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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120)

제13화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판인데.

“그런데 디리아의 말을 듣고 보니 엘르 네 방에 있던 인형들이 하나씩 늘었던 것 같아.”

나는 리온의 말에 방 안에 있는 인형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강아지 인형이 하나둘 벽장을 채웠던 것 같기도 하고……?

“퍽도 어울리는 선물이네.”

나는 머쓱한 마음에 리온의 상처를 꾹꾹 눌렀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하던지, 역시 정이 안 가는 사람이야.

‘내 나이가 몇인데 인형을 주는 거야.’

별로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한 번도 만져 본 적도 없었다.

다음에 고맙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나?

흐음, 나는 그동안 너무 못되게 대했나 싶어 지난 일을 되짚어 보았다.

‘피차일반이지 뭐.’

딱히 기억에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 말은 아버지와 나 사이엔 기억할 정도의 추억은 없다는 말이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젓고 상념을 지워 냈다.

그러고 보면 리온은 뭐 갖고 싶은 게 없나?

“리온, 넌 갖고 싶은 거 없어?”

붉은 입술에 각질 하나 없이 매끈한 리온의 입매가 유려하게 휘어졌다.

“아…….”

“움직이니까 아프지. 아, 내가 물었지 참. 미안해.”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짓곤 치료에 집중했다.

잘못하면 잘생긴 얼굴에 상처가 또 생길지도 모른다.

잘 데리고 있다가 보내 줘야 하는데 상처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대한 좋은 약을 골라 그의 입가에 정성스레 약을 발랐다.

“음……. 너무 치덕치덕 발랐나?”

적은 것보단 낫겠지.

과한 것 같은 부분은 손으로 살짝 닦아 내곤 상자를 닫았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리온의 입이 달싹였다.

“……갖고 싶은 거 말하면, 가질 수 있어?”

“뭐, 내가 줄 수 있는 거면?”

뭐야, 없을 줄 알았는데.

리온의 뜻밖의 말에 나는 내심 기대가 되었다.

욕심 하나 없이 지낸 리온이 가지고 싶은 게 있을 줄이야.

혹시 요즘 검에 관심이 생긴 건가?

옷에도, 아무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리온이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말하니 호기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비싼 거야?”

“말해도 가질 수 없을 거야.”

“뭔데 그래?”

나는 궁금해져 리온에게 계속해서 물어보았다.

뭐길래 가질 수가 없다고 하는 거지? 엄청 비싼 건가? 뭔가 괜히 승부욕이 생겨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리온은 끝끝내 내게 알려 주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의 끈질긴 질문에도 그저 웃기만 할 뿐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독한 놈 같으니.

* * *

리온은 달력을 보며 눈을 가렸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

그는 제 입가를 살짝 쓸며 엘르를 떠올렸다.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제 손에서 멀어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엘르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기 위해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면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다른 사람처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저를 싫어하게 될까?

역시 넌 저주받은 악마임이 틀림없다고 곧장 내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온은 엘르가 그러지 않을 것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곳에 날 데려온 건 너잖아.’

리온은 그날 저를 빤히 쳐다보았던 엘르의 시선이 잊히지 않았다.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하지만 그 너머로 보물이라도 찾은 것 같은 초롱초롱했던 맑은 눈동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제게 내밀었던 손은 구원이었고,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이렇게 태어난 저를 저주하게 했던 붉은 눈동자를 그녀는 저만이 보고 싶다며 속삭였으니까.

리온은 오늘 그녀에게 빼 줄 수만 있다면 심장을 빼 선물로 줬을 것이다.

붉은 브로치, 그녀의 왼쪽 가슴에 달아 준 의미를 그녀는 알까.

절대로 그녀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엘르는 마음에 드는 액세서리는 오랫동안 착용하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몇 년이 지나도 그녀의 가슴에 붉은 브로치가 달려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신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는 장치를 하나 남겨 둔 셈이었다.

“엘르, 나는 이곳에 돌아올 거야.”

리온은 제 손에 느껴지는 마나를 능숙하게 다뤘다.

제 눈과 같은 붉은 마나가 손에서 일렁였다. 타오르는 모양이, 아름다운 붉은색이 묘하게 뒤섞이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조금만 더.

그는 제 몸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문양을 보며 안도했다.

백작은 생각보다 저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엘르를 무척이나 아꼈다.

당사자인 그녀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하지만 그 덕분에 리온은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저주받은 아이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는 점점 더 사랑스럽게 커가는 엘르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이 싫었다.

저는 매일 같이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새로웠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의 자라 온 얼굴을 기억하고, 모든 걸 눈에 담지 않겠는가.

엘르는 원치 않아도 사교계에 나가야 한다.

그녀는 백작가의 장녀였고, 모든 레이디는 다 거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엘르도, 거기서 다른 이들을 만나겠지.”

으득, 이가 갈렸다.

그는 제가 아닌 다른 이들이 엘르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붙잡아 둘 권한은 제게 없었다.

“그러니, 나도 함께 갈 수밖에.”

엘르는 원하지 않겠지만, 리온은 사교계에서 엘르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없었으면 했다.

온전히 저만이 가지고 싶었으니까.

하나 이 사실을 엘르가 알게 된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녀의 앞에서만큼은 그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불순한 마음을 숨기고, 친구로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리온으로 말이다.

제가 다른 마음을 조금이라도 내보일 때마다 그녀는 거리를 두었다.

마치 언제든 저를 떠날 수 있을 정도의 거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거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엘르만의 생각이었다.

리온은 이미 그런 엘르의 행동에 상처를 받고 있었으니까.

아님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했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척해야 했다.

“하지만, 엘르. 성인이 되어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그땐 나도 너와 한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그는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종일 그녀가 생각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저 마나를 이용해 꿈에서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달랠 수밖에는.

엘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직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엘르 너에게만큼은 이런 나로 남아 있고 싶어.”

그녀의 환한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언제이고 리온은 가면을 써 그녀가 원하는 리온으로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 * *

“그래, 네 생일 선물을 이미 받았다지.”

나는 갑작스럽게 불려 온 집무실에서 에드가를 응시했다.

아버지의 옆에 있는 포장된 상자를 보니 내 선물인가 보다.

“설마 또 인형은 아니시겠죠?”

그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아, 정말. 내 나이가 몇인데 진짜로 또 인형을 준비했단 말이야?

차라리 시종장에게 부탁해 선물을 준비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선물을 챙겨 주는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야 하지 않나? 내 집에 얹혀살고 있으니 말이지. 일도 안 하고, 먹고 자고 싸고 동물과 다름없지 않나.”

“원래 인간은 포유류로 동물이죠. 백작님은 딸에게 동물이라 일컫는 짐승이구요.”

아버지라 불러 주기도 싫어 이후로도 나는 꼬박꼬박 백작님이란 호칭으로 말했다.

내 말에 또다시 에드가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무슨 웃기만 하면 저렇게 사람을 비웃는 건지.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안 주셔도 되어요. 백작님 말대로 저는 여기서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먹는 동물이잖아요.”

“자신의 위치를 잘 아니 다행이군.”

허어.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낳았어? 혼자 살지, 괜히 날 낳아서는 이 고생을 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 브로치인가.”

“네, 예쁘죠?”

“조금 있으면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군.”

“그런 것도 신경 쓰고 계셨어요?”

에드가는 턱을 매만지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뭘 저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거지.

“네 나이가 벌써 14살이었던가.”

“그러게요. 어느새 나이가 먹었네요. 원래 아이는 빨리 크는 법이거든요.”

나는 어느새 눈높이가 얼추 맞는 에드가를 빤히 보았다.

물론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고개를 한참 들어 올려야 시선이 맞겠지만.

“파트너는 정했나?”

“아직 사교계 데뷔 날짜도 안정해졌는데 파트너는 무슨.”

왜 이래? 부쩍 관심을 주는 게 영 불안한데.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지?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버지의 눈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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