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20)

제27화

아까도 분명 나보고 딸이라고 했는데.

“백작님, 아까 저보고 딸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죠?”

“네가 아버지라 불렀으니 장단을 맞춘 것뿐이다.”

“에이, 아닌 것 같은데. 한 번도 딸이라고 한 적 없잖아요.”

진짜 정이라도 들었나? 미운 정 말이다.

에드가는 이제 와 발뺌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하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네가 누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자각을 했으면 하는군.”

“네?”

“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싫으면 그만 재잘거리란 소리다.”

“넵.”

나는 황급히 입을 꾹 닫았다.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일어나 걸을 수도 없었다.

에드가라면 정말로 나를 놓을 인간이었기에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겨 마차에 올라탔다.

* * *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이 정도는 리온도 이해할 것이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리온에게 가려 했다.

“내일 집무실로 와.”

“왜요……?”

또, 또. 아무 이유 없이 나 부른다.

에드가의 집무실만 갔다 하면 둘이서 싸워 대지 않은가.

별일 아니라면 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백작님은 왜 이 넓은 백작가를 사용하지 않으시나요?”

이럴 거면 돈 아깝게 뭐 이렇게 크게 지었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할 말이 있으시면 내일 정원에서 봐요. 차라도 한잔하면 좋잖아요.”

“차……?”

그가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잘 안다.

나 역시 에드가와 평화롭게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없었다.

“친목 다짐이랄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드가를 향해 말했다.

그냥 그 집무실에서 좀 나오란 말이야. 사람이 맨날 처박혀서 일만 하니 성격이 그 모양이지.

“그러지.”

“네, 그래요. 내일 정원에서…… 네?”

진짜 그러겠다고 답할 줄은 몰랐는데!

에드가는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나를 두고 본채로 향했다.

그 자리에 굳은 채 눈을 깜빡이던 내 얼굴엔 활짝 미소가 번졌다.

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리온이 있을 방으로 향했다.

똑똑똑.

“리온, 나 왔어.”

혼자서 많이 심심했으려나? 오늘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말해 줘도 될까.

나는 리온에게 알려 줄 것이 많아 빨리 그와 차를 마시고 싶었다.

“응? 안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부시럭거리는 소리? 아니 뭔가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열리지 않는 문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문에 바짝 귀를 갖다 대었다.

“으음, 안에 없나?”

하지만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이 시간에 훈련을 나갔을 리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리온, 안에 없어? 나 들어가도 돼?”

여전히 답이 없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왕성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뭐, 리온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몰래 들어가서 놀라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달까.

끼익 하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에 거친 숨을 내뱉으며 서 있는 리온이 보였다.

“뭐야? 안에 있었네.”

대답이 없어 없는 줄 알았는데 리온이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하아, 엘르? 벌써 온 거야?”

리온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아, 방금 왔어. 오자마자 바로 달려온 건데. 뭐 하고 있었어? 대답도 없고.”

“잠들었어. 악몽을 꾼 것 같아.”

리온은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문을 닫았다.

문에 등을 기댄 채 리온에게 갇힌 나는 손을 뻗어 리온의 땀을 닦아 냈다.

“괜찮아, 그건 꿈일 뿐이야.”

무슨 꿈인지 몰라도 리온에겐 끔찍했던 모양이다. 다 컸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리온의 흐트러진 셔츠와 함께 여전히 드러난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어떡하니! 나는 입을 다시금 꾹 닫고는 리온을 올려다봤다.

“엘르, 곧장 나한테 온 거야?”

“응, 리온이 기다릴 것 같아서. 쿠키만 계속 먹으면 물리잖아. 같이 저녁 먹자.”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기, 이런 날은 스테이크를 썰어야 한다.

리온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이내 제 품에 가뒀던 나를 풀어 줬다.

서랍으로 가 손수건을 꺼내 들곤 다시금 다가왔다.

“응? 리온?”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깨끗하게 씻어야지. 더러운 걸 묻혀 왔을지도 모르잖아.”

왠지 모르게 리온이 언짢아 보였다.

“아! 내 정신 좀 봐.”

손이라도 씻고 올 걸. 너무 빨리 달려왔네.

나는 조금이라도 어색해질까 걱정되는 마음에 황급히 사교계에서 들은 최신 이야기를 꺼냈다.

“아, 참. 오늘 황녀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어.”

“황녀?”

“무슨 생각으로 사생아인 그녀를 황녀로 끌어들인 걸까.”

그야 여주인공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황제가 씨를 뿌린 것만 해도 얼만데. 다른 사생아라곤 없었을까?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궁금하단 말이야, 왜 제니스만은 황녀로 데려왔는지.

“재밌었나 보네.”

리온이 내 손을 닦아 내며 말했다. 유독 내 왼손만 집중적으로 닦아 내는 기분이 드는데…….

나는 세균 하나 남아나질 않을 손을 보다 이내 왼손으로 리온의 손을 제지했다.

“음, 뭐 나쁘진 않았어. 사람들 구경하러 간 셈이지.”

나는 거기서 정말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중간에 델테르 때문에 주목을 받긴 했지만, 그 또한 빠르게 잊혀질 것이다.

오늘 연회의 하이라이트는 제니스 아벨 보티나였으니까.

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제니스의 모습에 리온을 빤히 보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둘을 같이 놓고 보니 꽤 잘 어울렸다.

“엘르, 그래도 나와 있는 게 더 즐겁지?”

내가 너무 신이 나서 떠들어 댔나? 리온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그는 가지도 못했는데…….

나는 리온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내겐 너밖에 없어! 난 친구 한 명 못 사귀었단 말이지.

“당연하지. 게다가 다들 하나 같이 날 싫어하는 걸.”

그건 다 개망나니 같은 아빠 때문이지만.

그리고 델테르를 향한 내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널 싫어하다니. 분명 그들은 눈이 잘못된 게 틀림없어.”

“아하하. 그, 그런가?”

나는 차마 연회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지 못했다.

“아, 리온은 못 갔으니 궁금하겠다. 이야기를 아껴야지.”

그게 리온에게 상처를 덜 주는 방법일 것이다.

“왜 이야기를 하다가 말아.”

“응? 그거야 리온이…….”

나름 배려한 것인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더 섭섭해하는 것 같달까.

“나와의 사이에 비밀이 늘어나는구나.”

리온이 내게서 한 발 멀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리온, 그게 아니라.”

“알아. 엘르는 내 생각해서 이러는 거.”

그러니 괜찮아.

리온의 괜찮다는 말이 유독 가슴 시리게 들렸다.

* * *

리온은 엘르가 방을 나서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하마터면 밖에 나갔던 것을 들킬 뻔했다.

손에 들린 손수건을 쳐다보다 이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엘르의 손을 잡아챘었지.”

연회장에서 보았던 델테르의 행동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냥 그녀를 보내고 얌전히 기다리기엔 불안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돋보일 테니까.

가면을 쓰고 연회장에 몰래 잠입했던 리온은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 미안합니다.”

리온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그 여자를 지나쳤다.

은빛 머리, 아름답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처음 보는 외모였지만 관심 없었다. 리온은 오직 엘르만 애타게 찾고 있었으니까.

‘이러다간 눈에 띄겠군.’

리온은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숨기려 했다.

그는 단지 엘르가 뭘 하는지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황실의 경비를 뚫고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냐고 묻는다면 간단했다.

마탑과의 신뢰를 위해 황실에는 마법에 대한 금제가 걸려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리온은 자신의 힘으로 연회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오늘처럼 왕실과 마탑과의 원만한 관계가 다행인 적이 없었다. 엘르를 볼 수 있었으니까.

리온은 성대한 황실의 파티에 그 어떤 관심도 두지 않고 그저 엘르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리온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곧바로 뒤쫓아 왔다.

“저 그런데 어디에서 오신 분인가요? 가면 파티도 아닌데.”

역시 가면이 눈에 띄었나 보네. 리온은 얼굴을 바꿔서 올 걸 그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에게 다른 이들은 관심도 없었는데 왜 이 여자는 귀찮게 구는 걸까.

리온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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