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어머니의 말이 맞네. 머리카락이 붉은 게 재수 없어.”
…… 참 말 예쁘게 한다.
네 머리카락 색이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번쩍번쩍한 금덩이 색이라도, 네가 더 재수 없어.
금은 녹여서 다른 곳에 쓸 수라도 있지, 너는 어디다 쓰니?
델테르는 나를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제니스에게서 내게로 다가온 그가 빤히 나를 보았다.
키가 커서 내려다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리온도 나보다 키가 커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비슷한데 왜 느낌이 다를까.
델테르의 타오를 것 같은 금안이 이내 일렁였다.
“푸른 눈동자는 참 마음에 드는데, 아버지 때문에 너도 꼴이 말이 아니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났으니까요.”
제니스도 그렇거니와 나도 비슷한 처지지 않은가.
“에드가 백작이 다른 말은 안 했나 보군.”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뭘 말 안 했다는 걸까. 이 사람들은 나와 에드가가 친밀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개 뻥이었다.
에드가는 내게 정보를 알려 줄 정도로 애정이 없었다.
오늘 무슨 일로 황궁에 왔는지도 말을 안 해 줬으니까.
“벨루아 가문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참 많아. 너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만큼.”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객을 들이시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알다시피 저희가 변방에 있는 신세라 몸을 조심해야 해서요.”
그러니까 관심은 고마우나 오지랖은 사절이란 말이었다.
언제까지 살 떨리는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까.
나는 델테르와 그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도 그렇고 이 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게다가 나를 향한 알 수 없는 무례한 행동도 꼴 보기 싫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익숙한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사람들 사이로 금세 모습을 감춰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분명 낯이 익었다.
“전하,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 그만 가 봐도 될까요?”
초조한 마음에 델테르의 얼굴을 쳐다보곤 까치발을 들어 목을 쭉 빼었다.
“엘르 나타시아. 지금 뭐 하는 거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델테르의 시선에 나는 다급히 대답했다.
“무례하게 보였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저 역시 저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겐 친절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하?”
델테르가 나를 향해 미간을 좁혔다.
아니 왜 이렇게 나한테 질척거리는 거야?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 면전에 대고 막 대하다니.
대체 델테르는 왜 갑자기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람?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이내 먼저 말했다.
“제 존재가 불쾌하게 느껴지시는 것 같으니 이만 비켜 드리겠습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먼저 한 발 물러서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아, 정말. 바로 쫓아갔어야 하는데. 나는 답답함에 재빨리 남자의 뒤를 쫓았다.
“뭐지? 진짜 익숙한데.”
나는 델테르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곧바로 그를 지나쳐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리온이었던 것 같은데.
그럴 리 없겠지만, 분명 리온처럼 보였다. 그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와 커다란 키 그리고 딱 벌어진 어깨.
품에 몇 번이고 안겼으니 그 몸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아까 보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건가?’
정말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테라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렇게 된 거 바람이나 쐬며 에드가를 기다리는 것이 속 편할 것 같다.
시계를 보니 돌아가기까지 시간은 좀 남아 있었다.
이 재미없는 곳에서 얼마나 있을 생각인 걸까.
다들 하나같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커튼을 치려고 했지만, 왠지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관뒀다.
대신 사람들이 내가 있는지 알지 못하게 구석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
분명 제니스가 날 보는 시선에 동정 같은 게 느껴졌는데.
어쩌면 자신과 제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걸까?
결이 다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지루함에 어깨가 뭉쳐 왔다.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열 받네.
“그런데 좀 춥네.”
드레스가 얇아서 그런지 찬바람에 한기가 들었다.
나는 감기가 들 것 같아 잠잠해질쯤에 연회장 안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쟀다.
조금 더 버틸까? 하지만 이쯤 되면 괜찮을 것 같은데.
결국 나는 추위를 이겨 내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에드가를 찾는데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델테르가 보였다.
거침없이 걸어오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도망가야 할 것 같지?
나는 티 나지 않게 뒷걸음질을 치며 델테르와의 거리를 넓혔다.
좁힐 듯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솟았다.
어, 더 잡히면 안 되겠는데.
에잇! 그냥 마차에 올라타는 것이 맘 편할 것 같다.
그 생각을 마친 나는 조금 더 빠르게 뒷걸음질로 연회장 문 쪽을 향해 걸었다.
“거기 서는 게 좋을 거다.”
명백한 협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 같으면 서겠냐.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돌진하면 그 누구라도 도망칠 거다.
갑자기 왜 내게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좋지 않다. 그가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내겐 독이었다.
제길, 제길. 이럴 때 아버지는 어디 있는 거야.
황태자랑 마주하지 말라고 말만 해놓고 덩그러니 날 버려두다니.
뭐 지켜 주는 행세라도 하던지! 이건 뭐 나 혼자 감당해야 하잖아.
나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에 살이 떨렸다.
그놈의 다리는 어찌나 긴지 금세 지척까지 쫓아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뒤돌아 뛰다시피 걸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언제 따라잡혔는지 델테르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챘다.
“아!”
엄청 아프잖아. 이렇게 무식하게 잡으면 어떡해!
씩씩거리는 두 눈으로 델테르를 보았다.
“엘르, 나타시아. 내 말이 들리지 않았나? 그것도 아니면…….”
델테르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내 뒤로 선 누군가의 제지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에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에드가, 망할 내 아버지가 서 있었다.
“델테르 카베제르 베누와 전하. 손 놓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에드가의 목소리에 살기가 서렸다. 일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다시 말하지. 내 딸 잡은 그 손 놔.”
내 딸?
지금 에드가가 나보고 딸이라고 그랬어……?
나는 손에 느껴지는 아픔보다 더한 충격에 입을 떡하고 벌렸다.
* * *
“아버지? 아하하.”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곤 곧바로 델테르에게 잡힌 손을 빼어 냈다.
게다가 지금 에드가 이 미친놈이 모두가 있는 앞에서 말을 놨어!
안 그래도 황실과 적대적인데 대놓고 티를 내다니.
나는 지금 이 순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쓰러져? 아!
‘이거다. 이것밖에는 답이 없어.’
생각을 끝냄과 동시에 이마에 손등을 대곤 픽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
가냘픈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이 에드가가 내 허리를 잡아 받쳐 주어 바닥에 처박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에드가는 미동 없이 쓰러진 나를 응시했다.
‘아, 진짜! 이 눈치 없는 인간 같으니!’
지금이 타이밍이잖아.
나는 하는 수 없이 살짝 눈을 떠 에드가를 향해 곁눈질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에드가가 생각이 있는 미친놈이라면 더는 난리 치지 않을 것이다.
“므해요, 쁠르 그으.”(뭐 해요, 빨리 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선 에드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에드가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별안간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전하와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군요. 제 딸이 몸이 허약해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래, 어서 빠져나가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곤 에드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망설이지 말고 곧장 밖으로 나가란 말이야.
안 그럼 여기서 피 바람이 날 거야. 나는 아찔함에 입가가 떨렸다.
사람들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오늘로 그것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천천히 에드가의 발걸음이 떼어졌다.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고, 이내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자 눈을 번쩍 떴다.
“진짜, 망나니처럼 굴면 어떻게 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황태자가 네 손을 잡고 있지?”
손을 잡았다고 하기엔 어감이 이상했다.
도망치던 나를 잡아챈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네, 아까 그것 때문이라 해도 이렇게 화낼 일인가?!
진짜 성격 파탄자들이 따로 없다.
“황태자의 심기를 제가 좀 건드린 모양이에요. 진짜 저는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잘했어.”
지금 잘했다고 한 거야? 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에드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