙식은 해결되니 말이다.

에드가가 이토록 리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가진 힘이 느껴졌다. 지금은 기척을 숨기고 있지만, 나중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에드가는 리온의 몸속에 흐르는 힘이 다른 것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리온 데이비스. 어둠으로 물들은 머리카락. 그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물증이기도 했다.

리온의 붉은 눈동자를 보지 못한 에드가지만, 그가 숨기고 있는 불길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에드가는 후에 종잡을 수 없기 전에 싹을 잘라낼 생각인 것이다.

엘르에게도 저에게도 앞으로의 길에 방해가 된다면 지금 쳐내야 한다.

전쟁이란 생사가 불투명한 곳에 그를 보내려 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였다.

살아난다면 그건 리온의 운명일 것이고, 죽는다면 그 또한 운명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리온은 저에게도 엘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아직 문양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어. 성인이 되어야 나타날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서로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군.”

에드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리온과 엘르에게 나타날 문양은 다르리란 걸.

그때 상처를 받고 멀어지는 것보단 작은 희망이라도 안고 떨어지는 것이 나으리라.

“알겠습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리온은 몸을 숙여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끓어올랐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아 냈다.

리온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문을 걸어 잠그곤 기대어 눈을 감았다.

문양, 그 문양이 대체 뭐라고.

제 손목을 빤히 응시하던 그의 두 눈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으면.”

리온의 마음이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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