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원작에서 리온에게 문양이 생기기 전, 루비온 가문의 저주에 대해 들은 아버지는 리온의 존재를 알게 된다.
게다가 황녀의 짝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인질이었으리라.
제대로 키우면 개가 될 것이고, 막강한 권력을 잡는 데 그만한 힘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사람까지 잘 알아보지 못하니 리온을 데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는 온기가 필요했고, 가족이란 보금자리가 필요한 아이였다.
[나는 네 가족이다. 먼 친척이라고 할 수 있지. 나를 따라온다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저를 버리지 않을 건가요?]
[먹고 자고 모든 것을 부족하지 않게 주지.]
어린 리온에게 그 말은 꽤나 달콤하게 들렸으리라.
에드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위협을 가하지 않고 그를 구슬려 제 편에 서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손쉽게 리온을 손에 넣은 그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되지만.
“리온, 너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문제야.”
“……내가?”
“나도 믿지 마. 그 누군가 너에게 달콤한 말을 한다면 의심하고 또 의심해.”
나는 리온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 내곤 그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절대로 그 누구도 믿지 마. 하지만 너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건 믿어도 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고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너를 구원해 줄 사람이니까.”
“사랑한다고 속삭이지 않아도 느껴진다면?”
“으음, 헷갈릴 땐 네 몸에 나타나는 문양으로 확인해. 상대에게도 그 문양이 있는지. 없다면 그건 거짓이야.”
제니스는 리온과 같은 문양이 나타날 테니 분명 그는 내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와 만나 사랑을 해야 리온이 행복해진다.
리온은 내 소맷자락을 살며시 들춰 보았다.
“리온, 나 말고 너 말이야.”
나는 그의 손을 떼어 내며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문양이 내겐 안 생길 텐데.’
리온은 제 손을 바라보다 길게 내려온 내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에 내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목덜미가 드러났다.
“간지러워!”
나는 몸을 움츠리곤 꺄르륵 웃었다.
정말이지, 이야기에 집중을 안 한다니까?
리온은 드러난 내 목선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엘르, 너는 역시 머리를 내리는 게 예뻐.”
“리온! 집중해.”
내 말에 리온이 낮게 웃었다.
뒤로 넘어갔던 머리카락이 그의 손길에 흐트러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는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긴 후 미간을 좁혔다.
“알았어. 집중할게.”
그제야 리온이 제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내가 말해 줬었지? 문양은 한 쌍이고, 반려에게만 나타난다고.”
“응 기억하고 있어.”
리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손으로 내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지루한 모양이다.
“그런데 엘르, 문양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가 툭 던지듯 한 말에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났다.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엘른, 넌 항상 뭐든 알고 있다는 듯이 단정 짓는구나.”
리온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될 거야.”
나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옅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은 모두가 죽지 않고 행복한 것이지만, 아마도 그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바라건대, 그의 손에만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내 운명은 델테르 카베제르에게 죽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지금 리온을 곁에 둔 것이니 혹시 모르지 않나.
제니스와 사랑에 빠진 리온은 나를 결국 기억해 내지 못하고 제 손에 피를 묻힐지도 모를 일이다.
성인이 되고 나면 나는 내 손목에 묶여 있는 푸른 리본을 떼어 낼 테니까.
솔직히 지금 생각으론 차라리 죽을 거라면 델테르에게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러니 리온이 나를 알아보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그는 제니스 단 한 사람만 알아봐야 했다.
혼선을 주는 것은 더욱 일을 꼬이게 만드는 것뿐이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불안함에 자꾸만 나도 모르게 안 좋은 습관이 튀어나왔다.
툭.
리온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건드렸다.
“……어?”
아랫입술에 닿은 리온의 손가락으로 인해 입술을 씹던 것을 멈췄다.
“피 나.”
쿵, 쿵.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원래 이런 분위기엔 그…… 막!
입술로 피를 닦아…… 큽. 정신 차리자. 순진한 아이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화르륵 얼굴이 불타올라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평소에도 내게 아무렇지 않게 해 왔던 리온의 행동이었음에도 이번엔 달랐다.
‘신이 있다면 제 머리를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지금 이 분위기는 위험하다.
내가 아니라 리온이! 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리온은 툭 하고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픽 하고 웃는 그의 모습에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놀림당하고 있었던 거구나?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야.’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리온을 노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나른하고 섹시했다.
그래, 인정한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란 것을.
“엘르, 사람의 일은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아.”
“그랬으면 좋겠어.”
그 누구보다 그걸 바라는 건 나였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리온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일렁였다.
‘저 아름다운 눈을 다시는 못 보겠지.’
나는 짐짓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탓에 리온과 시선이 마주했다.
그는 나를 향해 두 눈을 접어 웃었다.
오싹한 기분과 함께 불안함이 감돌았다.
“엘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 같아.”
“응?”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번에도 저번과 비슷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표정. 나를 꿰뚫어 보는 저 두 눈.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거지?’
나는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세차게 반응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리온은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의 턱 끝을 가볍게 쓸었다.
“내가 그렇게 두진 않을 거거든.”
나는 리온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제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보았다.
아! 내가 아직까지 잡고 있었구나. 역시 너에게 난 위험해.
나는 슬쩍 손을 떼어 냈다. 고스란히 전해졌던 온기가 사라지자 허전했다.
리온은 떨어져 나가는 내 손을 보곤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기엔 넌 조심성이 너무 없는걸.”
“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어. 엘르, 넌 모르겠지만.”
리온이 내 손을 꽉 쥐었다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붉은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변했다.
“엘르, 연회 안 가면 안 돼?”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내 쪽을 향해 몸을 숙인 그로 인해 나는 뒤로 몸을 내빼었다.
리온의 곧은 손가락이 이내 내 소매를 파고들어 손목을 매만졌다.
흠칫,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는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
쿵쿵, 심장이 요동치며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거 아까보다 더 위험하지 않나?
나는 뒤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 없던 코어 힘까지 짜내어 버텼다.
넘어가면 침대에 풀썩.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짐승이 깨어날지도 모를 일이지 않나.
이래서 남녀가 한 방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건가.
“리온……?”
나의 당황한 목소리에 리온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매혹될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달빛에 비친 그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정말로 할 말을 잃게 만들 만큼.
“투정 부린 거야.”
내 손목에 어김없이 묶여져 있던 푸른 리본이 리온의 손끝에 닿았다.
리온은 스르륵 푸른 리본을 풀어 냈다.
항상 자리했던 리본이 사라지자 손목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나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그는 리본에 입을 가볍게 맞추며 나를 응시했다.
“엘르, 네가 리본을 매고 있으면 내가 찾아낼지도 모르잖아. 다른 사람도 엘르를 푸른 리본으로 기억하는 건 싫어.”
“응?”
“나만 알고 싶어. 그러니까.”
나는 리온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리온의 손에 푸른 공단의 끈이 스르륵 풀렸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내 손목에 묶여 있었던 푸른 끈은 어느새 리온의 손목에 예쁘게 묶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