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20)

제21화

숨을 죽이고 천천히 백작가의 안을 살폈다.

고요한 밤에 적막이 맴돌았고, 에드가의 기운에 기척을 숨기기 딱이었다.

별채에서 본채로 오기까지 경비들의 눈을 피하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일전에 봐둔 비밀 계단 쪽으로 향했다.

‘정보상이라…… 여기서 큰일을 처리하는가 보군.’

정보상은 밖에 있을 텐데, 백작가의 안에 은밀한 곳이 있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뒤가 구렸다.

리온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웃었다.

‘도대체 정보상 말고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에드가의 성격상 그가 얌전히 이곳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번 연회 역시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껏 방관했던 딸의 데뷔탕트를 함께 갈 리는 없으니까.

리온은 절로 흥미가 샘솟았다. 에드가가 숨기고 있는 것이 뭘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저보다 먼저 온 누군가의 신형이 보였다.

숨을 죽이고 문에 바짝 귀를 대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분명 자고 있을 텐데…….’

리온은 고개를 살며시 젓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제 기척을 읽지 못했는지 여전히 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파이라기엔 어설픈데.’

오히려 자신이 스파이라면 모를까, 백작가에서 에드가를 배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인정머리는 없었지만 고용인들에게 나쁘지 않은 주인이었다.

리온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응시했다.

“아잇, 대체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네…….”

웅크리고 있던 사람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리온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매섭게 얼어붙었던 리온의 눈매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안 자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리온은 천천히 앉으며 앞에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작은 손으로 귀에 대고 뭘 그리 열심히 듣고 있는지 귀여웠다.

“응……?”

그제야 뒤에 있는 리온의 기척을 느꼈는지 눈앞의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헉……!”

화들짝 놀란 엘르가 리온을 발견하곤 헛숨을 들이켰다.

리온은 곧바로 엘르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지금 우리 숨어 있잖아.”

엘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에 드러난 당혹스러움에 리온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려 넣었다.

자기감정이라곤 숨길 줄 모르는 아이처럼, 엘르는 늘 모든 것이 드러났다.

“네가 어떻게……?”

“그냥 잠이 안 와서 걷다 보니 여기에 왔네.”

리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잘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엘르 역시 믿지 않는 눈치였다. 둘은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끊기자 서로를 마주 봤다.

‘이런, 빨리 도망가야겠군.’

그는 엘르의 손을 잡고는 씩 웃었다.

“우리 도망가야 할 것 같아.”

“응?”

엘르는 되려 반문하기도 전에 리온의 손에 이끌려 몸을 숨겼다.

품 안에 꼼짝없이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고요하면서도 강하게 뛰고 있는 리온의 심장.

그건 리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공간에 이렇게 몸을 숨기곤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서 그런 것이라기엔 달랐다.

리온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내렸다.

엘르는 자신이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도망갔으니까.

이 정도의 거리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잡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쥐새끼가 있었나 보군.”

기척을 느낀 에드가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은밀한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주변을 훑는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잡아 와. 아직 멀리 못 갔을 거다.”

엘르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두려워하는 건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리온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안 들켜. 내 품에 있는 널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리 없잖아.

엘르는 리온의 속삭이는 말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숨결이 자꾸만 귓가에 닿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이 작은 토끼 같은 엘르를 훔쳐 달아나고 싶었다.

그 누구도 저에게서 뺏어가지 못하게.

에드가와 경비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방을 비운 것을 들키고 말 것이다.

리온은 하는 수 없이 엘르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엘르,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리온? 그게 무슨 말…….”

스르륵 엘르는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 * *

리온은 이불을 걷어 내고 엘르를 조심스레 눕혔다.

그녀 덕분에 알아낸 것은 없었지만, 오늘의 일은 또 하나의 추억이 되리라.

붉은 머리카락이 침대에 흐드러지게 펼쳐졌다.

마치 그 모습이 장미가 활짝 핀 곳에 있는 것만 같아 아름다웠다.

리온은 홀린 듯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는 엘르의 모습을 침대에 걸터앉아 감상했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다신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자 리온은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잡티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에 붉은 입술.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엘르를 본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확 하고 달아오른 얼굴에 리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 그가 황급히 엘르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 * *

똑똑똑.

“아가씨, 들어갈게요.”

“으음…….”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일까. 나는 슬며시 눈을 떠 시계를 보았다.

어? 내가 어떻게 들어왔더라.

나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명 리온을 마주쳤는데, 에드가가 나와서 숨은 것도 기억이 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어제 백작가의 정보상이 무슨 정보를 요즘 사고파는가 궁금해서 염탐하러 갔었다.

아는 것이 힘. 정보가 곧 나의 무기였으니까.

지하에 정보를 보관하고 가끔 보좌관과 함께 의뢰에 대해서 의논하기도 했다.

내용을 알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연회를 갑자기 참가하는 게 이상해서 뭔가 있을까 하고 간 건데 리온을 딱! 마주칠 줄은 몰랐다.

‘근데 리온은 어떻게 알고 진짜 온 거지?’

백작가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눈치 다 챈 거 아니겠지.

괜스레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나를 한 번에 알아본 것 같은데…….

에이, 그건 정말 내 착각일 것이다.

그나저나 아직 이른 시간인데? 왜 벌써 온 거지?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조금 더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소리쳤다.

“조금만 더 잘래!”

이런 내 말에도 디리아는 계속해서 노크했다.

“아가씨, 들어갈게요. 지금도 늦었어요!”

“도대체 뭐가…….”

하는 순간 머릿속에 데뷔탕트가 스쳐 지나갔다.

아, 맞아! 그게 오늘이었지.

전날의 여파로 인해 막상 내게 중요한 것을 잊었다.

아, 정정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드가에게 중요한 일.

부스스한 상태로 일어난 나는 침대에 멍한 표정으로 앉았다.

‘오늘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긴 한데 영 가기 싫단 말이야.’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과 별개로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리온만 잘 키워 내서 보내면 되었다.

물론, 에드가 그 망나니를 좀 막을 수 있으면 더더욱 좋고.

에드가가 뭐 때문에 저리도 참여하려는지는 못 알아냈지만, 가면 자연스레 알게 될지도 모른다.

“안 가면 안 되겠지?”

“아가씨도 참. 또 그 소리시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디리아는 힐끔 제 뒤를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디리아 뒤로 다른 이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응? 뒤에는 누구…….”

“오늘 아가씨 치장을 도와줄 시녀들이에요. 백작님께서 보내셨어요.”

그 인간이?

정말 데뷔탕트에 같이 갈 생각인 걸까.

“정말, 백작님이 나랑 같이 간데?”

“네, 이미 준비도 다 하셨을 걸요?”

“진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방으로 쫓겨난 주제에 같이 가서 좋을 것도 없을 텐데.

결국 나는 디리아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치장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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