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20)

제17화

다른 영애들에게 줄 선물? 그딴 걸 왜 사겠는가.

어차피 나는 사교계에 진출과 동시에 배척당할 것이 뻔한데.

내 비상금을 탈탈 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상점에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 이거 놔요……! 이건 안 돼요! 동생 약 사야 하는 돈이라고요!”

어린아이가 울며 매달리는 목소리에 고개가 자연스레 돌아갔다.

“하아……. 정말 안 도와주네.”

나는 문고리를 잡았던 것을 멈추곤 뒤돌아섰다.

“아가씨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무시하시죠.”

“참, 주인이나 부하나 똑같이 인정머리 없는 거 봐.”

나는 혀를 짧게 차곤 호위 기사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렇게 애가 울면서 어른한테 애원하고 있는데 저걸 무시해?”

“예, 벨루아 가문은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윽!”

잘도 말을 내뱉는 호위 기사가 얄미워 정강이를 발로 까 버렸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됐어. 그럼 지켜나 보던지. 네가 도울 것도 아니면서 막지 마.”

리온을 찾을 때도 거슬리게 굴더니. 이번에도 영…… 참, 인성이 알 만하단 말이야.

나는 싸늘한 눈동자로 호위 기사를 보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멈췄다.

“그만둬요! 어린애한테 무슨 짓이죠?!”

가녀리지만 당돌한 목소리. 모자를 써서 가려져 있지만 언뜻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

청자색 눈동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제니스……?’

와, 대박.

설마 델테르가 연회 전에 반하게 되는 게 오늘이었던 건가?

나는 뜻밖의 수확에 귀를 가만히 기울였다.

“아가씨?”

“쉿……! 조용. 잠시, 잠시만.”

제니스를 여기서 먼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미리 상황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에드가의 선물은 다음에 사지 뭐.

제니스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키곤 돈을 뺏으려던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여기 돈 줄 테니 가세요.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어요.”

그녀는 제 뒤로 아이를 숨기곤 당당히 맞섰다.

“어쩌지, 귀족 아가씨. 이걸론 부족하겠는데? 조금 더 줘야겠어. 저 녀석이 우리에게 진 빚이 꽤 많아서 말이야.”

불량배로 보이는 녀석들은 못생긴 얼굴로 계속해서 히죽거렸다.

‘저걸 어떻게 해. 도와줘 말아?’

나는 사뭇 고민했다.

원작에 관여하는 건 리온까지가 딱 좋았다. 혹시 모르지 않나.

지금 나섰다가 혹여나 델테르를 마주하게 되면 꼬여 버릴지.

“당신들 정말 답이 없군요?”

제니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처럼 보였다.

“돈이 없으면서 나서긴 왜 나서?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무척이나 한가해 보이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곤 뒤돌았다.

순간 제니스의 모자를 확 잡아당긴 남자가 그녀를 바닥으로 팽개쳤다.

“꺅!”

제니스의 은빛 머리카락과 함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이야.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리고 다녔네. 돈이 없이 나섰으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겠지 했는데. 그게 귀족 아가씨 얼굴이었나? 큭큭.”

더는 못 들어 주겠다. 나는 호위 기사에게 턱짓했다.

“안 됩니다.”

“잘 들어. 저 언니 안 구해 주면. 지금 여기서 미친년처럼 뛰어다닐 거야. 물론 귀가 시간도 늦어지겠지?”

움찔.

호위 기사의 몸이 떨렸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것을 아는 것이다.

에드가도 포기했는데 호위 기사라고 별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자, 잠깐만! 멈춰, 쉿. 이리로 와. 빨리.”

나는 황급히 호위 기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왜, 왜 그러십니까?”

“안 나서도 될 것 같으니 조용히 있자.”

내 말에 호위 기사의 시선이 제니스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

‘재수 없는 새끼 면상을 보게 될 줄이야…….’

진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여기서 둘의 인연이 이어지는 게 맞나 보다.

나는 그와 얼굴을 마주하면 안 되기 때문에 곧장 뒤돌았다.

황실의 인장, 제복을 입고 있는 금발의 머리카락. 나와 같은 푸른색 눈동자.

델테르 카베제르 베누와.

리온과 쌍벽을 이루는 남주인공. 그가 등장한 것이다.

심장이 쿵쿵 뛰며 귓가에 울렸다.

‘괜찮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진정해.’

당황한 나는 모자를 꾹 눌러썼다.

델테르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다.

내 행동이 디리아와 호위 기사에겐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내 숨통을 단번에 끊은 사람.

그 생각만 해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괜찮나?”

델테르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제니스는 델테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실 기사들은 남자들을 제압했다.

순식간에 정리가 된 곳에는 둘만 존재하는 듯 기류가 묘하게 돌아갔다.

‘뭐야, 저렇게 반한다고?’

나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허탈했다.

어쩌면 델테르에겐 제니스의 존재 자체가 다르게 와닿았을지도.

델테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제니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 얼굴이 개연성이구나.’

그렇다면 인정이다. 그러나 델테르는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제니스는 델테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고, 후에 마주하게 된다는 것 역시 이미 알 터.

이것은 슬픈 서사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망플래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 * *

“와, 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가씨?”

디리아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제니스와 델테르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기서 또 무슨 일이 있는 건데?

궁금해서 볼일을 볼 수가 있어야지!

나는 황급히 호위 기사와 디리아의 옷깃을 잡아당겨 상점 옆 공간으로 숨었다.

“누가 공격이라도 합니까? 살기라도 느끼신……!”

“아니니까 제발 조용히 해.”

호위 기사가 검을 빼 들고 나가려 했다.

얘는 가끔 호들갑이란 말이지.

고개를 슬며시 저으며 다시금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헉……!”

재빨리 호위 기사 등에 숨은 나는 놀란 가슴을 쓸었다.

하마터면 눈을 마주칠 뻔했잖아.

다행히 공간이 어두워서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귀를 가만히 기울여 보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핏 들렸다.

“처음 보는 영애인 것 같은데…… 이름이 뭐지?”

나는 호위 기사와 디리아 사이를 살짝 비집고 나와 고개를 내밀었다.

델테르는 제니스의 손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다.

단단히 빠져 든 모양이다.

제니스는 가만히 잡힌 제 손을 응시했다. 뺄 타이밍을 놓친 걸까?

하지만 뭔가 얼굴이 붉어진 것 같기도 한데…….

‘뭐야, 설마 제니스도 나쁘지 않은 건가?’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곧 있으면 밝혀질 둘의 관계에 다른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둘이 뭐 어떻게 되든 나와 상관은 없었다.

“괜찮나? 안색이…….”

델테르는 제니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세상, 혼자 로맨스는 다 찍고 있네.’

나는 헛숨을 들이키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 반짝이는 눈동자는 나중에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절망으로 바뀌겠지.

제법 볼 만할 것이다.

그때 내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만 해도 통쾌했다.

제니스는 델테르의 행동에 정신이 들었는지 빠르게 손을 빼냈다.

“죄송해요, 이름은 알려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뭐에 쫓기는 것처럼 황급히 물러섰다.

“자, 잠시만……!”

델테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저 멀리 간 후였다.

“이름이라도 알려 줬으면 좋을 텐데…….”

그는 꽤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축 처진 어깨와 함께 돌연 그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저 영애에 대해서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은발에 청자색 눈동자라…….”

그는 제 손을 한번 응시하곤 근위대와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뭐야,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테니.”

나는 그제야 어두운 공간에서 나와 델테르와 제니스가 사라진 곳을 한번 훑었다.

“흠, 이제 선물을 사 볼까나……?”

“아가씨, 빨리 움직이셔야 해요.”

“응……?”

헉! 뭐야, 벌써 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데?

보석상에서 제과점까지 거리가 꽤 되었기에 두 개 다 사는 것은 힘들었다.

“일단 보석상에서 선물을 사시고…….”

“뭐어? 디리아, 나에게 오늘 중요한 건 리온에게 줄 과자야.”

“그럼 백작님 선물은 안 사시려고요……?”

“기대도 안 하고 있을 테니 괜찮아.”

나는 보석상을 한 번 쳐다보곤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빨리빨리 출발하라고 해. 다 팔린 것은 아니겠지…….”

디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백작과의 관계 호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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