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그놈 불러와.”
“리온 말입니까……?”
“그래, 어떤 표정을 지을지 꽤 궁금하거든.”
에드가는 제집에 있는 리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르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토록 아끼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보좌관은 하는 수 없이 시종장에게 리온을 데려와라 명했다.
“그나저나, 이 사업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약 사업은 아직 지켜봐. 귀족들이 중독될 때까지 기다려.”
“정말 괜찮을까요? 최근에 황실의 움직임이 좀 이상합니다.”
에드가는 건네받은 서류를 보며 입술을 매만졌다.
하여튼 냄새는 잘 맡고 움직이는 인간들이었다.
“황실에서 약에 대한 흥미는? 아직 없나?”
“별다른 반응은 없습니다. 주시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조금 더 풀 수밖에 없다. 이 정도면 미끼를 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조심스러웠다.
“다른 거 있으면 보고하도록 해. 이건 뭐지? 건수가 꽤 큰데.”
정보상에 이 정도로 큰돈을 주며 의뢰하는 사람은 잘 없었다.
다급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분을 숨겨야 하거나.
“아! 사람을 찾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신분도 밝히지 않고 의뢰라.”
에드가가 운영하는 정보상은 꽤 큰 길드였지만, 그들만의 법칙은 존재했다.
첫째, 의뢰받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할 것.
둘째, 의뢰를 완료함과 동시에 모든 자료는 파기할 것.
셋째, 한번 수락한 의뢰는 끝까지 책임질 것.
“의뢰는 받지 않는다. 돌려줘.”
“신원은 알리지 않았지만, 제가 누굽니까.”
보좌관은 어깨를 으쓱하곤 메모 하나를 내려놓았다.
“황태자. 그가 분명합니다.”
“델테르 카베제르?”
에드가의 눈매가 매섭게 돌변했다. 그를 감싸는 기류에 살기가 뒤섞였다.
황실의 인장이 새겨진 단추가 놓여 있었다.
“잡아 뜯었나?”
“……붙잡는 척하며 소매에 있는 단추를 뜯었습니다.”
“자네 생각보다 민첩해진 모양이군.”
보좌관이 꽤 유능한 것 같다. 일처리가 빠르긴 했어도 이렇게 잔머리를 굴릴 줄은 몰랐는데.
“황제가 이런 정보상을 이용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죠.”
“이제 제법 유추도 할 줄 알고…….”
에드가는 서류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여자를 찾는 건가?
은발에 청자색 눈동자라……. 제법 눈에 띄는 외모였다.
“찾아봐.”
“이미 애들 풀었습니다.”
에드가는 황태자보다 먼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이 여자를 찾는지 알아내면 저에게 유리하리라.
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지 않는가.
똑똑똑.
“백작님, 리온 님께서 오셨습니다.”
“평소에 예의도 안 지키는 놈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군.”
리온의 등장에 에드가는 황실에 대한 이야기를 멈췄다.
그건 보좌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닫은 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리온 역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에드가를 보았다.
사람을 알아보진 못했지만, 한 명은 서 있고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누가 누군지 감이 왔다.
‘엘르가 알면 잔소리할 텐데.’
안 그래도 내일 있을 연회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밤에 훈련이라도 하고 자려 했더니 대뜸 저를 불러 하는 수 없이 집무실에 왔다.
리온은 자신을 가지 못하게 한 것은 에드가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저 역시 남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선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얌전히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부쩍 귀찮게 하는 바람에 에드가를 향한 감정이 좋지 않기도 했다.
자신이 엘르와 있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니까.
“할 말이 있으시면 빨리 하십시오, 저도 시간이 그리 남아도는 것은 아니어서.”
뻔뻔하면서도 딱딱한 음성에 에드가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어렸을 때 봤던 눈빛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데, 엘르는 여전히 리온을 옆에 끼고 돌았다.
“내일 얌전히 백작가에 있는 게 좋을 거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에드가는 리온의 어두운 머리카락과 눈을 보며 입을 꾹 닫았다.
한 치의 속도 보이지 않는 게 찝찝하달까.
무슨 생각을 한 채 이곳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길드원에게 리온에 대한 자료 조사를 부탁했지만 별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다.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건가.”
에드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리온을 천천히 훑었다.
“제가 백작님의 말을 들을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참 사람을 볼 줄 모르십니다.”
“허……?”
이젠 제법 기어오르기까지 하고. 에드가는 턱을 매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리온에게 걸어갔다.
마주 서자 어느새 이렇게 자랐는지 꽤 저와 시선의 높이가 엇비슷했다.
“네놈의 건방을 들어줄 만큼 내가 그리 너그럽진 못해서.”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나를 이용해 그를 굴복시켰다.
“윽…….”
리온은 곧바로 바닥에 무릎이 꿇린 채 이를 으득 갈았다.
아무리 에드가의 마력을 흡수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나를 흡수하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 것이리라. 오히려 더욱 힘을 더해 주는 격이었다.
“그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거지? 말해 봐. 네 건방진 입에서 나올 말이 기대가 되니까.”
에드가는 제 앞에 무릎 꿇린 리온을 보며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오직 엘르의 말만 들을 뿐입니다.”
리온은 고개를 들어 올리곤 아무렇지 않게 활짝 웃었다.
자신은 에드가에게 힘을 써선 안 된다.
엘르에게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 * *
리온은 방으로 돌아와 으득 이를 갈았다.
“내일이던가…….”
연회에 백작도 함께 갈 테니 이곳에 경계가 느슨해질 터.
엘르에겐 얌전히 있겠다고 했지만, 정말로 이곳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엘르가 곤란해지는 것이 싫어 수긍했을 뿐.
리온은 이곳에 있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백작가는 비밀리에 정보상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어 정보를 모아왔다.
리온에게 사람을 조종하고, 기절시키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백작가에 있는 기사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왔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뭐로 생각하든 관심 없다.
리온이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엘르 나타시아였다.
커튼을 쳐 창밖을 보자,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편안한 얼굴, 서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게 긴장감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긴 하지.’
에드가가 버티고 있고, 백작가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기척 또한 있었다.
실력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섬세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변방에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리온은 턱 끝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보아하니 엘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커튼을 다시금 치곤 쿠키를 하나 베어 물었다.
바삭바삭한 게 참 달다.
리온은 쿠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 안에 맴도는 버석거림도, 끝에 남는 텁텁함도 싫었다.
그럼에도 엘르가 준 것이니 기쁘게 받은 것이다.
‘시간이 됐네. 슬슬 가 봐야겠군.’
커튼을 다시금 치고 불을 껐다.
그러자 자신의 방을 은밀히 들여다보고 있는 기척들이 이내 사라졌다.
“저렇게 대놓고 지켜보니 놓치지.”
리온은 숨을 죽이고 주변의 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완전히 사라지자 그가 문을 열어 밖을 보았다.
역시나 보이는 이가 없었다. 리온이 있었던 곳은 엘르와 함께 묶는 별채였다.
엘르의 방과는 층이 달랐고, 자신은 억지로 방을 내어 준 것처럼 구석에 박아 뒀다.
그 덕분에 밤에 나가는 것이 쉽긴 했다.
‘그것만 알아내면, 이곳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도 몰라.’
에드가의 약점을 잡게 된다면 엘르가 그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을 터.
무엇보다 자신이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리온은 엘르와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점점 커 가는 자신의 몸과, 매일 밤 문양이 혹여나 나타날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는 것도 끔찍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에드가가 숨기고 있는 것을 밝혀야만 자신은 엘르와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