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제과점에 도착함과 동시에 누구보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헉, 헉……. 쿠키 세트 아직 남아 있죠?”
“어머, 어쩌죠……. 금방 막 다 나갔는데.”
이럴 수가!
결국 리온에게 줄 과자도 사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진열장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으음, 저 영애. 아니면 그 쿠키가 들어가 있는 다른 세트가 있긴 한데 보여 드릴까요?”
“네, 바로 보여 주세요! 가격이 얼마가 나가든 상관없답니다.”
나는 눈을 번쩍이곤 고개를 빠르게 주억거렸다.
리온에게 줄 선물인데 가격이 뭐가 중요해.
점원은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여깄습니다, 영애님. 휴우.”
그녀가 가지고 나온 것은 엄청난 크기의 쿠키 세트였다.
커다란 상자에는 여러 가지 쿠키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거 사 가는 사람이 있긴 해요……?”
내가 아무리 급해 보여도 그렇지. 호구 잡았다 생각하는 건가!
저렇게 많은 걸 누가 사 가겠어?
“주세요. 부족한 것보다는 낫죠.”
바로 나. 나다.
나는 호구다. 리온이 며칠을 먹어도 남을 쿠키의 양이 마음에 들었다.
“정말 사시려고요……?”
아니 당신이 들고 와 놓고 나 보고 놀란 표정으로 되물으면 어쩌자는 거야.
“네, 주세요.”
리온 혼자 다 못 먹으면 기사들하고 나눠 먹어도 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면, 다른 것도 있는데…….”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요. 그냥 이걸로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점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격이 꽤 나가는 모양이다.
“아참! 이건 하나밖에 없는 쿠키 세트라 보증서가 있답니다.”
“아니, 그런 건 안 주셔도 괜찮아요.”
나는 곧바로 사양했다. 점원은 손에 들린 작은 곰 인형을 꺼내다 도로 넣었다.
음? 오호라.
“사은품 주세요.”
점원의 손을 다급히 잡고는 소리쳤다.
빨간 하트를 끌어안고 있는 게 꽤 귀여웠단 말이지.
“어머, 아가씨. 인형도 리온 님께 드리려고요?”
“아니? 리온은 이런 거 안 좋아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다 쓸데가 있어. 아주 좋은 생각이 났거든.”
곰 인형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디리아를 향해 웃었다.
* * *
아슬아슬하게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한 시간이 이렇게 짧았을 줄이야……!”
“다행히 제시간에 들어왔어요!”
디리아와 호위 기사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땀을 닦아 내었다.
마차에 올라타 집무실까지 달려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저택에 들어오는 게 1시간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자기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시간이란다.
쾅!
“헉, 허억. 와, 왔어요.”
나는 문을 벌컥 열고 에드가를 보았다.
‘뭐야, 진짜 기대한 건가?’
다행이었다. 이거라도 안 챙겨 왔으면 어쩔 뻔했어.
에드가의 시선이 내 손에 잠시 머물렀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자요, 선물.”
손을 펼치자 작고 앙증맞은 곰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지금 선물이라고.”
“하도 곰을 주시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죠.”
뚱한 표정의 에드가는 책상에 놓인 곰 인형을 보았다.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뭐로 보이지?”
“매정한 백작님?”
“이걸 어디에 쓰라고 사 왔는지 의도가 궁금하군.”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던 곰 인형은 에드가의 손에 결국 뒤로 넘어갔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싫으면 말…….”
탁.
그가 재빠르게 곰 인형을 빼앗았다. 손아귀에 잡힌 곰 인형이 나를 향해 울부짖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 괘, 괜찮을 거야.’
나는 곰 인형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 이만 가 봐도 돼요……?”
“그놈에겐 뭘 사 줬지?”
“쿠키요.”
“그렇군…….”
에드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손에 들린 곰 인형을 보더니 꽤 심각한 표정을 했다.
나는 잔소리를 듣기 전에 재빠르게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받지를 말지. 곰 인형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 노려본데……?”
그래도 다행이었다. 저거라도 안 줬으면 어쩔 뻔했어.
사은품인데 나중에 알게 되는 건 아니겠지?
후폭풍이 두려웠지만, 알게 될 일은 없으리라.
“아……!”
나는 황급히 호위 기사에게 달려갔다.
또 고자질해서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다.
드레스를 잡아 올리곤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정말 오늘따라 열심히도 뛰는 기분이었다.
정원을 지나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열심히 달려갔다.
저 멀리서 보이는 리온의 모습에 반가워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차, 리온은 나를 못 알아보지?
손목에 푸른 리본을 달고 있지 않았으니 다가가서 나임을 밝히는 게 나을 것이다.
‘방에 몰래 놔둬 달라고 했으니 눈 감겨서 데려가야지!’
나는 리온의 표정을 상상하며 작게 웃었다.
훈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내 가속도를 이겨 내지 못하고 점점 빨라졌다.
약간의 경사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빨라질 일인가……?
“어, 어……. 너무 빠, 빠른데에에에!”
나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꺄아아아아……!”
“아, 아가씨! 엘르 아가씨 조심……!”
“비켜, 다 비켜!”
나는 손을 휙휙 저으며 외쳤다.
이러다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엄청나게 쪽팔릴 것이다.
차라리 풀숲으로 몸을 날릴까?
그래, 그게 낫겠어.
훈련장 옆에는 꽃과 함께 풀이 무성하게 났으니 쿠션 역할을 해 줄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꾹 감고 에잇 하며 발 구름을 멈췄다.
퍽! 포옥.
“응……?”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몸이 기울어지는 느낌은 없었다.
나를 안고 있는 따스한 온기와 익숙한 체향.
“엘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리온이 나를 받아내 안은 것이다.
“헉……!”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겨 있던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곤 벗어났다.
또다시 심장이 쿵쿵하고 요란스럽게 자기 위치를 알렸다.
* * *
“미안, 놀랬지……?”
“아니야, 그보단 내가 달려와서 다들 놀란 것 같은데?”
호위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나를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예쁨받고 있었던 건가?
나는 리온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함께 나갔던 호위 기사를 찾았다.
곧바로 다가가 기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가씨?”
“곰 인형 사은품이라고 백작님께 말하면 가만 안 둬.”
“그걸 말하시려고…….”
“중요해. 굉장히 중요하단 말이야.”
호위 기사의 눈이 호기심으로 홉떴다.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자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엘르.”
리온이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웃었다.
“응……?”
“뭐가 급해서 이렇게 뛰었어. 에단 경을 보기 위해선 아닐 거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리온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는 그의 손길은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 조심스러운 느낌이랄까.
나는 간지러워 몸을 움츠렸다.
“머리가 엉망이 되었네.”
“고마워.”
부스스했던 머리카락이 이내 단정해졌다. 나는 활짝 웃으며 리온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에단 경한테 말할 게 있었어.”
“아쉬워.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리온은 아쉬운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 아……! 리온 훈련 끝났어?”
“아직 조금 남았긴 해.”
“그래? 으음.”
그럼 얌전히 기다릴까.
나는 쪼르르 달려가 풀밭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나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마저 해!”
리온은 멀뚱히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자신의 재킷을 벗어 내게로 왔다.
내가 앉은 곳에 펼치더니 이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
“옷이 더러워지잖아.”
가볍게 안아 든 리온은 자신의 재킷 위로 나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나는 얼빠진 얼굴로 리온을 빤히 보았다.
가까이서 본 리온의 얼굴은 언제 봐도 참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지.
고작 하루 안 봤을 뿐인데도 매번 새로운 기분이라니.
“하지만 여기에 내가 옷을 깔고 앉으면 네 옷이 더러워질 텐데…….”
“괜찮아. 내 옷은 더러워져도.”
나도 괜찮은데.
남는 게 옷이라, 상관없었다.
“내가 안 괜찮아.”
그래, 그렇구나.
리온의 단호한 말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이래야 나중에 너를 봐도 알아보기 쉬울 테니까.”
……아! 그래서구나.
나는 곧장 이해했다. 그런 이유라면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훈련을 끝낸 후 혼란스러울까 봐 미리 알아차릴 수 있는 표식을 한 것이다.
“알았어! 어서 가서 훈련해. 방해되는 건 싫거든.”
리온이 하루빨리 힘을 기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까.
나는 리온의 등을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