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종종 리온의 훈련하는 모습을 봐 왔지만, 다른 이들과 대련하는 건 처음 보는 듯했다.
‘열심히 하네. 저번보다 훨씬 더 실력이 는 것 같은데?’
턱을 괴곤 흐뭇한 눈길로 리온을 보았다.
“아가씨……!”
디리아가 나를 발견하곤 저 멀리서 달려왔다.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왜? 다들 괜찮다고 했어.”
나 얌전히 있었는데 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걸 보아라. 제복을 입은 상태로 검을 들어 대련을 하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아름답다, 아름다워…….”
땀 흘리는 남자의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디리아, 너도 옆에 앉아서 같이 보자. 이런 거 구경하기 어렵다?”
내 말에 디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좀 가끔 변태 같아 보일 때도 있다는 거.
하지만 저 흑발을 휘날리며 존재를 내보이는 리온의 모습을 본다면 모두가 이해할 것이다.
“리온 님 훈련이 끝나면 같이 가셔도 될 텐데…….”
“방에다가 잘 놔뒀지?”
“네, 차도 같이 준비해 드릴게요.”
“역시, 디리아의 센스는 말하기도 입 아프다니까.”
나는 엄지를 척 하고 들어 보이며 웃었다.
결국 내 능청맞음에 패배한 디리아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 * *
나는 까치발을 들고 리온의 눈을 가린 채 방으로 향했다.
“엘르, 꼭 이렇게 가야 해?”
“응. 깜짝 선물이라니까?”
“그러다 내가 넘어지면 네가 위험하잖아…….”
“괜찮아, 괜찮아. 리온의 튼튼한 다리가 맥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진 않을 거야.”
키 차이가 나는 바람에 리온의 허리가 어색하게 숙여져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한 걸음씩 떼며 방문 앞에 다다랐다.
“자 이제 눈 떠!”
뭐 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서프라이즈였다.
쿠키 세트가 이 세상 크기가 아니었거든.
“오늘 외출한 게 쿠키를 사기 위해서였어?”
“……음, 뭐. 내일 연회 가는데 혼자 있어야 하잖아. 심심할까 봐.”
리온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마주 봤다.
“고마워. 내가 좋아하는 쿠키네.”
“좀 많긴 하지……?”
“엘르, 나 요즘 잘 먹어. 꽤 컸잖아.”
나는 나보다 얼굴 하나 더 있는 리온의 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럭무럭 자라라.
“네가 좋아하는 게 이것 밖에 안 남았다고 해서…… 하하하.”
조금 오바였나? 한가득 쌓여 있는 쿠키를 보니 멋쩍었다.
디리아가 딱 맞게 준비한 차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자자, 어서 앉아! 먹어는 봐야지.”
“그래, 같이 먹자.”
나는 리온과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리온이 찻잔에 따라주는 차를 응시했다.
디리아가 해 준다고 했지만,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널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는 건가 모르겠네.’
훗날 대마법사가 될 애인데. 하긴, 누가 리온이 따라 주는 차를 마셔 보겠어?
지금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있을 때 즐겨야지.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백작님한테도 선물을 드린 거야?”
“으음, 그걸 선물이라도 해야 하나…….”
약간 애매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꽤 사이가 가까워졌네.”
리온이 자리에 앉으며 쿠키를 바삭 베어 물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에드가와 예전처럼 으릉거리진 않긴 하지만 딱히 가까워진 기분은 없었다.
부딪칠 일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어때? 맛있어?”
“응, 맛있네.”
만족해하는 리온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얼굴에 그려 넣었다.
와삭와삭 베어 먹는 게 정말 입에 잘 맞나 보다.
“요즘 훈련은 어때?”
“재밌어. 무엇보다 엘르 네가 훈련하는 걸 좋아하잖아.”
“응……?”
“다음엔 나 혼자 훈련할 때만 보러와.”
“왜?”
나는 쿠키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련하는 것도 제법 재미있는데 왜 혼자 있을 때 오라고 하는 거지?
훈련에 내가 방해가 되었나?!
진짜 가만히 쳐다만 봤는데…….
“아…… 미안. 방해되었어?”
“나한테 네가 방해될 리 없잖아.”
리온은 손을 뻗어 내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닦아 냈다.
“그냥 나만 보고 싶어서.”
“뭘……?”
“네가 이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
“내, 내 눈빛이 어떻길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쿠키 맛있네. 엘르 네가 사 와서 그런가.”
리온은 자연스레 말을 돌리며 쿠키를 내 입에 하나 넣어 줬다.
“응, 맛있네.”
역시 이 제과점은 쿠키를 참 잘하는 것 같다.
리온은 내게만 보여 주는 붉은 눈동자를 보이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내일이 연회구나. 벌써 시간이 빠른 것 같아.”
“미안, 혼자 두고 가려니까 마음이 쓰이네…….”
“와, 엘르가 내 생각해 주니까 기분 좋다.”
나는 심각해 죽겠는데 리온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난 오히려 내가 못 가서 좋은데?”
“정말? 왜?”
“그야. 이렇게 엘르가 내 생각도 해 주고, 둘이서 차도 마시고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잖아.”
“어……. 뭐, 그건.”
사실 잠깐 아주 잠시 리온을 피했다. 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달까.
“티 났어?”
“엄청.”
“아, 티가 엄청 났구나…….”
나는 쿠키를 입에 하나 더 넣으며 눈을 굴렸다.
생각보다 내가 얼굴에 티가 많이 나나 보다.
꽤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꽝이구나?
도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하려나.
살짝 우울해졌지만, 눈앞에 있는 리온을 보니 금세 기분이 풀렸다.
“엘르, 뭐가 두려운 거야?”
두려운 거. 내가 죽는 거.
이생의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나는 이게 가장 두려웠다.
그리고 그 끝에 리온이 있을까 봐 무섭기도 했다.
“있지, 리온……. 사람이든 동물이든 은혜를 잊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니까 나중에 가서 내가 위험해지면 꼭 도와줘야 해.
내가 믿는 것은 리온 밖에 없었다.
리온의 눈썹이 움찔했다.
잠시 눈빛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그렇다고! 하하하. 쿠키 더 먹을래? 차 더 가져오라고 할까?”
나는 황급히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오바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둘이서 차를 몇 잔이나 마셨지만, 어색한 기류를 깨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엘르, 난 괜찮아.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내일 연회 가야 하잖아.”
“으응…….”
리온은 이미 내 마음을 꿰뚫은 듯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결국 나는 그의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차를 더 마셨다간 배를 꾹 누르기만 해도 입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나올 지경이었으니까.
* * *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에드가는 보좌관의 말에 곰 인형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곰돌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걸까?
“마음에 드는 걸로 보이나 보군.”
손바닥에 올려놔도 한없이 작았다. 하찮은 게 꼭 그 아이처럼 보였다.
선물을 사러 간다고 둘러대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뭘 들고 왔을 줄이야.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그래도 꽤 귀엽지 않습니까? 백작님 생각해서 이 작은 걸 골랐다고 상상해 보면.”
“생긴 것도 못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에드가는 곰돌이를 또다시 툭 하고 쳐서 넘어뜨렸다.
빨간 하트를 안고 있는 모양새가 웃기지 않은가.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걸 잘도 줬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하는 걸 보니 좀 큰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당돌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날이 갈수록 더하지 않나.
“하긴 백작님과 안 어울리긴 합니다. 정말 선물로 사 오신 거 맞겠죠?”
“아직도 믿는 자네는 세상 물을 덜 먹었나 보군.”
에드가는 고개를 저으며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그놈은 뭐 하고 있지?”
“엘르 아가씨와 차를 마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돌아와서 지금까지 같이 있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까 기사들이 훈련하는 곳에 갔다고 합니다. 음, 지금 시간이면 방으로 돌아가셨지 않을까요?”
쿠키를 사 왔다더니 정말 함께 먹었나 보다.
그런 걸 보면 애가 따로 없는데…….
“자네가 보기엔 어때? 과자와 이걸 놓고 본다면.”
“어떤 걸 묻는 건지…….”
“이게 당연히 더 성의 있어 보이지 않나?”
에드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좌관은 불안한 기색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