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20)

제16화

눈을 떴을 때 평소와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기분.

리온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 쪽을 쳐다봤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란 말인가.

금방 내가 본 것은 내가 알던 리온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 세상에……!”

미칠 만큼 섹시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덮칠 만큼이나 매혹적이지 않았던가.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리온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교계 데뷔 역시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잘 차려입은 슈트를 보고 싶었는데…….

나는 침대에 누워 쿵쿵거리는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훤하게 드러난 손목이 여전히 허전했다.

이래서 익숙했던 것이 없어져야 안다고 하는 건가?

“리온, 리온 데이비스…….”

입에 달라붙는 어감이 여전히 좋았다.

허전한데, 분명 허전한데 왜 자꾸만 마음이 따뜻할까.

내 손목에 달라붙었던 리온의 따스한 온기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계속해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쿵 쿵.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에 울리니 잠이 솔솔 왔다.

* * *

“안 돼.”

“왜요! 왜 안 되는지 백 가지 이유를 대 보세요.”

눈을 뜨자마자 리온에게 줄 선물을 사러 나가기 위해 에드가에게 왔다.

물론 허락을 받기 위해서.

그런데 저렇게 바로 이유도 듣지 않고 안 된다고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에게 꼭 선물을 주고 싶었으니까.

에드가는 내 말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이유를 다 대야 하지? 네가 나에게 허락을 구하러 온 건데 말이야.”

“안 된다면서요. 그럼 이유를 알려 주셔야죠.”

나는 에드가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니, 왜 안 된다는 건데!

“이유가 필요한가? 네 평소 행실이 문제인 것을.”

“거참. 빡빡하게 구시네. 백작님께 드릴 선물 사러 간다니까요?”

“잘도 사 오겠군.”

자기한테 줄 선물을 사러 간다는데도 그는 단호하게 나왔다.

“갑자기 네가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 수상하군.”

“그럼 그냥 답답해서 놀러 나가는 거라고 생각해 줘요.”

“네가 어린애인가?”

“네, 저 어린애인데요.”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교계 데뷔 안 했고 성인 아니면 어린애지.

에드가는 내 이런 태도에 미간을 좁히더니 펜을 내려놓았다.

“솔직하게 말해.”

“뭘요……?”

“나가려는 이유.”

아, 역시 안 통하는 건가. 에드가는 나를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선물 사려고요…….”

“내 선물을?”

“으음…….”

“난 거짓말을 제일 싫어해.”

“리온에게 줄 선물 사려고요.”

나는 곧바로 실토했다.

시내에 나가야 파는 디저트가 있는데, 그걸 리온이 꽤 잘 먹었다.

“그놈이 애였군.”

“그렇게 치면 백작님도 똑같은걸요.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고 계시잖아요.”

“하…….”

에드가의 눈썹이 들썩였다.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하게 해 준다더니. 나 오랜만에 외출하는 건데 왜 안 돼요?”

“…….”

“거짓말쟁이…….”

“말버릇은 여전하군.”

“누구 때문에 날로 입이 거칠어져 가고 있죠.”

나는 하는 수 없이 에드가의 앞으로 다가가서 턱을 괴곤 빤히 쳐다봤다.

이럴 땐 이게 최고다.

“지금 뭐 하는.”

소설에 보면 아이들이 애교를 부리고 입에 발린 말을 하면 껌뻑 넘어가지 않던가.

하지만 난 죽어도 그 짓을 못 하겠다. 입에서 떨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는…….

불쌍한 척. 그래 그게 딱이다.

나는 고개를 푹 하고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매일 백작가에서 친구도 없이 홀로 지내온 나날. 나에게 생긴 친구에게 맛있는 디저트 하나 사 주고 싶었을 뿐인데…….”

“하?”

“인정머리 없는 누구는 방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만 찾고…….”

나는 계속해서 어깨를 잘게 떨었다.

“리온에게 사 줄 디저트도 사면서 새로 사귈 친구들에게 줄 뇌물, 아니 선물도 사려고 한 건데…….”

“엘르 나타시아.”

에드가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면 얻어 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어깨를 격하게 들썩이며 우는 소리를 섞었다.

“그냥 진짜…… 딱 한 시간만 나갔다 오면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막, 막 답답하고 우울하고…… 이러다 내일 연회장에서 픽 하고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추욱 어깨를 늘어뜨린 나는 책상에서 몇 발짝 떨어지곤 뒤돌았다.

“백작가의 버려진 아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다가와 줄 친구도 없을 거야……. 역시 나한테 리온밖에 없어.”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에드가의 날 선 눈동자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누가 황실에 척을 지고 쫓겨나는 바람에 날 좋아하는 이들도 없을 텐데. 어떻게 친구를 사겨야 하나…….”

“엘르 나타시아. 이름 두 번 불렀다.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혼자 평생 외롭게 지내죠, 뭐…….”

여기까지 왔으면 마지막으로 해 줘야 하는 게 있다.

처연한 척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봐 주는 것.

나오지 않는 눈물을 쥐어 짜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드가를 보았다.

“딱, 한 시간. 대신 그놈이랑은 같이 갈 수 없어.”

“리온에게 줄 선물을 살 건데 데려가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정말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리온을 왜 데려가.

나는 뚱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정말 가도 돼요?”

“아주 날 죽일 놈으로 만드는데 안 보내 줬다간 쓰레기를 만들 작정이군.”

사실, 맞긴 했다.

집무실 밖을 나오는 순간 동네방네 떠돌며 에드가 드 벨루아는 인성 쓰레기라고 외칠 생각이었다.

다행히 거기까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좋아, 기분이에요! 백작님 것도 사 올게요.”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봐.”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한 번 나갈 때마다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다. 매번 이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피곤하다 피곤해. 이렇게 먹고 사는 것이 팍팍해서야.

복도 옆 창밖을 보니 마차가 놓여 있었다.

‘뭐야, 말은 그렇게 해놓고 언제 대기시켰대? 빠르기도 해라.’

호위 기사까지 서 있었다.

밖에서 나를 발견한 디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백작님께서 말씀하시길 시간은 계속 흐른다고 하셨어요!”

디리아의 다급한 외침에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아, 정말……. 지독한 인간이야.”

분명 시계를 보며 초까지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치마를 손으로 잡아 올리곤 재빠르게 마차를 향해 뛰었다.

* * *

“흥, 흥흥…….”

나는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의 콧바람이라 그런가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최근에 못 나갔잖아.”

하도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나가질 못했다.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을의 입장이란…….

나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혹시, 디리아. 백작님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으음, 글쎄요. 백작님께서 딱히 좋아하는 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뭐, 아무거나 사 줘도 괜찮겠네.

다행이었다.

선물 고른다고 머리 아플까 봐 걱정했는데. 맘 편히 골라도 되겠는데?

반짝반짝거리고 예쁜 걸로 사다 주면 별다른 태클은 걸지 않을 것이다.

먹는 건 잘못 사다 주면 곧장 휴지통으로 버려질지도 모른다.

“그럼 싫어하는 건? 아! 나 말고.”

“아가씨…….”

디리아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백작님께선 아가씨 싫어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마주 앉은 내 손은 잡으며 디리아가 슬픔에 잠겼다.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디리아가 상처 입은 얼굴을 했다.

나는 황급히 활짝 웃으며 디리아의 손을 잡아 붕붕 위아래로 흔들었다.

“괜찮아. 뭐, 몰랐던 것도 아닌데! 그래서 싫어하는 건 없어?”

“딱히 없으셨던 것 같은데…….”

“뭐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 이야기해 봐.”

싫어하는 것도 없어? 좋아하는 것도 없고 뭐 다 없네.

참 재미없게도 산다.

“백작님게선 아가씨가 뭘 사든 좋아하실 거예요.”

이상한 거 사 왔다고 욕이라도 안 하면 다행이지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차피 내 마음대로 살 생각이긴 했다.

마차는 곧이어 보석상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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