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도대체 뭘까.
리온의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생경한 감각을 떠올렸다.
따뜻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일까. 리온이 내게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시작 지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데려온 것부터 잘못인가?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그는 다른 이들에게 끌려가 학대를 당했을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조금 거리를 둬야겠어.”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이상하게 내게 더욱 집착을 하는 것 같았다.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온이 내게 애착이라도 가지게 되면 큰일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은 이게 아니었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간을 좁혔다.
“뭘 걱정하는 거야.”
그래 봤자, 리온에게 문양이 생기게 되면 저절로 내게 관심이 떨어질 텐데.
시간이 지나고 떨어지게 되면 그는 또다시 나를 잊고 말 것이다.
애초에 나란 사람을 찾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별걱정을 다 해.
나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이라도 든 건지 쓸모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애초에 리온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를 구원해 줬기 때문이었다.
치기 어린 감정은 금방 사라기지 마련이다.
서랍에 넣어 놓았던 수첩을 꺼내 들어 날짜를 보았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네.”
벽에 그어진 눈금들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13살, 한 살 한 살 그와 나의 키는 차이가 벌어졌다.
그와 반대로 둘의 사이는 더 가까워진 것 같지만.
나도 문양이 나타날까? 내게도 운명의 사람이 있을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따로 정해진 운명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소설 속 중요한 역할도 아닌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는 것부터 웃긴 일이었다.
“뭐 상관없어.”
누구와 만나든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여길 떠나고 없을 테니까.
나는 그가 여주인공인 제니스를 만나게 되는 것을 본 후 이곳에서 떠날 생각이었다.
물론, 몰래 지켜볼 것이다.
내가 죽을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리온을 찾아가야만 하니까.
나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할 생각도 없고, 다른 이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삶을 살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돈은 어느 정도 모았으니 떠나서 살아도 괜찮겠지.’
하지만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수가. 소설 내용을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나의 무능함에 절로 기분이 나빠졌다.
침대에서 뒹구르르 이불에 감싸지도록 몸을 말던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책 속의 내용을 떠올려 작게 이름을 숨긴 채 투자하긴 했지만, 부족했다.
뭔가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다.
‘찻집? 디저트 집?’
손재주도 없으면서 무슨.
하지만 따지고 보면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도 어딜 도망가서 찻집도 차리고 베이커리 집도 차리고 하지 않았던가.
막상 해 보면 잘 될지도 모르고.
“아니, 아니야. 난 여주인공이 아니니까.”
나는 재빨리 현실을 수긍했다.
일전에 케이크를 만든다고 주방에서 설쳤다가 태워 먹은 걸 생각한다면…….
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게를 말아먹은 사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착한 리온마저도 미안하다고 울었던가.”
손에 쥔 검은 케이크를 보며 공포에 질렸던 리온의 표정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큭큭 웃음이 났다.
버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그의 안절부절못했던 모습이 내심 귀여웠다.
내일은 쿠키를 구워 보자고 할까?
조금은 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이가 어렸으니까 이번엔 좀 다를 거야.
벌써 맛있는 쿠키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느낌이 들었다.
* * *
“쿠, 쿠키를 구울 거라고요?”
당황한 디리아가 나를 향해 말을 더듬었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랜만에 쿠키를 구워 보려고.”
“아가씨. 제가 맛있는 제과점을 알아요.”
“디리아. 내가 만들 거야.”
나의 단호한 말에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옆에 서 있던 리온이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뒤로 물러섰다.
“엘르, 나 검 연습이 있었는데 깜빡했어.”
슬그머니 내빼는 리온을 보며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오늘 스케줄 없는 거 다 알아.”
“……보충이야.”
“그렇게 내가 만든 거 먹기 싫어?”
“아니, 아니!”
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말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나는 모른 척 미소 지었다.
“괜찮아. 나 혼자 만들어서 가져다줄게.”
“같이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쿠키 나도 만들고 싶어졌어!”
다급한 리온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좋아.”
디리아는 리온이 함께 한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백작가에서 내 손재주는 모두가 다 아는 듯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던 주방장이 리온을 힐끗거렸다.
“리온 님도 함께하십니까?”
“네, 엘르가 하고 싶어 하니 함께 해야죠.”
리온은 활짝 웃으며 내 옆에 섰다.
결연한 의지로 소매를 걷어붙인 나는 눈앞에 준비된 재료를 보았다.
“다들 저를 너무 못 믿으시는데, 두고 보세요.”
나의 힘찬 목소리에 주방장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조금은 기대하는 시선에 자신감이 붙었다.
기세등등하던 초반의 나는 어디 가고, 무른 반죽에 낑낑거리고 있는 걸까.
“……리온, 손에서 안 떨어져.”
나는 결국 옆에서 반죽을 반듯하게 하는 리온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내 손을 보더니 내 뒤로 섰다.
“손에 다 붙었네.”
등 뒤로 불쑥 리온의 얼굴이 내밀어졌다.
그의 단단한 가슴의 감촉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이렇게 컸지?’
리온의 품 안에 쏙 들어간 내가 손에 붙은 반죽을 떼어 내는 커다란 손을 응시했다.
그는 능숙하게 반죽을 떼어 내곤 엉망이 된 내 손을 잡아 물에 담갔다.
“자, 일단 씻자.”
“……응.”
얼떨결에 그의 품에 갇힌 채 수돗물에 손을 씻어 내렸다.
리온은 뒤에서 열심히도 내 손을 씻겨 주고 있었다.
“저기, 손은 나 혼자 씻을 수 있어.”
“이미 내 손이 더러워졌으니까 괜찮아.”
리온은 결국 내 손에 반죽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밀가루를 조금 더 넣으면 이렇게 질척이지 않아.”
나는 가만히 내 반죽이 점점 정상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역시 리온은 못 하는 것이 없어.
“고마워. 그래도 반죽은 네 덕분에 실패는 안 했네.”
“나도 엘르 덕분에 잘하게 되었는걸.”
“응?”
리온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재료를 정리하고 있던 디리아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 기억 안 나세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하겠다고 주방에 드나드는 바람에 리온 님께서도 함께 얼마나 고생을 하셨다고요.”
“……내가?”
“그럼요. 태워 먹은 케이크만 해도 몇 개나 될걸요?”
이상하네. 나는 분명 몇 번 안 만든 것 같은데…….
디리아의 말에 리온이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정말 나는 재주가 없는 건데?
입가가 썼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엔 성공할 것 같네요.”
디리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숙성까지 마쳐 제대로 반죽이 되었지만, 이건 나 혼자 힘으로 한 게 아니었다.
“역시, 난 이쪽도 아닌 것 같지?”
도대체 난 뭘 하고 먹고 살아야 하나.
앞길이 막막해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쯤 되면 너무하지 않은가.
어차피 나중에 죽게 될 운명이니 재주 하나 없이 만든 캐릭터일까?
누구나 태어날 때 하나쯤은 가지고 태어난다던데!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웬수 같은 에드가에게 가서 왜 날 이렇게 낳았냐고 따지고 들다간 그날로 죽을지도 모른다.
‘아, 이참에 쿠키나 구워서 줘 볼까?’
조금은 사이좋게 지내도 되지 않으려나?
나도 어느 정도 컸으니 그도 덜 귀찮아할 것 같고 말이다.
언제까지 모른 척하며 살아갈 수도 없으니 갱생 정도는 노력해 봐도 되지 않을까.
곰곰이 에드가와 내 사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으니 리온이 툭툭 내 팔을 쳤다.
“엘르, 제과 쪽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럼 내가 항상 도와줄게.”
쿠키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리온은 내게 과분할 정도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다.
“아니, 리온. 나는 나 혼자 힘으로 해내고 싶었던 거야.”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리온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닫았다.
이 바보야. 이건 누가 봐도 네가 한 거잖아! 게다가 항상 도와주겠다니.
어차피 크면 여주인공한테 갈 건데 평생 있을 것처럼 말하다니.
치사한 녀석. 너도 네 앞길을 모르니 그런 말을 내뱉는 거겠지.
“리온, 항상 네가 날 도와줄 수는 없어.”
“……맞아. 그러네.”
그는 내가 할 말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무수히 그에게 세뇌하듯 뱉어 놨던 말이었으니까.
가족이긴 했지만, 언젠간 떨어져야 하는 사이.
친구였지만 그뿐인 사이.
나와 리온의 관계는 정립되어 있었다.
잊지 않게 매일 그에게 말했다. 때가 되면 가야 한다고, 우린 가는 길이 다르다고 말이다.
‘나중에 안 가겠다고 고집이라도 피우면 나라도 도망가야지.’
나는 여주인공과 엮여 죽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갱생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놔두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으음, 이제 반죽을 찍어 보실까요?”
어색한 기류 속 디리아가 나와 리온에게 쿠키 틀을 건넸다.
나는 말없이 반죽을 밀어 틀로 열심히 찍어 내기 시작했다.