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20)

제14화

“네 파트너는 비워 두는 게 좋겠군.”

“설마 백작님이 함께 가려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언제부터 나랑 친했다고.

나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손잡고 어색하게 웃으면서 갈 생각을 해 보니 답이 없었다.

‘이건 아니야. 정말 아니지, 그럼, 그럼.’

반면에 잘생긴 리온과 함께 입장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니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럼 답은 나오지 않았는가.

에드가는 원하는 답이 아니었는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있나?”

“리온이 있잖아요.”

나의 당당한 말에 에드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번만 더 가늘어지면 아주 눈이 없어지겠어.

“왜요?”

“리온은 안 돼. 남들의 눈에 보이는 건 허락하지 않아.”

이런 반응은 생각 못 했는데?

“합당한 이유를 말해 주세요.”

“백작가에서 후원하는 이를 다른 이에게 보여 줘서 얻을 게 뭐지? 어차피 성인이 되면 밖으로 내보낼 아이인데.”

“그건 그렇죠.”

“우리 백작가에서 데뷔를 시킬 생각은 없어. 다른 이에게 리온이 어떤 아이인지 알려서 좋을 게 있나?”

그것도 아니었다.

리온은 다른 이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긴 했다.

“네가 그리 리온을 아낀다면, 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네요.”

망할.

인정하긴 싫지만, 아버지의 말이 다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연회장에 데려가는 게 그에겐 좋은 기회가 생기게 될 것이다.

혹시 아는가, 연회장에서 제니스라도 보게 될지. 이미 얼굴을 익혀 놓으면 둘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럼 가면무도회는 어때요? 그때 리온도 참석하면 되잖아요.”

“그렇게도 그 아이와 함께하고 싶은 건가.”

“음 하나밖에 없는 친구니까요.”

에드가는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어느새 자라 말대꾸를 꼬박꼬박하는 것도 짜증이 나겠지.

“제 파트너는 백작님으로 할게요. 그럼 됐죠?”

“선심 써 주는 말투군.”

“그렇게 보이셨나요? 정확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활짝 웃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거라면 능글맞아지는 스킬이랄까.

아버지와 종종 마주 보긴 했지만, 여전히 친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인형을 선물로 주는 것만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은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앞으론 인형은 주지 마세요. 저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으니까요.”

“줘도 말이 많군. 앞으론 선물은 없을 거야. 그런 나이도 지나지 않았나? 키워 줬으니 너도 그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에드가는 제 옆에 준비해 놓은 선물을 휴지통으로 향해 떨어뜨렸다.

굳이 버릴 필요는 없었는데 삐진 게 분명하다.

“정말 한결같으시네요.”

아버지는 내 말에 흘깃 휴지통을 보더니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휴지통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제가 구워서 드린 쿠키도 이렇게 버리셨잖아요.”

“먹을 수 없는 걸 먹으라고 내민 네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군.”

“맞아요. 누가 낳았는지 몰라도, 참 빼닮은 솜씨겠죠.”

조금 상처를 입긴 했지만, 맛이 없는 걸 억지로 먹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그런 일을 마음에 담아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마음에 담아 두긴 했다.

안 버리고 그냥 놔둘 수도 있지. 곧바로 버리다니.

“인형 안이나 들여다봐.”

인형 안?

나는 문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곤 돌아보았다.

에드가는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서류에 열중하고 있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전시된 인형을 뚫어져라 보았다.

“인형 안을 들여다보라니?”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형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리저리 보아도 열 수 있는 장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꽤 인형치고 무거운 것 같은데.’

안에 솜이 들어 있다면 꽤 폭신했을 텐데 뭔가 자잘한 게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인형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한참을 노려보던 나는 결국 나이프를 들어 천천히 등 쪽을 살짝 째 보았다.

후두두둑.

인형에서 반짝이는 다이아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미친……. 다이아를 품은 인형이었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금 다이아를 인형 안으로 넣었다.

이게 어떤 돈인지 알 수가 없으니 무턱대고 사용했다가 날벼락이라도 맞으면…….

“이, 이 미친 인간.”

이걸 어린애한테 쓰라고 준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저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은 모른 척 다시 꿰매서 넣어 놓는 게 낫겠지?

바느질함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기워 대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나를 공범으로 몰고 가려 했다니, 아버지란 작자의 계략에 몸서리가 떨렸다.

똑똑똑.

“엘르, 안에 있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인형을 장식장 안에 넣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응, 들어와.”

리온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연회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 아아. 가기 싫다.”

나는 침대에 벌렁 누워 툭툭 옆을 쳤다.

리온이 내게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슬쩍 그를 보니 언제 이렇게 컸는지 제법 어른의 태가 났다.

‘정말 남자아이들은 훅 크는구나.’

가지런히 무릎 위에 놓인 손은 얼추 보아도 내 손보단 컸다.

키는 또 어떻고. 어릴 땐 내가 더 컸는데, 이젠 그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가 되었다.

“리온도 가고 싶지?”

“……음, 딱히.”

“그래? 난 가고 싶을 줄 알았는데.”

하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리온이 연회장에 간다면 머리가 아플지도 모른다.

알아보는 척 애써야 하고, 가면무도회라고 쳐도 특징은 기억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집중을 해야 하니 피로도가 굉장할 것이다.

“그 이야기 때문에 온 거야?”

“아……. 기사들이 그러더라고.”

리온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걸까.

나는 답답함에 몸을 일으켜 리온을 보았다.

옆에 나란히 앉자 체격 차이가 제법 났다.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댄 후 눈을 감았다.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답답해.”

“너도 기사를 가지고 싶지 않아?”

“기사? 딱히.”

기사의 맹세를 하고 평생을 지켜 주는 그런 거라면 질색이다.

어차피 이곳에선 문양이 나타나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곳이지 않은가.

사람을 묶어 두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가가 내게 기사를 내어 줄 리도 없고, 백작가의 기사들은 워낙 바쁜 몸들이라 제대로 얼굴조차 보지도 못했지 않은가.

‘어릴 땐 뭣 몰라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긴 했지만.’

그것도 나이가 들고나니 내가 한 짓이 엄청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가가 왜 잠자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죽이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너는 참 이상해.”

리온이 나를 내려다보며 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움찔 몸이 떨렸다.

“어떤 점이?”

“왜 나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

단 한 번도 내게 이런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

리온은 그저 덤덤히 곁에 있어 줬고, 어릴 때 이후로 내게 이유 따윈 묻지 않았으니까.

“저주받은 아이. 난 그렇게 불려 왔어. 그날도 봤잖아.”

“봤지. 피로 뒤집어쓴 채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가엾은 아이를.”

아직도 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리온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무섭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아.”

리온은 나의 단호함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저주받은 아이.

그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동되는 주술과도 비슷하다.

리온의 몸에는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협을 느끼게 되었을 때 주변의 모든 힘을 흡수한다.

붉은 눈동자. 아름다움을 탐했던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붙잡아 루비와도 같았던 눈을 파서 손에 넣었다.

그들이 바로 리온의 가문인 루비온의 숨겨진 악행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힘을 손에 넣었고, 대신 신은 두 눈을 멀게 해 가족조차도 구별할 수 없게 저주를 내렸다.

리온은 저주를 받긴 했지만, 루비온 가문의 적자는 아니었다.

사생아였기 때문에 그들은 리온을 어린 나이에 힘이 발하기 전 없애려 한 것이다.

“리온, 난 널 무서워하지 않아.”

나는 리온의 두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내게만 보여 주는 붉은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그가 저주를 받았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 그녀만은 알아보게 되지 않은가.

저주가 풀리는 것이라 말하긴 성급하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리온에겐 다행이리라.

사랑하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만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내 힘은.”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에게 뺏길 마력조차 없어. 그러니까 그 점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게다가 아직 미약하잖아.”

성인이 된 후 문양이 생기면서 리온의 힘은 두각을 나타낸다.

그 전까지라면 나에겐 해가 될 일은 없었다. 백작가에 있는 모두에게도.

다행히 내가 그를 데려와 아버지가 눈독을 들이지 않게 되었지만, 에드가와 친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백작님의 눈에는 띄지 않는 게 좋겠어.”

“응? 엘르 네 아버지잖아.”

“그런 인간은 아버지라 불리는 것도 아까워. 알겠지? 최대한 부딪히지 마.”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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